대현자는 죽고 싶어 88화
내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단번에 인수인계도 없이 황위를 물려주는 건 안 된다고 반대하자, 이르커스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 딴청을 피웠다.
내가 이렇게 강경한 반대를 내비치지 않았더라면, 정말 남한테 황제 자리 넘기고 나랑 요양이나 떠나려고 했나 보다.
“내가 널 엉망으로 가르친 건 맞지만, 나라 버리는 황제로 가르치진 않았다. 네가 선조야, 인조야, 뭐야……. 아니다, 연산군인가?”
“또 이상한 소리…….”
슬슬 반지 자국을 문지르던 이르커스의 손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내 손을 깍지 껴 붙잡았다. 멈칫할 새도 없이 틈 하나 없게 붙잡힌 손 사이로 이르커스의 체온이 느껴졌다.
“하나만 물어보자.”
“응.”
“내가 대체 왜 좋아?”
어린 시절, 죽을 뻔한 자기를 구해 주고 길러 준 첫 스승이라 나를 특별하게 여기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이르커스는 내가 돕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살아나가서, 알아서 황제가 됐을 것이다. 주인공이니까.
꼭 제4의 시선으로 보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라단타보다는 이르커스가 낫다. 이르커스가 남쪽 숲에서 살아남아 황궁으로 돌아가기만 했어도, 지금보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을지언정 자기 자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이르커스 본인도 아마 그 사실을 알고는 있을 테다. 자기가 천재인 걸 모르는 천재는 사회랑 완전히 격리돼서 살지 않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니까. 남들이 마법 수식 하나 못 풀어서 쩔쩔맬 때, 혼자서 ‘이걸 왜 못 풀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닐 텐데.
그러니 이르커스가 날 좋아하는 건 ‘스승의 은혜’라거나 ‘날 살려 준 어른은 네가 처음이야’라는 것만으론 설명하기 어렵다.
머릿속에서 예카리나가 ‘그거면 됐지, 사랑에 대체 뭐가 더 필요해!’ 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직 제정신이었으므로 언뜻 들릴 뻔한 환청은 그냥 싹 무시했다.
“솔직하게 말해?”
“당연히 솔직하게 말해야지. 나한테 거짓말하려고?”
“당신은 나한테 숨 쉬듯이 거짓말하잖아.”
“내가 하는 거짓말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짓말…….”
“유안.”
또 부모님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다, 훅 치고 들어오는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말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말문이 절로 콱 막혔다. 자기 얼굴이 아깝지도 않나? 내가 이르커스 얼굴로 태어났으면 저스트 텐 미닛 부르면서 아무나 꼬드겼을 텐데. 순애도 이 정도면 광기였다.
“내 선조도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다면서. 나도 그런가 보지.”
“예카리나랑 너랑 같아? 예카리나는 그냥 잘생긴 쓰레기를 사랑했던 거라고.”
“가만히 보면 당신, 나보다 예카리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뭐?”
“아니, 그냥 해 본 소리야.”
약간 눈깔이 돈 것 같은데.
나는 모르는 척 시선을 다시 처연하게 내리까는 이르커스의 얼굴을 살폈다. 수상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풀 죽은 강아지 같았다. 강아지라기엔 너무 자랐지만, 개새끼라곤 할 수 없으니까.
“당신은 붙들어 두지 않으면, 언제든 멀리로 떠날 것 같아.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
이세계인인 거, 엄청 티났구나.
물론 나는 내가 다른 세계에서 수능 당일, 트럭에 치여 죽은 불행한 영혼이라는 걸 숨길 생각은 딱히 없다. 다른 사람한테 말해 봤자 머리에 무슨 병 생긴 거 아니냐고 의심 받을 게 뻔하니까 상식적으로 함구했을 뿐이다.
아무렴 죽지 않는 인간도 있는데, 다른 세계에서 이세계 트립당하는 인간도 있겠지. 불행하게도 그게 둘 다 나지만.
“입 맞추고 싶어.”
“안 돼.”
“질문에 답했으니, 상응하는 보상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야, 잠깐. 그게 무슨 ‘착하게 굴었으니 상을 주지’ 같은 소리야?”
“무슨 소리인진 모르겠지만, 착하게 굴었으니까 상을 줘.”
네가 언제 착하게 굴었는데?
미치고 팔짝 뛰겠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보장해 주던 마법 계약이 파기당한 탓에, 이르커스는 브레이크 고장 난 스포츠카처럼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나는 순진한 척 금빛 속눈썹을 짙게 내리깔고 속닥거리는 이르커스를 가만 바라보았다. ……이 자식, 왜 안 본 새에 이런 선수가 되어 있지?
부정맥이라도 온 것처럼 뛰는 심장을 뒤로한 채,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했다.
저 처연한 얼굴에 넘어가면 안 된다. 이 자식은 내 말 하나도 안 듣고, 목숨 걸고 계약 파기해서 기어코 영생을 얻어 낸 못난 제자니까.
“왜, 진짜 안 돼?”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 팔을 잡아끌어당기는 이르커스의 손이 더 빨랐다.
우리 사이에 있던 좁은 테이블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머리로는 분명 저항했는데, 몸은 순순히 이르커스 쪽으로 기울었다.
입술이 닿고, 숨이 섞인다. 눈을 감지 않은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고개를 뒤로 슬쩍 물릴 때마다 슬그머니 기어 올라온 다른 손이 내 뒷머리를 붙잡아 제대로 고정했다.
나는 이도 저도 못 한 채로 다 자란 제자에게 붙들려 정신없이 키스나 당했다.
숨이 넘어가지 않게끔, 호흡을 불어 넣어 주는 이르커스 때문에 깨닫고 말았다. 여기서 못 멈추면, 오늘 진짜 끝까지 가게 될 것이라는 걸.
조상신이 파업했던 레드 라이트 위에 서서 마카레나를 추기 시작했다. 집 나간 이성은 실종 신고를 했는데도 돌아오질 않았다. 나는 더듬더듬 이르커스의 가슴을 짚어 떼어 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마법을 못 쓰는 대현자는 진짜 허접이었다. 이럴 수가.
첫 키스는 아니지만, 따라가기 버거운 입맞춤이긴 했다. 축축한 살덩이가 얽혀 든다. 피하려고 고개를 슬쩍 돌려 봤자 제 무덤 파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혀끝이 물리고, 정말 개새끼라도 된 것처럼 빨아당기는 탓에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레드 라이트 위에서 마카레나를 추던 조상신이 나처럼 숨이 부족해 헉헉거리며 파업을 선언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쩌지? 그냥 한번 잘까? 마비된 이성은 얼마 안 가 200년쯤 후회할 확률이 높은 판단을 내릴 것만 같았다.
“이르커스!”
하지만 내가 아직 관계 정립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르커스랑 침대에서 불순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두 세기 동안 후회할 일 없게, 눈치 없는 트리스탄이 노크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으악, 내 눈!”
물론, 열렸던 문은 다시 쾅 하고 닫혔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트리스탄에게 속으로만 감사를 표했다. 제자와 그 제자의 다른 스승 간의 입맞춤을 직관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더듬더듬 이르커스를 밀어내자, 이르커스는 그제야 먹던 솜사탕 뺏긴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문밖에서 트리스탄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팔을 들어 내 입술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이래 봤자 남들 눈에는 ‘저 방금 황제랑 키스했어요’라는 게 다 보일 테지만 별수 없었다.
“트리스탄, 그냥 들어와.”
뭐, 트리스탄에겐 쪽팔릴 것도 없었다. 나도 트리스탄이랑 이졸데의 이러쿵저러쿵 블라블라 한 연애 사정 정도는 이졸데의 입을 통해서 다 들었으니까.
거기다 트리스탄은 과거에 약 잘못 먹은 이르커스와 나를 방에 남겨 두고 도망친 적 있는 배신자였다. 이미 내가 이르커스랑 할 만한 건 대충 다 했다는 걸 알고 있는 놈에게 들켰으니 부끄러움은 덜했다. 자다가 이불은 몇 번 걷어차기는 하겠지만.
“내가 진짜, 너희 때문에 남사스러워서 살 수가 없다.”
“그럼 죽어. 아니다, 죽지 마……. 나도 못 죽는데 네가 왜 죽어.”
“대현자, 당신이라도 정신 좀 차리쇼. 아무튼, 연애질에 눈이 멀어서는. 라단타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소.”
“걔, 아직 살아 있어?”
진짜 명줄 길다.
나는 악역의 끈질김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앙헬이 리타이어 당했는데 라단타가 살아 있어? 세계관 파워 밸런스가 미쳐 날뛰고 있다.
“당신 제자가 사람 함부로 죽이면 당신한테 미움 산다고 살려 뒀거든.”
“진짜?”
“…….”
이르커스 얘는 다른 말은 하나도 안 듣고 그런 건 듣는 건가.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이 됐다. 생판 모르는 남을 죽이는 것과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었어도 절반은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를 죽이는 데엔 큰 차이가 있으니까.
대단한 윤리와 도덕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르커스가 나처럼 권태로워져 아무나 전기로 지지고 죽여도 아무렇지 않게 되는 순간은 오지 않길 바랐다.
“전 황비가 제 아들을 아카데미 쪽으로 빼돌렸다는군.”
“추적해.”
“다시 재기하진 못할 텐데. 그냥 두는 게 어때.”
“라단타가 총을 훔쳐서. 그냥 놔둘 수가 없어.”
급하게 도망치는 와중에 훔칠 건 다 훔쳤네. 아마 직접 훔친 건 이번에도 라단타가 아니라, 궁 어딘가에 잠입해 있을 에킨도르 멜킨일 것이다.
거기도 같은 배를 탄 상태니, 이대로 허망하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겠지. 잡을 줄이 라단타밖에 없으니 에킨도르 역시 애가 탈 터였다.
“아무튼, 전 황비도 고생이지. 남편이나 아들에 비하면 인품도 괜찮았는데.”
자식 하나 잘못 키워서 다른 자식한테 피해 주는 건 어느 세계나 다 똑같구나.
아카데미 쪽으로 숨어들었다는 라단타가 어디에 몸을 의탁했을지는 뻔했다. 마리아한테 가 있겠지. 마리아는 라단타 때문에 폐위당한 걸로도 모자라, 베첼 공작처럼 반역죄로 사형당할 수도 있었다.
“그 새끼, 사고 치기 전에 잡아야겠는데.”
“그럴 거야. 당신이 준 물건인데…….”
“아니. 내가 준 물건이 문제가 아니라, 애들 있는 아카데미에 총 가진 놈이 기어들어 간 거잖아.”
어떻게 사달이 나도 놀라울 게 없었다. 이래서 총기는 규제해야 하는 건데. 비효율적인 무기라고 별 제약 없이 유통되는 총기류들을 생각하며, 나는 두통이 몰려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안 되겠다. 악역이고 뭐고, 이제 그냥 퇴장 좀 하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