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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83화 (83/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83화

    “날 찾아온 이유가 뭐니?”

    국혼을 앞두고 연락도 없이 불쑥 나를 찾아온 건 에리스 멜킨이었다.

    에리스는 길게 쏟아지는 곱슬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차를 마시는 것부터 고개를 숙이는 각도까지 어디 하나 아름답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명화에서 막 튀어나온 귀부인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꼭 어떻게 해야 자신이 가장 우아해 보일지를 아는 사람 같았다.

    이르커스와 여덟 살 차이니, 이제 서른일곱 살일 텐데 겉보기에는 그저 20대 중반처럼 보였다.

    아마 마흔이 되고 쉰이 되더라도 에리스는 살아 있는 한 내내 아름다울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젊음이 아니라, 욕망에서 기인한 것일 테니까.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이 손에 꼽은 듯하여.”

    저 말은 사실이다. 지금은 로베인에서 추방당한 에킨도르 멜킨과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제법 많았지만, 당시 소백작 신분으로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황궁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았던 에리스와 대면할 기회는 드물었으니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날씨며 마법이며, 별것 아닌 잡담이 한바탕 이어지고 나서야 에리스가 본론을 꺼냈다.

    에리스는 에킨도르보다 사람을 대하는 수완이 좋았다. 그러니 에킨도르가 아니라 에리스 쪽이 작위를 계승한 거겠지만. 이중 첩자 노릇을 하겠다며 뻔뻔하게 굴던 에킨도르보다 확실히 태도에 무게가 있다.

    “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이라면 물어도 좋아.”

    객관적으로 보자면 에리스는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감정보다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그렇게 정의롭지도 않다. 사명보다는 욕망이 먼저일 테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목적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뤄 내고야 말, 야심가.

    “황제를 사랑하십니까?”

    “……나는 분명 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이라면, 이라는 전제를 붙였던 것 같은데.”

    “침묵하는 것도 일종의 답이 되지요.”

    “아니. 난 곧 결혼하는 신부 앞에서 신랑에게 마음이 있노라고 말하는 무뢰한은 아니란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보다 차라리 아니라고 거짓말하는 편이 낫다. 사랑 없는 결혼일지언정 며칠 뒤면 부부가 될 사람을 앞에 두고 ‘네 신랑 어쨌든 나 좋아함’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에리스는 이런 내 반응에 웃음만 흘렸다. 심지어 제자와는 다르게 친절하다는 말까지 해 줬다. 내가 에리스를 좋게 보는 것처럼, 에리스도 날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하나는 이르커스와 결혼할 사람이고, 하나는 그 이르커스가 공개적으로 구애한다고 밝힌 사람인데, 서로 악감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게 웃기긴 했다. 견제 정도는 당할 줄 알았는데.

    “내가…… 너희 결혼에 방해되는 일은 없을 거다. 그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으니까.”

    나는 에리스가 날 먼저 찾아온 이유를 속으로 고르고 고르다가 가장 적합할 것 같은 답을 찾아냈다.

    이르커스는 국혼을 선언하기 전까지 스물아홉이나 먹고도 미혼이었다. 평민이면 몰라도 황제가 그 나이까지 미혼인 건 치명적이다. 조선 시대만 봐도 왕은 중전에 후궁까지 알차게 들여, 후사를 남기는 걸 중요히 여기지 않았던가.

    피로 이어진 세습을 혈통이라며 중요히 여기는 제국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이상, 이르커스의 ‘대현자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발언은 제 살 깎아 먹기였다.

    나와 이르커스는 일단 결혼할 수 없다.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르커스가 진짜 나랑 결혼하려고 들면 귀족들이 게거품을 물고 반란을 일으킬 테니까.

    남색가인 걸 넘어서, 어쨌든 애가 안 생긴다는 게 제일 큰 문제다. 마탑이 남아 있으면 기를 쓰고 남자끼리 출산할 수 있는 마도구라도 만들어 낼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마탑은 이르커스 손에 박살 났다.

    그러니 에리스와 이르커스의 결혼 발표는 제국 입장에서는 대단한 경사였다. 에리스 역시 나이가 꽤 있어, 후사를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적어도 후계를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존재하니까.

    그 경사에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건 나 하나 정도일 거다.

    견제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지만, 에리스 멜킨도 내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지. 어쨌든 곧 남편 될 사람의 스승이자 남쪽 숲의 대현자인 것도 모자라, 광범위하게 따지자면 연적 같은 위치니까.

    신경을 정말 안 써도 문제긴 했다. 결혼할 거면 남편 좀 챙기라고. 내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이르커스를 사랑하는 시늉이라도 해 보라고.

    “전 자리 말고 사람에겐 관심 없어요.”

    하지만, 에리스 입에서 나온 말은 ‘대현자님은 앞으로의 부부 관계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같은 아침 드라마 대사가 아니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에리스를 바라보았다. 에리스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은 황궁에서도 퍽 당당하게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이르커스와 정치적으로 협의했다고 하더니, 감정이 없어도 너무 없어 보였다.

    “제가 원하는 건 제가 줄을 잘 탔다는 확신뿐입니다.”

    “…….”

    “대현자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를 지켜 주실 테죠?”

    가느다랗게 떠진 에리스의 금색 눈이 나를 떠보듯 질문했다.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내가 역으로 묻고 싶었다. 에리스와 내가 조금이라도 친밀한 사이였다면, 적어도 에리스가 에킨도르만큼 만만한 상대였다면, 나는 역으로 질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질문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따지기엔 에리스가 틈 하나 주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 뒤로 잔뜩 구겨 숨겨 둔 야망을 조금씩 드러낸 채, 에리스는 내게 답을 독촉했다.

    “대현자님께서는 폐하의 유일한…… 보호자시니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지금은 이르커스가 나를 지켜 줘야 할 판국이지만, 여전히 내게 이르커스는 어린 제자였다.

    한참 어린 제자 하나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당장 내가 마법을 쓰지 못하는 처지여도, 무슨 수를 쓰는 한이 있든 간에 이르커스를 지켜 줄 것이다.

    에리스의 말대로, 나는 이르커스 보호자니까.

    ????????????

    국혼 준비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그래도 기왕에 황제가 결혼하는 건데, 좀 화려하게 해도 모자랄 판에 모든 게 다 간소했다.

    내가 여기저기 참견하려고 해 봐도 사용인들이 나를 역병처럼 피해 다녀서 간섭조차 하기 어려웠다.

    누가 인생에 대체로 한 번뿐인 결혼식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하느냐고 화를 내자, 마녀들은 깔깔 웃었다.

    “화려하게 해 봤자 좋을 일 없으니, 간소하게 하는 거 아니겠어?”

    쥬리아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혼식 피로연을 안 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게다가 이 빈약한 초대 명단은 또 뭐란 말인가. 타국 인사를 한 명도 안 불렀다. 정식으로 초대 받은 외국인이라곤 카만 출신의 트리스탄 일행이 전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쪽도 ‘초대’라기보다는 ‘행사 동원’ 쪽이었지만.

    “내 말은, 이렇게 간소해도 되냐는 거야. 결혼도 일종의 장사라고. 외교 장치니까 성대하게 열고, 사람도 잔뜩 초대하고…….”

    “하지만, 로베인은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인걸. 라단타가 선전 포고도 했잖아.”

    라단타 그놈이야 이르커스가 검 하나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데 뭐가 중요하겠는가.

    나는 심란하게 이르커스의 결혼 예산안을 뒤적였다. 이르커스가 결혼해서 심란한 건지, 아니면 이 결혼의 모든 준비 과정이 내 마음에 안 차서 심란한 건지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쥬리아가 그럴 거면 네가 결혼하라고 싸늘한 충고를 비수처럼 날리는 동안, 나는 그냥 보던 예산안을 테이블 위로 집어 던졌다. 계속 본다고 바뀌는 것도 없고,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혼주석에 앉게 됐다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건 좋아.”

    “그런데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죽지도 못하는 몸이면서.”

    불멸자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다. ……죽을상. 죽을 수 있어야 죽을상도 죽을상이지.

    국혼 날짜가 다가올수록 나의 시름은 깊어져만 갔다. 이르커스가 정말 ‘직접’ 청첩장을 주고 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른 내빈용 것과 달리, 고급스러운 자필 메모를 곁들여서.

    [당신의 축복을 바랍니다.]

    마법사는 마녀와 달리, 저주나 축복 같은 건 못한다. 빈말로야 할 수 있겠지만, 마녀들이 하는 것처럼 효력을 발휘할 수는 없단 소리다.

    나는 내게 청첩장을 주며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던 이르커스를 떠올렸다. 이르커스는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내가 그냥 결혼하라고 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트리스탄에게도 이르커스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 같냐고 캐물었다가 질린다는 소리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나도 내가 구질구질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르커스가 이렇게 잠잠하니 오히려 불안했다. ‘정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닌가?’라는 게 일차적 불안이고, ‘드디어 내게 질렸나?’가 이차적 불안이었다.

    ‘번복할 생각은 있어? 결혼 축하한다는 말.’

    ‘…….’

    ‘없겠지. 별로 기대도 안 했어.’

    이르커스가 내게 남긴 말은 그게 전부였다.

    혹시나 마법 계약이 강제로 발동될까 봐, 더 다가오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로 이르커스는 나를 향해 웃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보라색 눈동자 위에 어렴풋하게 이채가 돌았다.

    결혼해서…… 좋은가 보지?

    치졸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끝도 없이 솟구쳤다. 인정한다. 나는 치졸 킹, 치졸의 대마왕, 치졸의 드래곤 로드, 치졸의 대현자다.

    “쥬리아, 이르커스에게 축복해 줄 거야?”

    “무슨 축복?”

    “결혼하는 거니까…… 마녀가 둘이나 있는 김에 축복해 주면 좋잖아.”

    “걔가 뭐 예쁘다고.”

    “사밀라도 안 한대?”

    “글쎄. 어쨌든, 난 안 해. 사밀라만 아니었으면 진작 여길 떠났을 거야. 황궁은 사람이 너무 많다고.”

    쥬리아는 툴툴거리며 읽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사밀라와 쥬리아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다. 몇 년 뒤에는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그러니 이 시점에 마녀들이 이르커스를 축복해 준다면 효력이 상당할 것이다. 수명이 얼마 안 남은 마녀들은 논리에 안 맞게 강력하니까.

    나는 그래도 결혼 선물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은근하게 쥬리아를 꼬드겼다.

    이르커스의 결혼이 마음에 안 들어 치졸한 생각이 드는 것과 별개로, 이왕 결혼한다면 내 제자가 안정적이고 대외적으로 ‘정상적’으로 보이는 환경에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

    “너희 정말 지긋지긋하다.”

    “야, 말은 똑바로 해. 내가 왜 지긋지긋해.”

    “됐어. 축복 말고, 저주할 거야.”

    사람을 싫어하는 쥬리아는 내 설득에 넘어오기는커녕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내 결혼 선물은 유안, 너를 향한 저주가 좋겠어.”

    “뭐? 싫어.”

    “싫은 게 어디 있어? 가만히 당하도록 해.”

    몸을 뒤틀어 봤지만, 쥬리아의 악력은 무시 못 할 정도로 강했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정말 저주를 걸려는 건지 마나의 흐름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지긋지긋하게 삽질하는 너희 때문에 사밀라의 수명이 반 토막 났잖아. 너희만 아니었으면 사밀라랑 단둘이, 인류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적한 노후를 보냈을 텐데…….”

    “……잠깐만. 진짜 저주할 거야?”

    “그래. 난 널 저주할 거야.”

    쥬리아의 입에서 저주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이 평생토록 네가 아닌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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