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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84화 (84/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84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가 있다.

생일 파티를 열었으면 사이좋게 모두 초대했어야지, 바보 같은 국왕이 외교를 더럽게 못 해서 마녀를 홀대한 탓에 시작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결말은 해피 엔딩이지만, 아무튼 외교를 못 하면 나라가 어떻게 망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 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동화에서 왕은 요정들한테만 초대장을 보내고 마녀에게는 초대장을 보내지 않는다. 아주 괘씸한 처사다. 국가 행사에 근처 사는 마녀를 부르지 않다니. 저주당해도 싸다.

현대에서 일반인이 옆집 사는 사람을 자기 딸 생일에 초대 안 하는 건 당연하지만, 한 국가의 국왕이면서 공주 생일에 초대 리스트 잘못 작성한 건 문제가 있다.

당연히 마녀는 이 외교 참사를 관대하게 넘기지 않았다. 그 결과, 공주는 아버지의 형편없는 외교 실력으로 인해 물레에 손가락이 찔려 영원히 잠드는 저주에 걸리게 된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외교 참사를 저지르지 말자는 것 말고 하나 더 있다. 바로 ‘저주 걸 수 있는 마녀한테 함부로 개기지 말자’가 또 다른 교훈이다.

마녀의 저주 때문에 개고생하지 않은 사람은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른다.

마녀들의 축복이나 저주는 아주 강력하다. 마법 계약도 물론 강력하지만, 기본적으로 전제와 결과가 필요한 마법 계약과 다르게 저주는 조건 몇 개만 맞으면 쿨하게 실행된다.

이래서 작가도 <이르커스의 서>를 쓸 때 마녀에게 온갖 제약을 다 걸어 놓은 걸 테다. 세계관 최강은 그 시절 판타지 소설이 대개 그렇듯이 드래곤이지만, 강력한 노령 드래곤은 거의 멸종했으니 총력으로 따지자면 마녀들이야말로 세계관 최강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사람이랑 섞여 살면 요절한다는 설정과 대체로 열에 아홉은 금사빠라는 조건이 따라붙어서 밸런스 조정이 됐던 건데…….

쥬리아는 정말 나쁜 마녀다.

“유안, 울어?”

“아니…….”

“쥬리아가 저주 걸었다며? 미안해. 요즘 쥬리아 기분이 내내 안 좋았거든. 내가 몸이 안 좋아져서 그런가.”

푹신한 침대에 파묻히듯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아, 예카리나……. 네 후손 하나같이 다 별로야…….’라고 한탄하고 있는데, 사밀라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저주를 걸었어? 어차피 당신은 영생 저주가 걸려 있어서 웬만한 건 의미도 없잖아.”

“말하기 싫어.”

“아이참, 말해 봐. 내가 해주 할 수 있을지 누가 알아? 나도 마녀니까.”

안 그래도 늙을 만큼 늙었는데, 나는 더 늙은 기분으로 이불 끝만 잡아 내렸다.

사밀라가 쥬리아의 저주를 순순히 해주 해 줄 리가 없다. 사밀라는 망한 사랑이라면 그저 눈에 불을 켜고 좋아하는 이상한 마녀니까.

“……이르커스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절대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저주.”

“어라라, 그거 좋은 거잖아.”

“뭐가 좋아? 됐어. 속 긁을 거면 너도 나가.”

“너무 그렇게 토라져 있지 마. 이제 이틀 뒤면 어차피 이르커스는 공식적으로 유부남이라고.”

전혀 위로가 안 되는 말이었다. 이르커스는 유부남이 되든 말든 나 말고 다른 놈은 사랑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렸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역시 인류 멸망이 목적인 마녀 앞에서 너무 방심하면 안 됐는데.”

“쥬리아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야.”

“너한테나 그렇겠지. 쥬리아는 널 제외한 모두를 싫어해.”

“아니야, 쥬리아도 이르커스랑 유안은 좋아해. 나보다는 좀 못할지언정.”

그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며 사밀라가 까르르 웃었다.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사밀라한테는 이게 축복으로 느껴지겠지.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나를 내내 사랑하게 될 이르커스에게는 확실히 저주였다.

“내가 다른 저주를 걸어 줄까?”

“다른 저주?”

“그래. 이르커스에게 결혼 선물로 나도 저주를 걸어 줄게. 이르커스가 살아 있는 한, 당신이 지금처럼 이르커스를 사랑하도록.”

“싫어. 그런 건 너무 강압적이잖아.”

“어머머, 다른 사람들은 이런 영원의 맹세에 환장한다고. 게다가 결혼한 남자와 금단의 사랑? 이게 세간에서 얼마나 인기인데.”

그야, 다들 환장하겠지.

사랑의 유통 기한이 뇌과학적으로 반년밖에 안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영원히 좋아하길 바라는 건 그렇게 그릇된 욕망은 아니다. 사람들은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기를 꿈꾸니까.

하지만, 저주나 계약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절대 건강할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영생 저주 때문에 예카리나에게 묶여 죽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고, 마법 계약 때문에 이르커스랑 사달이 나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니까.

“쥬리아도 로맨틱하지 않니? 평생 누구 하나만을 사랑하게 되는 저주라니. 역시, 내 자매야.”

사밀라의 손이 이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 가슴 위에 닿았다. 내리누르는 손길은 부드러운데, 가슴이 짓눌리는 감각은 꽤 무거웠다.

“이틀 뒤에 이르커스의 결혼이 무사히 끝나게 되면 해주 해 줄게.”

“이래 놓고 또 안 해 주려고 그러지.”

“아냐. 날 믿어 봐.”

“…….”

“약속.”

내가 마법만 쓸 수 있었어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사밀라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손바닥 도장도 찍었다. 아무리 사밀라라도 설마 또 뒤통수를 치진 않겠지.

????????????

마녀를 믿는 일은 팥으로 메주를 만들겠다는 말을 굳게 믿는 것과 같다.

한국인이 사기당하는 가장 큰 이유가 ‘우리 사이에 걔가 나한테 그럴 리가 없는데’라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한국에서 고작 19년밖에 안 살았는데 왜 DNA 깊숙이 새겨진 한국인의 혈통이 나를 이토록 괴롭게 만든단 말인가.

이르커스한테는 이것저것 다해 주면서 왜 나한테는 이렇게 가혹해? 아무리 세상이 혈연 중심으로 돌아간다지만 먼 친척 하나 없는 이세계인은 서럽다. 나도 한국에선 친척 많았는데.

하지만, 내가 혼자 서러워하거나 말거나 이르커스와 에리스의 결혼식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됐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될 줄 다 알고 결혼식을 이렇게 간소하게 추린 걸지도 모른다.

어쩐지 에델라이드라도 초대하자는 내 말에 아무도 동의를 안 해 주더라니. 초대장 발송 리스트가 참으로 얇았던 덕에 죽거나 다친 사람도 많지 않았다.

라단타는 타이밍도 기막히게 결혼 주례가 끝나자마자 사병을 이끌고 식장 안으로 쳐들어왔다. 어디 숨어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적절한 때에 주례를 향해 마법을 퍼부을 순 없었을 거다.

주례의 목이 깔끔하게 날아갔을 때, 황제의 국혼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해 버렸다. 사람들의 비명이 배경 음악으로 깔리고, 신부와 신랑의 흰 예복에는 핏물이 튀었다.

반란에 동조하는 세력이 꽤 많았는지, 사병 규모가 예상보다 컸다. 폐위된 황녀지만 이복동생이라고 가족 자격으로 하객석에 앉아 있던 마리아조차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아는 친남매임에도 라단타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자젤!”

혼비백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리아가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있는 어린 소년의 팔을 잡아끌었다. 마리아의 아카데미 후배로 보이는 소년이 당황한 얼굴로 마리아의 품에 끌어안겨 식장을 빠져나갔다.

마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아자젤’이라는 이름이 무척 친숙했다.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이 내가 언젠가 사슴뿔 장식으로 응징했던 노먼 왕자와 무척 닮기도 했다.

저 애가 카만의 마지막 남은 직계 혈통이구나. 자연스레 에이사가 해 줬던 말이 생각났다. 아자젤인지, 에제젤인지…… 쟤를 죽이면 나, 다시 마법 쓸 수 있댔나?

사람들이 혼비백산한 틈을 타 어린 소년 하나 죽이는 건 마법을 못 쓴다고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아주 잠깐 갈등했다.

한창 인간성이 바닥나 있던 시점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면 별로 고민도 안 했을 것이다. 애초에 테리즈의 부탁을 따라 에델라이드를 도와줄 생각조차 못 했을 테니, 마법을 못 쓰게 되는 일도 없었겠지.

그러나, 지금의 나는 열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을 마법 좀 다시 쓰겠다고 죽일 수가 없었다. 마침 딱 사고로 위장하기 좋은 상황에서, 상대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마주쳤다고 하더라도.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지?

어쩌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데, 오래 살면서 닳고 닳았다가 다시 원래 성격으로 돌아간 건지도 모른다. 역시 사회 탐구 영역 선택 수강 과목으로 윤리와 사상을 고르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냥 선선히 라단타 쪽으로 등을 돌렸다. 날 보호하려는 목적인지 마녀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예복을 입은 이르커스는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라단타가 검을 휘두르는 걸 무감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트리스탄과 로버트가 호위로 붙어 있었으나, 둘은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이르커스가 아니라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에리스만을 보호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간 소식 없던 조상신이 갑자기 내 머릿속 레드 라이트 위에서 탭댄스를 추는 것만 같았다.

“사밀라.”

“응?”

“너 이 결혼이 제대로 끝나지 않을 거, 알고 있었구나.”

사밀라가 웃었다. 꽃 같은 미소였다. 신부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늙어 버린 얼굴로 까르르 웃는 마녀는 아주 조금 사악해 보였다.

“난 네가 참 좋아, 유안.”

“난 이제 너 싫은데.”

그제야 에리스 멜킨의 질문이 이해가 갔다.

에리스는 알고 있었던 거다. 이 결혼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으리라는 걸. 그리고 이르커스가 라단타의 검에 순순히 찔려 줄 거라는 것도.

“……안 돼.”

나는 나를 붙드는 마녀들의 손을 뿌리쳤다. 안 된다. 이르커스는 안 돼. 저 애는 나와 달리, 정말 죽는단 말이야.

심장이 찔리고 목이 잘리면 아무리 대단한 마검사라도 죽는다. 세계의 주인공이어도 죽어 버린다.

그건 용납할 수 없다. 인간은 언젠가 죽지만, 이르커스가 내 앞에서 저런 식으로 자살하는 것만큼은 못 두고 본다.

마법도 못 쓰면서 무슨 악력으로 마녀들의 손길을 뿌리쳤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단타는 악역답지 않게 별 거지 같은 대사도 한번 없이 이르커스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악당이면 악당답게 ‘죽어!’라든가 ‘내 자리를 돌려받으러 왔다!’라고 외쳤어야지.

팔이 먼저 나갔다. 이르커스가 검날을 움켜쥐는 것보다 내가 이르커스를 끌어안는 게 더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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