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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80화 (80/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80화

    사실 에이사한테 라단타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로베인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당장 이르커스에 대한 내 감정도 정리 못 했고, 원하지 않는 상태로 쥬리아와 사밀라에게 붙들려 강제 계약 파기를 당할 위험도 있는 데다가, 주위를 얼쩡거리면 마법 계약이 강제로 이행될 가능성이 있어 아주 희박한 확률로 이르커스에게 평생의 정신적 충격을 안겨 주더라도…… 악역이 이를 악물고 주인공 옆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보호는 불치병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볼수록 라단타가 일개 악역인 이상 주인공인 이르커스를 이길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나라는 변수가 있어도 검술에도 마법에도 큰 재능이 없고, 중간에 배신하긴 했어도 그나마의 조력자였던 앙헬 역시 죽었다. 베첼 공작도 전 황제를 시해한 건으로 사형당했으니, 라단타가 아무리 앞 구르기 뒤 구르기 옆 구르기를 해 봐야 이르커스에게 대단한 위협이 될 수는 없을 터였다.

    이르커스가 제 발로 라단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서 ‘찔려 줄게’라고 하지 않는 이상 역사 깊은 마탑도 박살 낸 마검사가 질 리가 없었다.

    “설마 별일 있겠니?”

    카만에 온 뒤, 몇 주간 너무 평화로웠던 탓에 내 입에서 마법의 단어 ‘설마’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때 불길함을 느꼈어야 했는데.

    느슨해진 내 신경은 불길함은커녕 지난 세월, 자주 울려 주던 조상신의 경고등 한 번 울려 주지 않았다.

    ????????????

    ‘설마’는 정말 마법의 단어다. ‘설마’라는 단어를 문장 앞에 붙이는 순간, 부정적인 일의 경우 8할 정도 실현되기 때문이다.

    카만에 며칠 더 체류하다 에델라이드가 알려 준 인접 국가의 은신처 쪽으로 몸을 피했다. 에델라이드가 이졸데와 에이사도 너무 믿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기 때문에, 작별 인사 한번 없이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내심 에델라이드가 이르커스를 너무 못 믿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따져 보면 에델라이드가 트리스탄보다 이르커스를 더 오래 알고 지낸 인간이었다. 내가 또래 친구 만들어 준다고 에델라이드를 아틀리에에 데려간 적이 있으니까.

    ‘어디로 가든 이르커스는 당신을 금방 찾을 거야. 마법을 못 쓰는 대현자는, 그냥 수상하게 죽지 못하는 조금 강한 인간에 불과하니까.’

    에델라이드가 날 배웅해 주면서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수상하게 죽지 못하는 조금 강한 인간이라는 표현보다, 어디로 가든 이르커스가 날 금방 찾을 거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에이사가 내 체내에 자기 마력을 밀어 넣어 주면서 조심스럽게 추적 마법을 걸어 놨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에델라이드 말대로 내 제자가 제법 음습한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분명 남 미행하고, 상대가 알아서 걸어 들어오게끔 판 짜는 행위는 이르커스에게 가르친 적이 없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혼자서 백을 깨우치듯, 이르커스는 내가 아무것도 안 가르쳐도 알아서 각성한 모양이었다.

    에이사는 한네만보다 조금 더 마법 능력이 뛰어난 마법사였기 때문에 이 추적 마법을 해제하느라 고생을 꽤 많이 했다. 에델라이드 밑에서 일하는 마법사들의 직속 상사는 에이사였으므로, 에이사 눈에 띄지 않고 실력 좋은 무소속 마법사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물론, 마탑이 박살 나 준 덕에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떠돌이 마법사를 은밀하게 고용하는 것까진 문제가 없었다. 에델라이드가 밀린 추가 수당이라며 대신 금액을 대 주기도 했고,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아 ‘대현자’를 제외하곤 마땅한 신분이 없는 내 보증까지 서 줬으니까.

    추적 마법을 몰래 해제하고, 야밤에 남이 써 주는 이동 마법으로 국경을 넘어가면서 나는 내가 어쩌다 이런 도망자 신세가 됐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이전에도 수배가 떨어진 적은 몇 번 있었다. 아직 ‘대현자’ 칭호를 얻지 못했던 핏덩이 시절에 예카리나의 딸들을 데리고 도망치던 때에는 현상금까지 걸렸었고.

    하지만, 국가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부터 도망치는 건 나도 이 나이 먹고도 처음이었다. 기필코 죽게 되는 인간 하나가 뭐가 무섭다고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생각만 해도 헛웃음이 터졌다.

    이르커스가 나 때문에 죽게 되는 것도 싫고, 영생을 살게 되는 건 더 싫다. 그렇다고 필멸자의 사랑을 받아 줄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죽음을 원하지만, 이르커스가 나 때문에 평생을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 채로 사는 건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나도 참 미친 새끼였다. 뒈지고 싶으면 줏대가 있어야 하는데, 애한테 정을 너무 많이 줘서 물 한 방울 없이 퍽퍽한 밤 고구마를 입에 욱여넣은 답답이로 전락하다니.

    변두리 마을의 시계탑 앞에 서서,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잠깐 기다리자 열쇠를 넣을 수 있는 열쇠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테리즈가 남긴 열쇠 꾸러미를 힘겹게 뒤져 맞는 열쇠를 찾아낸 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하를 향해 내려갔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제자랑 이런 식으로 기 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았는데.

    이르커스나 나나 서로 뜻대로 안 움직여 주려고 안달이 난 인간들 같았다. 나는 늘 이르커스를 두고 떠나려고 하고, 이르커스는 내가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다 결국 나를 원망하게 되는.

    아래로 완전히 내려가자 마법이 걸려 있었는지 어두컴컴했던 지하가 금세 밝아졌다. 먼지가 풀풀 날리긴 해도 꽤 그럴듯한 은신처였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머리가 복잡했다. 일찍이 라단타의 복귀를 막을 수 있을 만큼 강하면서, 이르커스가 왜 그놈을 그냥 놔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자길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이복형제를 뭐가 예쁘다고 가만히 뒀는지. 나는 왜 이르커스가 날 안 쫓아오는 것에 안심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아쉬워했는지. 그리고 이르커스는 어째서, 하필이면 수많은 좋은 사람을 다 내버려 두고 내게 꽂혀서 날 이렇게 심란하게 하는지…….

    아무것도 이해 가는 게 없었다.

    ????????????

    “어머니.”

    라단타는 금발 사이로 희끗하게 새치가 올라온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귀부인으로서의 자태는 몰락 후에도 한결같았다.

    어떻게 보면 얼굴에 큰 흉터를 얻고, 악에 받쳐 지난 세월을 살아온 라단타보다 그 어머니인 전 황비가 더 고귀한 이처럼 느껴졌다. 라단타의 얼굴이 잔뜩 구겨진 상황에서도 전 황비는 늘 초연한 얼굴이었으니까.

    “라디, 꼭 그래야겠니?”

    “전 제가 가졌어야 할 것들을 되찾으려는 것뿐입니다. 제가 복권해야…… 어머니께서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요. 돌아가신 조부님도 그걸 원하실 겁니다.”

    “…….”

    “마리아가 우릴 배신한 거예요. 아시잖습니까. 그 애가, 우리를…….”

    “마리아 얘기는 들먹이지 말아라. 마리아는 기사가 될 거야. 우리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하지만, 어머니…….”

    “라디. 마리아는 이미 자기 인생을 잘살고 있어. 그 애는 황위 같은 것에는 욕심도 없고. 너는 남을 탓하는 나쁜 버릇을 고쳐야만 해. 자기 스스로 뜻을 이룰 수 없는 자들만이 남의 탓을 하는 거란다.”

    라단타는 제 말을 중간에 끊어 내는 어머니를 가만 바라보았다.

    핏줄이라고 해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못 이기는 척 자신이 지낼 자리를 내주고, 세력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지언정 언젠가 기필코 배신하는 게 사람이었다.

    아무리 피로 이어진 친어머니라고 해도 라단타는 전 황비가 자신을 배신하리라고 생각했다. 앙헬의 배신은 라단타를 검은 그림자처럼 평생 따라다녔다. 믿었던 친동생 마리아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은 일 역시 라단타의 인간 불신에 크게 공헌했다.

    “그래요. 마리아는 논외로 두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저와 벌인 일에 책임을 지게 되실 겁니다.”

    “알고 있다. 널 이곳에 다시 들인 순간부터 나 역시 반역자라는 걸.”

    “반역이라니……. 걱정 마세요, 어머니. 기필코 이르커스에게 제가 가져야 했던 모든 것을 돌려받겠습니다.”

    전 황비는 폐인이나 다름없는 꼴이 된 아들을 보며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마리아는 라단타를 도와주지 말라고 몇 번이고 그녀를 설득했지만, 부모 자식의 연이라는 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비이성적인 선택이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엉망이 된 자식을 목숨 걸고 도와주는 것이 부모였다. 보호자의 입장에 섰으니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 앞에 남은 게 파멸뿐이라는 걸 직감하더라도.

    “라디, 나는…….”

    “…….”

    “나는 그냥 네가 죽지만 않았으면 한다. 무슨 말인지 아니? 네가 욕망에 눈이 멀어 죽지만 않으면, 나는 그걸로 만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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