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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82화 (82/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82화

“한네만!”

삼삼오오 모여 나를 구경하러 나온 황궁 사용인들 사이에 내가 응징해 줘야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던 황궁 마법사가 끼어 있었다.

이르커스의 집무실을 향해 가던 길에 엉거주춤하게 복도에 서 있던 한네만을 발견한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 한네만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헉.”

“너 이 새끼. 이리 와, 나 좀 보자.”

“대현자님. 그게 아니고요…….”

이전처럼 로브 후드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날 발견한 한네만은 기겁한 채로 내게 등을 돌려 도망쳤다. 재빠른 탈주였다.

마법만 쓸 수 있었어도 한네만의 도망을 바로 막아설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유감스럽게도 한네만을 쫓아 같이 발로 뛰어야 하는 처지였다. 나는 별수 없었다고 소리치는 한네만을 쫓아 최선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한네만은 목숨이 걸려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정말 잘 뛰었다. 아니, 연구만 하는 마법사가 왜 저렇게 빠르냐고.

체면 안 서게 가빠지는 숨을 헉헉거리며 한네만을 쫓아 코너를 꺾었다. 황궁은 쓸데없이 넓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세계면서 계단을 너무 좋아했다.

내가 지쳐 자기보다 조금 뒤처지자, 한네만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문 하나를 벌컥 열고 들어가 숨었다.

정신없이 쫓아온 탓에 내 머리 상태도, 로브도 엉망이었다. 문도 제대로 안 잠근 한네만을 족치기 위해 그대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황궁 구조지만, 한네만을 뒤쫓아 같은 곳을 빙빙 돌다 보니 순간적으로 이 문 너머에 뭐가 있을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르커스를 만나러 온 거긴 하지만, 이렇게 흐트러진 꼴로 집무실에 쳐들어오려던 게 아니었는데.

나는 급하게 로브를 끌어당겨 다시 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미 이르커스와 눈이 마주쳤으니, 내 얼빠진 표정은 다 봤겠지만.

“저, 그럼 저는 일단 두 분의 재회를 위해 빠져 드리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너, 거기 가만히 있어.”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제가 숨 막히는 공기를 못 견디는 경향이 있어서……. 저 완전 새가슴이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한네만은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후다닥 마법을 써 도망쳐 버렸다. 배은망덕도 이 정도면 놀라운 수준이다.

나는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혈압만 올려 준 채 한네만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역시, 내전보단 결혼에 더 반응하네.”

“…….”

“나랑 단둘이 오래 있는 건 안 좋아. 아직 우리 계약은 그대로니까.”

한네만이 자리를 뜨자, 이르커스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 커튼을 거두고 창문을 여는 몸짓에 여유가 있었다.

신문 기사를 보고 덜컥 놀라 달려온 나와는 다른 모양새였다. 휘둘리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르커스는 확실히 열일곱 살 때보다 묘하게 안정적이었다. 더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밖에서 지내는 동안, 생각 정리는 좀 했어? 에델라이드가 일을 너무 많이 줘서 못 했으려나.”

“……결혼한다면서.”

“그래. 당신이 결혼하라고 노래를 불렀잖아. 마침 멜킨 후작과 뜻이 맞았을 뿐이야.”

“일부러 나 보라고 신문 넣어 두고 간 건 뭐야. 도발?”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서.”

“…….”

“내 예상보다도 일찍 돌아와 줬어. 이래 놓고도 날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할 테지만.”

창문 밖을 잠시 바라보던 이르커스가 이내 웃는 얼굴로 내게 몸을 돌렸다.

바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노을빛이 일렁거렸다. 얼굴 절반이 주홍빛 그림자에 잠겼는데도 이르커스의 표정은 흐리기는커녕 유독 선명하기만 했다.

이제는 어리지 않은데도,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기쁨과 일부러 숨기지 않는 소년 같은 면면.

“이렇게 여지를 주면서, 포기하라고 하는 당신 쪽이 잘못한 거야.”

“그건…….”

“그냥 결혼하지 말라고 해 봐, 유안. 이것저것 재고 따지지 말고.”

계약 실행의 위험성 때문에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로, 이르커스는 열린 창을 등지고 내게 속삭였다.

“그냥 당신이 계속 곁에 있어 줄 거니까, 결혼 같은 거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 봐.”

그냥 지금 눈을 딱 감고 ‘그래, 너 결혼할까 봐 여기까지 달려왔다’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이르커스가 원하는 대로 그에 대한 내 마음을 인정해 버리면 이 답답함이 절반 정도는 해결될 수 있었다. 내가 기어코 로베인으로 돌아온 이유도 사실 이게 맞았으니까.

“널 거두지 말았어야 했나 봐.”

하지만, 한참 뒤에 내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이런 시시한 소리였다.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이르커스야 한참 어리고, 자기가 제자 입장이니까 느끼는 대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아도 문제가 없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400년 넘게 살아 놓고 이제 고작 스물아홉 살인 애한테 나도 너 좋아한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책임이.

우스웠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라고 거짓말을 뱉지도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인정조차 할 수 없다니.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르커스는 여전히 창가에 기대어 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려는 것처럼.

“12년 동안 생각해 봤어.”

“…….”

“내가 왜 그렇게 당신한테 집착하는지.”

열린 창문 너머로 선선한 저녁 공기가 들어왔다. 책상 위에 놓인 양피지들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이르커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단히 잘해 준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보자면 자신에게 악영향만 끼친 스승에게 왜 이토록 강직한 애정을 품게 된 건지 나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뭐가 좋다고.

같이 늙어 갈 수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는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 줄 수도 없다. 그나마 있던 대현자로서의 마법 능력까지 잃었으니, 계산적으로 따져 보면 나를 향한 이르커스의 애정은 이익보다 손해가 더 컸다.

“나한테는 당신이 전부인데, 당신한테는 죽음이 전부라서.”

“…….”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이 갈망하는 죽음보다 내가 앞서고 싶었나 봐.”

내가 없는 12년 동안 이르커스가 어떤 마음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어떻게 지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너는 나 없이도 잘살고 있겠지, 옆에 좋은 사람들이 그토록 많으니까 나 하나 없어져도 주인공답게 내 자리를 잘 메꿨으리라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이르.”

“응.”

“……결혼, 축하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황궁에 오기 전까지 무수히 떠올렸던 내 솔직한 감정은 이르커스를 눈앞에 두자마자 한순간에 휘발됐다.

창백하게 질린 채로 죽어 가던 수많은 마녀를 기억한다. 사랑에 미쳐, 끝내 비참한 끝을 맞이하던 마녀들.

그리고 그 마녀들과 같은 피가 흐르는 나의 제자, 이르커스.

“청첩장은, 꼭…… 네가 직접 주렴.”

지금 이르커스의 표정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가혹한 스승이었고, 아이를 망치는 것도 모자라 수없이 실망시켰다.

거짓말로라도 나도 널 사랑한다고 대답했다면, 우리 사이가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었을까.

황궁에 오기까지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이르커스의 멱살을 틀어쥐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소리를 당당하게 늘어놓을 수 있었을까.

더듬더듬 벽을 짚어 가며 도망치듯 이르커스의 집무실을 나서는 동안에도 이르커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

“내가 봤을 때 이르커스가 미친 이유의 8할은 대현자, 당신 때문이오.”

“너 왜 내 제자한테 미쳤다고 그래?”

“거, 당신 제자기만 한가? 내 제자이기도 한데.”

트리스탄은 기사 단장이라는 직함에 맞지 않게 마른 빵을 게걸스럽게 입에 욱여넣었다.

나는 그 꼴을 보며 혀만 찼다. 이졸데는 이놈의 어디가 예쁘다고 그렇게 ‘여봉~ 나두 저 하늘의 뜬 달의 개수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용~’ 같은 소리로 가득한 편지를 쓰는 걸까.

분명 카만에 머물 때 트리스탄의 매력이 뭔지 이졸데가 구구절절 설명해 줬던 것 같은데, 머리가 표백되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긴, 내가 지금 남의 매력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마를 짚은 채 테이블 위로 풀썩 쓰러지자, 트리스탄이 혀를 찼다.

“이럴 거면 왜 결혼 축하한다는 헛소리를 한 거요?”

“…….”

“설마, 우는 거 아니지?”

“안 울어.”

구질구질한 것도 이 정도면 병이었다. 카만에서 검에 찔렸을 때도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말로 사람을 찌른 건 난데, 내가 더 아프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은 아무리 공부해 보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잔뜩 있었다.

“상처 받았겠지?”

이르커스는 내게 내내 답을 구했다.

모르는 문제를 마주한 학생처럼 내게 내 감정에 대해 물었다. 답변을 거절하는 내게 질릴 법도 한데, 참 인내심도 좋았다.

나였으면 진작 나를 포기했을 텐데. 솔직하긴커녕 거짓말만 실컷 늘어놓고, 자기 감정을 눈치챘으면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상대 따위, 잘 먹고 잘살라고 내팽개쳐 버렸을 텐데.

이르커스가 날 놓지 않은 덕에 이 관계에서 제일 나쁜 놈은 내가 되었다. 변명할 여지도 없다. 뭐가 그렇게 겁난다고 이렇게 밀어내기만 하는지. 지켜야 할 체면이나 자존심이라곤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데, 왜 자꾸만 내가 이르커스를 망치는 것 같은지.

“사랑이라는 건 너무 끔찍해.”

“……시작도 안 해 봤으면서 뭘 안다고.”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잖니. 검에 찔려 본 적 없어도, 찔리면 아프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뺨을 기댄 테이블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그렇게 추운 날씨도 아닌데 손끝이 차게 질렸다.

너도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예카리나의 말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예카리나처럼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이르커스가 두려웠다.

나는 고개만 돌려, 테이블 위로 이마를 툭 박았다.

“……됐다. 이렇게 된 이상, 혼주석에 앉아서 의연하게 내 제자의 결혼을 축하해 줘야지.”

“잘도 그러겠소. 이렇게 풀 죽어 있으면서.”

“잘할 수 있거든? 애초에 에리스 멜킨이면 나쁘지 않은 상대잖니. 내가 이 나이 먹고 스물아홉밖에 안 된 제자의 혼사를 막는다면…….”

“이르커스가 좋아하겠지.”

“이르커스가 좋아하…… 아, 트리스탄. 끼어들지 마.”

트리스탄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평소였다면 더 이죽거렸을 텐데, 내가 눈에 띄게 기운 없어 하는 탓에 놀리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눈치라곤 스튜에 말아 먹을 것도 없는 트리스탄이 이렇게 조심스러운 걸 보면, 내가 심리적으로 상당히 힘든 상태인 건 맞나 보다. 수능 전날에도 이렇게 심란하진 않았는데.

나는 마저 한숨을 내쉬었다. 자주 한숨을 쉬면 복이 나간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제는 더 나갈 복도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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