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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85화 (85/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85화

    “……유안.”

    언제 이렇게 자라 버렸지.

    한 품에 끌어안기도 벅차게 자란 이르커스가 미워졌다. 너 내게 상처 주려고 일부러 이랬지, 라며 맹렬하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라단타의 검이 내 등에 푹 박혔다. 비틀어 뽑으려는 듯 상처가 벌어졌다. 이래서 검술에 일가견 없는 놈들이 싫다. 재능 없는 놈들은 무조건 아프게 찌르거든.

    나는 혹시나 이르커스가 이 검에 찔릴까 싶어 안았던 팔을 힘없이 풀었지만, 이르커스는 내게서 멀어지지 않았다.

    “계약을 파기해 줘.”

    “……그럴 수, 없어.”

    “아니. 당신은 그래야만 해.”

    “…….”

    “나한테 이렇게 굴 거면, 당신은…… 그래야만 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서로에게 모질게 구는 사랑 같은 건 정말 비이성적이다.

    천재는 못 돼도 수재인 내가 그런 사랑 같은 걸 할 리가 없다. 예카리나는 틀렸다. 나는 대현자니까 어리석은 사랑에 인생을 저당 잡히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당신을 사랑해.”

    “…….”

    “……그러니까, 당신은 못 죽어.”

    그 말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라단타의 일그러진 얼굴과 그가 미치광이처럼 외치는 말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제 와서 악역 같은 대사를 쳐 봤자 너무 늦었다. 라단타 뭐시기는 타이밍을 너무 못 잡는다. 저놈 운명도 참 기구하지. 어쩌다 이르커스랑 같은 시대에 이복형제로 태어나서 저 고생을 하냔 말이다.

    하긴, 지금 내가 라단타 뭐시기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니긴 했다.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와중에도 이르커스에게 온 신경이 가 있는 나일 테니까.

    예카리나, 나 너무 오래 살아서 정말 미쳤나 봐. 새파랗게 어린애가 날 사랑한다는데 질색은커녕 웃음이 나온다? 내가 미치광이가 됐다면, 그건 당신이 나한테 영생 저주를 걸었기 때문일 거야…….

    이르커스가 한 팔로 나를 구속하듯 끌어안았다. 피가 울컥 터져 나오고, 불로불사임에도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몸은 그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식을 잃었다.

    남 탓하는 건 나약한 놈들이나 하는 건데. 회피하고 싶은 놈들이나 스스로 책임지기 싫어서 남 탓을 하는 건데.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예카리나 탓을 하고 있다. 그 말의 뜻은 내가 지금 나약한 데다, 회피하고 싶어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는 거겠지.

    틀린 건 예카리나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손을 뻗어 이르커스의 뺨을 감싸 주고 싶었지만,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난 어차피 죽지도 않는데. 네가 죽여 주지 않으면, 나는 네가 죽어도 살게 될 텐데.

    의식을 잃어 입 안에 맴돌던 물음을 내뱉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유안은 널 사랑해.”

    “알아.”

    “하지만, 절대 인정 안 하지.”

    “그것도 알고.”

    “네가 원한다면 유안에게 저주를 걸어 줄게. 네가 살아 있는 한, 유안이 너만을 사랑하도록.”

    “사밀라.”

    “에이, 재미없게. 너희는 너무 고지식해.”

    이르커스는 검을 아래로 내렸다. 피가 너무 많이 튄 탓에 예복은 본래의 색을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 됐다.

    에리스는 트리스탄과 로버트의 경호를 받으며 대피했고, 라단타가 끌고 온 사병들은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예상보다 사상자가 적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르커스가 라단타의 검에 순순히 찔려 줄 예정이었지만, 중간에 난입한 유안 때문에 계획이 모두 무산된 탓이었다.

    “그냥, 빨리 죽여.”

    “…….”

    “살아서 더 비웃음 살 생각 없으니까.”

    다른 기사들에게 붙잡혀 포박된 채 이르커스 앞에 무릎을 꿇은 라단타가 형형한 푸른 눈으로 이르커스를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시선에는 질투와 시기를 비롯한 복합적인 감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이르커스가 다시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라단타는 별다른 잡음 없이 황제가 되었을 테다. 문제가 될 만한 형제자매는 다 죽여 버렸고, 전 황제도 황비도 모두 라단타의 편이었으니.

    그런데 라단타가 평생을 노력해서 일궈 놓은 자리를 이르커스는 단 몇 년 만에 일방적으로 갈취했다. 라단타에겐 아주 불공평한 일이었다. 마치 이르커스는 세계의 주연이고, 자신은 조연에 불과한 것처럼…….

    무슨 짓을 저질러도 지지해 주는 보호자가 있는 이르커스. 자신을 믿고 따르는 확실한 부하들이 있는 이르커스. 마녀의 핏줄이라는 사기적인 혈통을 타고난 이르커스.

    “난 오늘 네게 죽어 줄 생각이었는데.”

    그 시기의 대상이 라단타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자신이 목을 내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악역에게 악의 없이 더 큰 절망을 안겨 주는 것이다.

    “넌 기회가 와도 잡지를 못하는구나.”

    이르커스는 라단타를 죽이는 대신, 라단타의 앞에 검을 떨어트렸다.

    유안의 입에서 ‘계약을 파기해 줘’라는 말이 나오는 건 또 물 건너갔다. 판을 다 깔아 줘도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라단타 때문이었다.

    제대로 해내기만 했더라면 며칠 못 가더라도 그토록 원하던 황제의 자리에 한 번이나마 앉아 보고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널 죽이지 않아. 내 손에 피 묻히는 걸 유안이 안 좋아하니까.”

    이르커스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라단타가 어떻게, 누구에게 죽을지는 이제 이르커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한유안의 입에서 스스로 ‘계약을 파기해 달라’는 말이 나올 수 있지? 무슨 짓을 더 벌여야 구애에 대한 답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라단타가 멀어지는 이르커스를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르커스는 저를 꽉 끌어안던 유안의 두 팔을 떠올렸다.

    유안은 결국 아자젤을 죽이지 않았다.

    에이사에게 한네만을 통해 마법 계약의 페널티를 해제할 수 있는 근원적인 방법을 알려 준 건 이르커스였다.

    트리스탄이 이졸데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자젤에 대한 정보를 흘려 에델라이드가 유안에게 준 문서 사이에 아자젤의 서류를 끼워 넣은 것도, 마리아가 있는 아카데미에 일부러 마리아의 직속 후배가 될 수 있도록 아자젤을 입학시킨 것도…… 전부 이르커스가 계획한 일이었다.

    이르커스가 변한 것처럼 한유안도 변했다. 유안은 ‘마법을 다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을 위해 자기가 왕족인 줄도 모르는 열다섯 살짜리를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르커스에게는 인간성을 버리라고 했던 사람이, 본인은 결국 그 인간성에 발목이 잡히고 만 것이다.

    이르커스는 그게 우스웠다. 서로가 가장 바라지 않는 형태의 인간이 되었는데도, 애정은 여전하다는 점이야말로 지독한 저주 같아서.

    계획을 세워도 제일 중요한 인물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니, 이번에도 원하는 결말에 다가설 수가 없었다.

    “이르커스!”

    트리스탄이 멀리서 이르커스를 소리쳐 불렀다.

    “마녀들을 데리고 빨리 와 봐야 할 것 같은데. 대현자가 회복을 못 해.”

    “……회복이 안 된다고?”

    “그래. 헤누스교 신관부터 마법사들까지 다 달라붙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어.”

    “…….”

    “……아무래도, 마법 계약이 실행된 것 같다.”

    ????????????

    마법 계약은 간교한 함정이다. 한네만은 마법 계약에 대해 설명할 때면 종종 계약이 일종의 함정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공명정대하기로는 이를 데 없어, 신전에 소속된 신관들이 대개 법관으로 일하는 엘리오스가 만들어 낸 개념치곤 너무 간사하다는 불경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전제가 갖춰지면 계약은 강제성을 띤다. 계약자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법 계약은 충실하게 계약 내용을 이행하려고 한다. 그걸 억지로 막거나 어길 경우, 계약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죽을 수도 있어. 네가 아무리 강해도 계약 파기로 인한 즉사는 피할 수 없을걸.”

    “상관없어.”

    “안 죽더라도 유안과 같은 영생 저주에 걸릴 확률이 다분하지.”

    “그건 오히려 바라는 바고.”

    “유안은 원하지 않겠지만.”

    유안과 이르커스가 맺은 마법 계약은 이르커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순간, 전제가 성립되었다.

    다만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미뤄진 건 유안이 마도구에 봉인당한 덕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계약 이행은 12년이나 미뤄졌다.

    그리고 한유안은 봉인에서 풀려나자마자 이르커스에게서 멀리 도망쳤다. 또다시 계약은 미뤄졌다. 덕분에 이르커스는 유안을 죽여야 한다는 조건에서 계속해서 유예를 얻었다.

    하지만, 마법 계약은 기어코 실행되었다.

    유안이 이르커스를 대신해 검에 찔린 순간, 두 팔로 이르커스의 목을 끌어안고 그 사이를 검날이 파고드는 순간, 계약은 이행되었다.

    한유안은 예카리나의 저주대로 마녀의 핏줄이자, 황제가 된 이르커스 덕분에 죽음에 다가선 것이다.

    “유안과 나는, 원래도 서로 바라지 않는 일만 해.”

    “둘 다 자기 목숨은 안중에도 없지.”

    “그게 내가 유안한테 배운 거거든.”

    “넌 확실히 스승을 잘못 만났어.”

    계약 이행 완료가 목전이다. 황궁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달라붙어 이 마법 계약을 최대한 늦추고 있었으나, 슬슬 한계였다. 마법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던 시절의 대현자가 걸어 놓은 마법 계약 수식은 쓸데없이 정교했다.

    하지만 이르커스는 유안의 저 마법 계약을 억지로 파기할 수 있었다. 제자는 언젠가 스승의 그릇을 넘어서는 법이다. 이르커스는 적어도 마법적인 부분에서는 유안의 지난 세월을 어렵지 않게 따라잡았다.

    마법진이 역으로 그려진다. 마녀들이 달라붙어 같은 수식을 그리고, 맞잡은 유안과 이르커스의 손 사이로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보랏빛이 엉망으로 섞였다.

    한네만을 비롯해 평범한 수준의 마법사들이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갔다. 균열이 가기 시작한 마법진이 유리가 깨지듯 끄트머리처럼 파사삭 부서졌다.

    요동치던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보랏빛들이 유안의 손을 붙잡은 이르커스의 손등을 타고 살아 있는 것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르커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즉사하거나, 영생을 살게 되거나. 패를 뒤집기 전까지 도박의 결과를 명확히 알 방법은 없다.

    서로가 바라지 않는 일을 서로를 위해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확실히 미친 짓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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