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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81화 (81/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81화

“유안은 네 뜻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사밀라가 손톱이 긴 손으로 이르커스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이르커스는 그 손을 쳐 내거나 몸을 비트는 대신, 고개만 살짝 뒤로 젖혀 사밀라와 눈을 마주했다.

“유안이 보기에 라단타 정도는 위협이 되지 않나 봐.”

“그렇겠지. 유안이 기억하는 라단타는 검술도 별로고, 마법도 별로인 어린 능구렁이에 불과할 테니까.”

에이사가 유안에게 마나를 불어 넣는 척 몰래 걸어 두었던 추적 마법은 해제된 지 오래였다. 잘도 다른 마법사를 구해 몰래 해제한 걸 보니, 눈치 빠른 에델라이드가 유안을 도와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카만이랑 전쟁이나 벌일까? 라단타가 더 위험한 인물로 부상할 수 있도록.”

“너도 참 극단적이다.”

“어쩌면 라단타가 아니라, 에델라이드가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르지. 유안은 에델라이드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니까, 좀 더 빨리 돌아와 줄 테고.”

“트리스탄과 한네만이 카만 출신이라는 걸 잊었니? 절대 안 될걸.”

운 좋게도 이졸데가 유안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흘려 주었기에, 이르커스는 유안이 나이트 펠로우가 소유한 은신처 중 한 곳으로 숨어들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은신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곧장 사람을 풀었으니, 굳이 에델라이드를 닦달하지 않아도 얼마 안 가 유안을 찾아낼 수는 있을 테다.

하지만 유안이 ‘제 발로’ 로베인 제국에 걸어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더 강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라단타 손에 죽어 주는 쇼를 유안 앞에서, 유안이 두 눈으로 보는 상황에서 해내야만 했으니까.

그래야만 한유안은 자신에게 선택지가 있고,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일 것이다. 이르커스는 느리게 한숨을 내뱉었다.

왜 사밀라 같은 마녀들이 툭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구속하려 드는지 알 것 같았다. 몸을 얻는 게 마음을 얻는 것보다 몇 배는 쉬웠다. 몸은 형체가 있고, 마음에는 형체가 없으니 안전하게 붙들어 둘 수가 없었다.

이르커스는 머릿속을 맴도는 온갖 강압적인 방법들을 애써 밀어냈다.

몸만 얻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몸이 목적이었더라면 진작에 다른 마법 계약을 걸어 취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지금의 한유안은 이르커스에 비해 약한 상대였고, 이르커스는 마법을 못 쓰는 대현자쯤이야 계약 없이도 얼마든지 힘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르커스가 정말로 얻고 싶은 건 유안의 마음이었으므로.

“에리스 멜킨과 결혼할까.”

“그 여자는 좋아하겠네.”

“그렇겠지. 황제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라단타 정도로 안 된다면, 조금 더 효력 있는 패를 내밀어야 하고.”

“좋아하는 사람 불러들인다고 결혼을 결심하는 것도 참 우습다.”

“기어코 축하한다는 소리 하려고 와 줄 사람이 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기왕이면 안타깝게 여겨 줘.”

이르커스의 말에 사밀라가 작게 웃었다. 안타깝게 여겨서 여전히 네 곁에 있는 거라는 말이 작게 따라붙었다.

세월을 피하지 못해 부쩍 늙어 버린 마녀를 보며 이르커스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묘한 걱정과 기대, 그리고 어렴풋한 질투가 섞인 얼굴로 왜 아직 결혼하지 않았느냐며 핀잔을 주던 유안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해도 우린 운명적 사랑 같은 게 아니라, 악연인 것 같아.”

제 어깨 위에 자리 잡고 있던 사밀라의 손을 천천히 잡아 내리며, 이르커스는 선선한 낯으로 미소 지었다.

결혼한다는 발표를 들으면 유안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던진 미끼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어 줄까?

생각은 구체화 되지 않고 머릿속에서 연기처럼 흩어졌다.

????????????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시계탑 아래에 은신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문이 나타나고, 열쇠까지 필요한 비밀 공간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한다는 거다.

게다가 이런 은신처들은 마법으로 이동하기도 까다롭다. 좌표 설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지하는 지상에 비해 좌표 찍는 게 몇 배 더 어렵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림 그리다가 갑자기 3D 랜더링을 하게 되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굳이! 누가! 꽁꽁 숨겨진! 정보 길드의 은신처를 찾아서! 몰래! 그 안에 신문을 넣어 놓은 건 정말 대놓고 고의라는 뜻이었다. 내가 아무리 비밀스럽게 이동하더라도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표현일 수도 있고.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신문을 주워 들고 헛웃음을 흘렸다.

좌표 계산이 어렵고, 마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여길 방문해서 신문을 두고 간 인간은 마법사나 마녀는 아니었을 테다.

그렇다면 숙련된 기사거나 암살자라는 소리인데, 내가 불멸자가 아니었다면 좀 놀랐을 것이다. 역시 그냥 길버트가 방문 알림 해 주는 남쪽 숲으로 돌아갈까……. 인터폰 없는 삶은 너무 위험한 것 같다.

[로베인 황제, 드디어 ‘국혼’ 발표!]

[후사 걱정 사라지나…… 술렁거리는 국내를 진정시킬 깜짝 발표에 요동치는 수도]

[‘남색가’ 오명 벗겨지나…… 상대는 전 약혼자였던 멜킨 후작으로 드러나]

굵은 글씨로 인쇄된 신문 헤드라인을 보자, 새어 나오는 헛웃음이 더 커졌다.

에리스 멜킨의 웃고 있는 초상이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마치 ‘대현자님께서 저를 먼저 이르커스의 약혼자로 삼으셨잖아요?’ 하고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죄다 기분 탓이겠지만, 내가 아니면 결혼할 생각 없다던 이르커스가 이 시국에 국혼을 발표했다는 게 우스운 한편으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르커스는 로베인 제국의 황제였고, 로베인은 12년간 내내 이어진 내전과 마탑전 때문에 혼란했다. 에리스 멜킨은 본인이 후작이니 외척 세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고, 이르커스가 황자 시절 약혼 관계를 맺은 인물이므로 귀족 중에서는 그보다 흠잡을 데 없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후사도 없고, 직위를 유지하고 있는 형제자매도 없다. 이르커스 다음으로는 황제에 자리에 앉을 만한 적법한 ‘혈통’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르커스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라 후계를 볼 수 없는 데다 불멸자인 나와의 결혼을 고집하는 건 정치적으로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라단타가 쳐들어오기 전에 정치적 입지를 다져 놓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게 옳은 일이다. 에리스 멜킨은 이르커스보다 나이가 많으니, 기왕이면 후사도 빨리 보는 게 좋았다.

법도와 혈통, 전통이나 세습 같은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은 그런 것에 집착했다. 하루아침에 세계를 이루는 관습과 문화를 바꿀 수 없으니, 자리를 지키려면 세계의 흐름에 따라야 했다.

“문제는 이걸 굳이 나 보라고 가져다 놨다는 거지.”

가슴이 불온하게 뛰었다. 이르커스 보고 그렇게 결혼하라고 노래를 불러 놓고, 막상 진짜 이르커스의 결혼 발표에는 불쾌한 기분이 들다니.

그냥 날 죽이고 하지. 나와의 계약을 위험하게 파기할 필요 없이, 날 죽이고 에리스 멜킨과 결혼하면 그 누구도 기분 상할 일 없었을 텐데.

아니면 굳이 알리지 않고 결혼했어도 될 일이었다. 나는 한동안 테리즈가 내게 남긴 은신처를 헤매며 살 예정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일부러 접촉하지 않는 이상 이르커스와 에리스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지 못했을 테니까.

반만 펼쳤던 신문을 다시 곱게 접었다. 라단타 정도로는 내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에리스 멜킨과 결혼을 감행하면서까지 내게 장작을 밀어 넣고 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르커스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내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수 있고, 제 발로 돌아오지 않으면 돌아올 수밖에 없을 만큼 충격적인 일들을 행할 테니 순순히 돌아와라.

잘 키운 줄 알았던 제자는, 지금 혼란스러워하는 스승인 내게 유예를 주는 척하면서 그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척하는 데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곤란했다. 명백하게 날 도발하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이 나쁘다니.

“나도 진짜 미쳤지…….”

이르커스를 사랑하는 거라고 내게 답해 주던 수많은 인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인간들 말이 옳다는 걸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데, 생각해 보면 난 죽지 못하는 존재였다.

“내가…… 이런 거에 흔들려서 돌아갈 줄 알아?”

????????????

이런 거에 흔들려서 돌아갈 줄 알았다면 정답이다. 이 씨발…… 그럼 나 혼주석에라도 앉혀 줘.

사고 회로가 비이성적으로 돌아갔다. 우리 애 약혼식에도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비췄는데, 결혼식도 구경 한번 못하는 건 억울했다. 내가 봉인된 상태면 몰라, 지금은 두 발로 잘 걸어 다니는데.

국경을 넘으면서 내 이런 생각이 변명이라는 걸 아주 조금 인정했다. 그래, 맞다. 나는 지금 이르커스한테 ‘너 진짜 에리스 멜킨이랑 결혼해? 사랑해? 금발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할 수 있어?’라고 물어보러 가는 거였다.

“언제는 나랑만 결혼하겠다더니…….”

마음 한구석에 잘 숨어 있던 치졸한 감정이 스윽 고개를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유치한 감정이었다.

착실하게 황궁으로 향하면서도, 걸음을 옮기거나 마차를 옮겨 타는 동안에도 몇 번이고 그냥 다시 남쪽 숲으로 돌아갈까 고민했다.

물론, 이성적인 사고 회로는 지금 이게 이르커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는 거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돌아가지 않으면 결혼 발표보다 더한 걸 저지르리란 것도.

하지만 유치한 감정에 잠식돼 비이성적으로 변한 사고 회로는 내 이성 때문에 로베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진실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발로 도망쳐 나온 황궁에 또다시 들어가다니. 인간은 역시 같은 실수를 무한히 반복하는 몇 안 되는 종족이다. 역사를 까먹으려고 배우는 게 틀림없다.

나는 내 앞을 막아서는 황궁 경비대를 향해 그간 내내 쓰고 있었던 로브를 벗어 얼굴을 내비쳤다.

내가 돌아올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라도 했는지, 별다른 검문이나 심문도 없이 황궁 문이 열렸다. 가출 후 몇 달 만에 돌아온 건데도 아무도 날 의아하게 보지 않았다.

마치, 모두 내가 기필코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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