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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87화 (87/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87화

    나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마도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지에는 별다른 기능이 없었다. 정말 그냥…… 평범한 반지였다.

    이르커스의 왼손에도 내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보아, 정말 상징적인 의미의 액세서리인 것 같았다. 에리스와 형식적인 결혼반지도 안 맞춘 놈이 준 선물치곤 정말 과했다.

    나는 물끄러미 그 반지를 내려다봤다.

    이제 나는 불멸자고, 너는 필멸자라는 변명으로 이르커스를 밀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 돼 버렸다. 제일 큰 변명거리가 사라지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옆에만 있어 달라고 애원하던 그 애달픈 얼굴을 떠올리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진다. 잘생긴 얼굴로 처연한 표정 짓는 건 제국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이제 어쩌면 좋지…….”

    이대로 이르커스의 곁에 남는다면 많은 게 쉬워질 것이다. 이르커스는 죽지도, 늙지도 않는 황제가 되어 주인공답게 살겠지. 죽지 않는 황제니 후계 역시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그럼 나는 황비도, 스승도 아닌 애매모호한 위치에 서서 이르커스의 옆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게 대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단 말인가?

    영원한 건 이제 이 세상에 이르커스와 나밖에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르커스와 나의 목숨 말고는 모든 게 다 가변적이었다.

    언젠가 이르커스가 나로 인해 얻게 된 영생이 지겨워져 나를 죽이고 죽음을 되찾으려 든다면, 내가 그걸 감정적으로 견딜 수 있을까? 이르커스의 사랑한다는 말에 쥬리아가 건 저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왼손 약지에서 천천히 반지를 빼냈다. 고작 며칠 끼고 있었을 뿐인데, 금세 반지 자국이 남았다.

    그 자리를 마저 손으로 쓸어 보았다. 아직도 미약하게, 이르커스의 체온이 내게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

    “도망치는 건 늘 빠르네.”

    “마리아가 도운 것 같던데.”

    “정확히 말하자면 마리아가 아니라, 전 황비가 도운 거겠지.”

    지하 감옥에 수감돼 있던 라단타가 도망쳤다. 이 정도 집념이면 그냥 황제를 시켜 줘야 할 것 같다.

    이르커스는 턱을 괸 채로 트리스탄에게 물었다.

    “그쪽은 내가 영생을 얻게 됐다는 걸 몰라서 포기를 못 하는 걸까.”

    “알아도 포기 안 할걸.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영생을 얻은 불길한 황제라는 식으로 떠들고 다니겠지.”

    “참 성실해, 다들.”

    “……마리아는 어쩔 거야?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돼. 혈연이라는 건 꽤 큰 접점이라고.”

    “그냥 둬.”

    “진짜 어쩔 생각인데?”

    유안 때문에 황궁 비밀 통로를 다 막아 뒀음에도 라단타가 이토록 빨리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는 건 마리아 말고도 내부에 조력자가 더 있다는 뜻이다.

    이르커스는 귀족 중 다수가 저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법한 후계자지만, 누구 배에서 태어났는지를 따지는 것이 이 세계의 관례니까.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불길하게 여기는 것처럼 사람들은 비이성적으로 황제의 핏줄이 적자인지 서자인지를 따졌다.

    깊게 따져 보면 지나치게 비이성적이라 오히려 이성적이었다. 귀족들을 가까이하지 않고, 함부로 휘두를 수 없는 이르커스보다는 ‘도움이 필요하며’ ‘휘두를 수 있을 만큼 약한’ 라단타가 귀족들에게 더 큰 이익을 안겨 줄 수 있었다.

    결국 색을 따지거나 핏줄을 따지는 일 모두 일종의 명분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 스물아홉 살이 된 자신도 이런 인간 사회에 진절머리가 나는데, 유안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꼭 황제를 해야 할까?”

    “또 무슨 소리야. 진정해라. 나 죽기 전까진 황제 하고 있으라고. 네가 내 밥줄인데.”

    “라단타나 멜킨 후작이나, 이 자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차고 넘치잖아.”

    “…….”

    “유안이랑 남쪽 숲에 틀어박혀서 단둘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이르커스는 제 왼손을 내려다봤다.

    약지에 자리 잡은 반지는 과거, 유안이 이르커스에게 선물로 줬던 마도구와 정확히 같은 디자인이었다. 마법적 기능은 없지만, 이르커스는 이 반지가 마음에 들었다.

    마법 계약은 파기되었다. 이르커스는 이제 유안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같은 불멸자로서,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게 될 거라는 간악한 협박거리를 들고 유안을 붙들어 둘 수 있게 된 것이다. 과정은 좀 꼬였지만, 원하는 바는 어느 정도 이뤄 냈다.

    그러니 이제 이르커스는 더 이상 무소불위의 권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머리 아프게 황궁 정치에 휘말려 사람을 장기짝으로 쓰고,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로 돌려 말하는 것도 슬슬 지겨워졌다.

    “네가 이럴 줄 알고 이 소식도 준비해 왔다.”

    트리스탄은 황제 자리에 아무 미련 없어 보이는 이르커스를 보며 혀를 찼다.

    이르커스는 따지자면 황제 노릇을 꽤 잘해 온 편이었다. 전 황제가 자리보전에만 급급한 무능한 인간이었던 탓에, 기본적인 업무 처리를 꼼꼼하게 잘 해내고 전쟁에선 매번 승리하는 이르커스는 꽤 괜찮은 황제로 평가 받고 있었다. 원래 이전이 최악이면 차악 정도만 돼도 차선으로 보이기 마련이니까.

    이르커스는 먼저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었고, 전시에도 세율을 무리하게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탑을 박살 내고는 위로금이라며 마탑이 축적한 부를 귀족들이 아니라 평민들 쪽에 풀었다.

    대단한 꿍꿍이를 가지고 움직인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이르커스를 보는 사람들의 평가는 제각기 갈렸다.

    상벌이 명확하고, 보상이 후하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이르커스는 백성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었다. 물론, 얼굴도 그 인기에 한몫했다. 돈 많이 주는데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황제의 초상화가 전례 없이 비싸게 거래되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성군은 못 되고, 스승과 결혼하겠다는 미친 소리를 뱉는 괴짜지만, 트리스탄이 보기에 이르커스는 지도자로서 라단타보다 나은 인재였다.

    “라단타가 총도 훔쳐 갔다.”

    “유안이 준 것?”

    “그래. 모조품으로 바꿔치기돼 있었다더군.”

    “……관리인은 잡아 뒀나?”

    “죽었어. 에킨도르 멜킨이 잠입해 있는 줄은 알았지만, 간 크게 절도에 살인까지 벌이고 도망칠 줄은 몰랐지. 네가 유안한테 정신 팔린 새에 황궁도 소란스러웠거든.”

    “멜킨 후작한테 에킨도르 멜킨에 대한 추적을 따로 부탁해야겠어.”

    “에리스 멜킨에게 에킨도르에 대한 처분을 넘길 건가?”

    “그래. 하지만, 총은 내 손으로 직접 되찾아야지. 유안이 준 거라서.”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트리스탄은 목뒤를 부여잡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 부쩍 혈압이 잘 오르는 것 같았다.

    요즘 트리스탄이 가장 부러워하는 상대는 일 끝났다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 버린 사밀라와 쥬리아였다. 지금처럼 이르커스 옆에서 격의 없는 조언자로 지내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보람 찾겠다고 계속 일하다간 조만간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았다.

    “이거 끝나면 나도 장기 휴가나 좀 줘라.”

    “그래.”

    “그렇다고 황제 때려치울 생각은 하지 말고.”

    “…….”

    한숨부터 나왔다. 어쩌다 이런 놈을 좋다고 제자로 거둬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트리스탄이, 형식적인 예법만 갖춘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현자랑 제대로 대화해 봐. 내 생각에, 너희는 진짜 대화가 필요해.”

    ????????????

    얘는 안 바쁜가?

    마법 계약이 파기되자, 이르커스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우리 사이의 공백기는 마치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이르커스는 스스럼없이 내 선을 넘어왔다.

    영원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거리감이 없어진 것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전처럼 같은 침대에 누워서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티타임을 보내는 일이야 내 나약한 심장으로도 견딜 만했다.

    이제 이르커스가 열두 살이나 열일곱 살이 아니라, 스물아홉 살인 탓에 잔뜩 커 버려서 전처럼 전혀 귀엽지 않다는 것만 제외하면.

    “내가 준 반지, 마음에 안 들어?”

    마주 앉아 별것 아닌 농담을 주고받다가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 때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이르커스가 내 손에 고이 끼워 준 반지를 빼 버렸다. 아직 마음이 뒤숭숭한 탓이었다.

    마음에 들고 말고를 떠나서, 국혼 개 박살 난 지 얼마 됐다고 내가 이걸 끼고 돌아다닌단 말인가. 나 혼자 끼는 거면 몰라도, 이르커스 왼손에도 반지가 버젓이 있는데.

    가뜩이나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은 황궁에서, 안정적인 정치 상황도 아닌데 다른 논란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런 계산적인 생각 말고도 심적으로 심란해서 일단 내 눈에 안 보이게끔 서랍 깊숙한 곳에 반지를 넣어 두었다.

    “마음에 안 들고 말고를 떠나서 내가 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왜? 당신이 내 결혼 상대가 아니라서?”

    “…….”

    “사밀라 말이 맞네. 당신도 나도 지나치게 고지식해.”

    나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큰 손이 내 왼손을 덥석 붙잡았다.

    손이 닿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조금 더 강한 힘으로 붙잡혔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손잡는 것 정도는 대단한 스킨십도 아니었다. 봉인당하기 전이긴 하지만, 나는 약을 잘못 먹은 이르커스를…… 그…… 손으로 해 준 적도 있었으니까. 의식하지만 않으면 사소한 접촉에 불과하다.

    그 당시엔 나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가장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게 나였다.

    별것도 아닌 접촉에도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반지 자국이 남은 내 왼손 약지를 굳은살 박인 손이 느릿하게 문지르는 게, 그럴 리가 없는데 일종의 성적인 어필처럼 느껴져서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르커스는 아무 생각 없는데 나 혼자만 반응하는 것 같아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남 탓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나는 속으로만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칸트 아저씨! 살려 주세요! 이성이 자꾸 집을 나가려고 해요!

    “과정이 좀 달라졌지만, 목적한 바는 이뤘으니 에리스 멜킨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

    “황제 노릇 하려면 미혼으로 있기 쉽지 않을걸.”

    “누가 뭐라고 하면 멜킨 후작한테 황위 넘기고, 당신이랑 잠적 타려고.”

    “너 미쳤어?”

    “응.”

    나라가 장난이야?

    나도 모르게 이르커스의 멱살을 붙잡을 뻔했다. 한번 황위에 올랐으면 나라를 책임져라. 사랑에 미쳐도 제국은 책임지고 미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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