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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86화 (86/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86화

보랏빛이 시야를 점령한다.

마법 계약은 수식에 불과하면서,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이르커스를 집어삼켰다. 숨이 막히고,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 온몸에 차올랐다.

꼭 앙헬이 준 와인을 잘못 마셨을 때처럼 몸이 달뜨고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르커스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조금이라도 평정이 흐트러지면, 계약 파기를 도와주고 있는 마녀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었다.

유안이 열두 살의 이르커스에게 내밀었던 마법 계약은, 맞잡은 손안에서 산산이 깨져 나갔다.

정교했던 수식은 실타래처럼 풀려 허공으로 흩어지고, 마나의 흐름에 예민한 마법사 몇이 구역질할 정도로 주변의 마나가 요동쳤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이 자리에서 죽거나, 영원을 살게 되거나.

극단적인 선택지다. 그러나 이르커스는 그 이지 선다형의 페널티를 전해 들은 순간부터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근거 없는 확신이었다. 매번 게임에서 패배하는 도박꾼들이 할 만한 두서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르커스는 유안이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

언제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었다. 유안은 누구에게든 항상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자주 지껄이는 편이었으므로 이르커스는 그 표현이 무슨 뜻인지 되묻지 않았다. 되물었어도 정확한 답을 들을 수는 없었을 터였다. 유안은 아닌 척하지만, 지나치게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유안은 이르커스를 절대 죽지 않을 상대로 여기면서도 무슨 일만 터지면 허겁지겁 달려와 이르커스를 끌어안았다. 꼭 이르커스가 자기 때문에 죽게 될까 봐 겁이 나는 사람처럼.

역설적이게도, 유안의 그런 행동 덕에 이르커스는 망설임 없이 마법 계약 파기를 결심할 수 있게 되었다.

영생을 얻지 못하고 이 자리에서 죽는 것도 사실 나쁘지 않기는 했다. 죽은 사람이 되면, 유안이 종종 언급하는 선조 ‘예카리나’보다 자신이 우위에 서게 될 것이므로.

이르커스로서는 계약 파기로 얻는 페널티가 어느 쪽이든 잃을 것이 없는 장사였다. 유안이 죽는 것보단 뭐든 이득이었다.

내가 세계의 주인공이라면, 당신도 내 옆에 있어야지. 당신이 영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나도 그 옆에 있어야지. 날 거뒀으면, 한 번은 나를 제대로 봐줘야지.

동경과 감사에서 시작한 감정이 애정이 되고, 그 애정에 긴 인내가 더해지면서 원망으로 추락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원망은 다시 의문으로, 의문에서 또 사랑으로…… 답을 되돌려 받지 못하자 결국에는 집착으로 바뀌었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그럼, 날 두고 죽으려고 하지 말았어야지.

????????????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뚝 떨어지게 된 뒤로 내겐 알게 모르게 사라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었다.

타지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은 다 느낀다는 공허함이 이런 느낌일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이종족들과 한 세월 걸리는 모험을 떠나도, 오래된 물때처럼 자리 잡은 외로움은 사라질 줄 몰랐다.

왜 하필 나였을까? 수능 전날에 허튼짓한 고등학교 3학년이 나 하나는 아니었을 텐데.

물론,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불쌍한 구석이 있었다. 9월 모의고사 만점자인데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까. 신이 정말 실존한다면, 안타까워서라도 내게 한 번 정도는 기회를 더 줄 법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나는 다시 한번 주어진 이 기회에 마냥 감사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나는 세월이 흐를수록 이승이 지겨워졌다.

갤런 주머니가 창고에 쌓이고, 마법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대현자’ 칭호를 받고, 책에 내 이름이 실리고, 사람들이 영생불멸에 대한 열망으로 나를 찬양할수록…… 나는 점점 더 죽고 싶어졌다.

내가 한때 좋아했던 존재들은 전부 늙어 죽거나 제 수명을 채우기도 전에 살해당했다. 병이나 사고로 죽은 이들도 많았고, 세상은 빠르게 바뀌면서도 별로인 부분만 항상 그대로였다.

이르커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근원적인 외로움은 내 마음에 더 깊이 뿌리 내리기만 할 뿐, 사라질 줄을 몰랐다.

이 세계의 주인공인 이르커스가 남쪽 숲으로 굴러들어 왔을 때, 내가 느낀 기쁨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주식으로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나보다 더 기쁘진 않았을 거다.

잠이나 자며 무료한 시간을 죽이고 있던 내게, 이르커스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희망이었다.

판도라가 열어 버린 비극의 상자 속 새끼손톱만 한 희망처럼, 가슴 깊이 사무치는 외로움을 잊게 만들어 어떻게든 살아가게 만드는 존재.

“……왜 그랬어?”

“당신이 정말 죽을까 봐.”

“네가 날 사랑하는 건 착각이야.”

“…….”

“긴 생을 살게 되면, 넌 언젠가 기필코 나를 원망하게 될 거라고.”

이르커스와 나의 마법 계약은 결국 파기되었다. 그렇게 막으려고 했는데, 내가 나약해진 탓인지 이르커스가 훌쩍 자라 버린 탓인지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그 반동으로 이르커스는 이제 나처럼 죽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내가 가진 영생 저주를 공유하게 된 것이다. 내가 죽지 않는 한, 이르커스 역시 죽지 못한다.

최악의 결과다.

내가 생각한 최선은 <이르커스의 서>에 단 한 줄도 등장할 일 없는 내가 순순히 원하던 죽음을 통해 퇴장하는 거였는데. 마음은 좀 시리겠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니 이르커스가 그 이후의 삶을 잘 헤쳐 나가길 바라면서 눈감기를 꿈꿨는데.

이 근원 모를 외로움에, 이르커스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쥬리아가 내게 저주를 걸었으니, 이르커스는 앞으로도 나를 사랑할 것이다. 영원한 건 없더라도 마녀의 저주는 영원만큼 강력하니까.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이야 스물아홉에 불과하니 괜찮겠지만, 백 살이 넘고 사백 살이 넘게 되면 이르커스는 이 선택의 순간을 분명 후회할 것이다. 삶이 얼마나 지겹고 끔찍한 건지 체감할 순간이 올 테니까.

이르커스가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붙잡았다. 나보다 체온이 조금 높았고, 검을 다루는 탓에 굳은살이 박인 손은 거칠었다. 왼손 약지에 뭔가 끼워지는 감각이 선연했다.

이르커스의 손과 달리,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자 나도 모르게 어깨부터 떨렸다.

“당신이 날 원망해도 좋아.”

“이르.”

“죽여 달라는 말을 끔찍하게 안 들어주는 상대니, 제자 자격이 없다고 말해도 괜찮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르커스는 내 첫 제자였고, 내 죽음을 향한 희망이었으며……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고야 만 상대였다.

이전에 내가 선물했던 마도구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내 손에 끼워졌다. 이르커스는 그러고도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내 손바닥에 제 뺨을 기댔다.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줘.”

한 제국의 황제가 내 침상 옆에 앉아, 어린애라도 되는 것처럼 손바닥에 뺨을 비비면서 이런 소리를 한다.

누가 이 꼴을 본다면 황제라는 자리가 참 우습구나 싶겠지. 나는 손끝으로 이르커스의 감은 눈가 아래를 살살 쓸어 주었다.

“당신 옆에만 있게 해 주면, 그걸로 만족할게.”

애원하듯 말하는 목소리 끝이 떨렸다.

이르커스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나처럼 이방인도 아니고, 노예부터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미 외로워하고 있느냐고.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네가 가진 근원적인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희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냐고.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다른 팔을 뻗어, 언젠가 어린 이르커스를 껴안아 주었던 때처럼 이르커스의 목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내가 너를 완전히 망쳤고…….”

“…….”

“너도 나를 망쳤구나.”

????????????

앳된 얼굴의 소년이 잔뜩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내 앞에 섰다.

정식 기사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누가 봐도 서 있는 자세가 어중간했다. 잘 봐줘야 견습 기사 같았고, 잘 못 봐주면 그냥 기사 흉내를 내는 어린애처럼 보였으니까.

“네가 아자젤이지?”

“예…….”

“이름은 아자젤이고. 성은 뭐니?”

“섀턴입니다.”

아자젤 카르만이 아니라, 아자젤 섀턴이라고.

하기야, 노먼이 손댄 수많은 사용인 중에 무사히 왕궁을 탈출한 사람이라면 굳이 왕가의 성씨를 아이에게 물려줬을 리가 없다.

나는 노먼을 빼다 박은 아자젤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거의 테리즈와 에델라이드 수준으로 닮은 외양이었다. 내 시선이 닿자, 아자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몸을 배배 꼬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열다섯 살 애다. 자기 친아버지가 누구인 줄도 모를 것이고, 제 이름이 실제로는 아자젤 카르만이라는 것도 모르겠지.

내 갑작스러운 호출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본인은 그냥 아카데미 선배인 마리아를 따라 국혼을 구경하러 왔을 뿐인데, 대현자와 이유도 모르는 채 독대하게 되리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아카데미 생활은 즐겁니?”

아자젤을 죽이면 마법을 다시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가능성의 영역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맞을 수도 있다.

“아, 네! 즐겁습니다. 마리아 님께서도 제게 잘 대해 주시고, 또 후원도 받고 있어서…….”

“후원?”

“네. 붉은 매 용병단 쪽에서…… 감사하게도 후원해 주고 계십니다.”

……이거 참.

역시, 일부러 내 앞에 아자젤을 가져다 놓은 거구나. 은신처 안에 신문을 놓고 간 것처럼, 카만의 마지막 직계 왕족인 아자젤 역시 내 눈앞에 대놓고 대령해 둔 거였다.

이르커스가 무슨 심정으로 아자젤을 찾아내고, 마리아를 비롯해 붉은 매 용병단과 연결 관계를 맺어 놓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자기 손으로 죽여도 됐을 텐데, 내게 선택권을 미뤘다는 게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르커스는 자기 손에 피 묻히는 걸 내가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만큼은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잘 지내렴.”

“네? 네, 감사합니다…….”

“난 마법사라 축복 같은 건 못 해 주지만, 네가 좋은 어른이 되길 바라고 있을게.”

아자젤을 죽이는 것으로 마법 계약 페널티를 확실히 무를 수 있었더라면 내가 이 어린애를 죽였을까? 가능성의 영역이 아니라, 확신의 영역이었다면.

확실하지 않아서 아자젤을 죽이지 않는 건지, 그도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책임을 전가할 수가 없는 건지, 나도 내가 혼란스러웠다.

다른 건 몰라도 난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필요하면 남을 협박하는 일쯤은 아무렇지 않게 하고, 마음에 안 들면 번개로 지져 왔다. 성선설보단 성악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란 말이다.

“그만 가 봐.”

하지만 나는 결국 테리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고, 한네만을 살리기 위해 12년을 봉인당했다.

마법 사용에 제약이 걸린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자젤을 죽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 동전의 양면처럼 착했다 말았다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더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마녀들은 마법 계약을 파기한 후에 드디어 자유라며 인사도 없이 멀리 떠나 버렸으니까. 한네만에게 물으니, ‘대현자가 삽질하는 꼴 더 보기 싫어서 그만 간다’가 마녀들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쥬리아는 내게 그 무엇도 남기지 않았고, 사밀라만이 ‘정말 괴로워질 때 열어 볼 것’이라고 적힌 편지 한 통만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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