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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79화 (79/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79화

    “에이사가 대현자님께 말 전했답니다.”

    “여러모로 고생시키네. 고마워.”

    마리아는 폐위된 전 황비에 대해서 ‘어머니는 조용히 살고 싶어 한다’고 말했지만, 이르커스는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번 높은 자리에 올라 봤던 사람들은 지위가 주는 안정감과 충족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기간이 긴 사람일수록 온갖 이유와 변명을 대며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조용히 살고 싶다’라는 말이 정말이라면, 그건 전 황비가 욕심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하는 것보다 그 욕망 때문에 잃을 것이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테다.

    역사는 그래서 무수히 반복되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다들 알면서도 저지르고, 위험 부담이 크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목숨을 건 도박을 한다.

    여전히 귀족들과 유착 관계가 있는 전 황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라단타는 이렇게 빨리 세력을 모으지 못했을 터였다.

    “기껏 마탑전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전쟁인가요? 지겨워라.”

    이제는 후작 자리에 오른 에리스 멜킨이 찻잔을 든 채로 눈썹을 위로 살짝 치켜들었다.

    “그러게 아무하고나 결혼하라고 했잖습니까. 황제께선 후사도 없으시고, 매번 전쟁만 치르시니…….”

    “본론만 말씀하십시오.”

    “쌀쌀맞기는. 기껏 힘들여서 국외로 추방했던 에킨도르 멜킨이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더군요. 참 끈질긴 남자예요.”

    “라단타 쪽에 붙었을 겁니다. 기회라고 생각했을 테니.”

    “박쥐 같은 놈이죠. 기회가 왔을 때 한 번 더 걸어 보려는 모양인데, 그게 자기 수명 재촉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눈치는 나쁘지 않으면서 참, 줄을 못 선단 말이야.”

    에리스가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그 행위 자체에 제 형제를 향한 빈정거림이 묻어났다.

    “이번 내전이 끝나면 차라리 저와 혼인해요.”

    “…….”

    “저도 당신이 좋아서 제안하는 건 아닙니다. 슬슬 전쟁도 그만하셔야지. 황제께서야 대단하신 마검사니 전쟁을 몇 번 하든 상관없으시겠지만, 제국민들은 무슨 죄입니까? 자리를 얻었다면 그에 맞는 의무를 행하도록 하세요.”

    에리스 멜킨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전 약혼자에게 다시 결혼을 논하는 사람치고 일말의 애정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에리스가 내비치는 건 오로지 자리에 대한 갈망뿐이었다.

    “사랑 때문에 책임을 뒤로하시겠다면, 마땅한 이를 찾아 그 자리를 넘기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르커스는 에리스의 눈에 서린 진심을 보았다. 에리스 멜킨은 정말로 황제가 되고 싶은 눈치였다. 황제가 될 명분과 빌미가 없으니, 그 옆에서 섭정이라도 하고 싶어 했다.

    백작에서 후작으로 계급이 상승했더라도, 야망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더 위를 바라보기 마련이다.

    만일 이르커스가 제 아버지처럼 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한 이었다면 지금 에리스 멜킨의 발언을 반역죄로 몰아갈 수도 있었을 터였다.

    이르커스는 라단타나 에리스처럼 진정으로 이 자리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어느 순간 목표가 바뀌어 버린 제가 왕관을 쓰고 있는 이 상황이 꼭 부조리극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글쎄. 자리를 얻고 싶으시다면 당신도 라단타처럼 내게 검을 겨눠야지.”

    “그것보단 결혼이 더 쉽죠. 더 쉬운 방법을 두고, 왜 굳이 위험한 일을 택하겠습니까?”

    “결혼이 어떻게 더 쉽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전 당신 말마따나 사랑에 미쳐서, 배다른 형제가 기어코 궁으로 돌아오는 걸 방관하고 있는데.”

    찻물이 그대로 남은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후, 에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나라를 말아먹게 생겼군요.”

    “사사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제정신이 아니시긴 합니다. 남색인 것도 모자라, 늙지도 죽지도 않는 상대한테 그토록 집착하는 게……. 12년이면 마음을 정리하기 충분한 시간 아니었나요?”

    “누가 그러더군요. 제가 타고난 핏줄이 정신 나간 사랑만 한다고.”

    “……하. 어쩌다 당신 같은 인간이 황제가 되었는지. 제국의 불운입니다.”

    “그리 안타깝다면 카만처럼 황제라는 자리를 없애 버리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농으로도 하지 마세요. 나는 영웅보다는 황제가 좋습니다.”

    이어 대현자는 당신을 절대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저주 섞인 말이 에리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르커스는 그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유안을 생각했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전쟁은 너무 길었다. 마탑이 제국으로 쳐들어오길 기다리던 몇 년은 이르커스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마탑을 박살 낼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를, 이르커스는 숨죽이고 기다렸다. 라단타가 앙헬보다 조금 더 성급하고, 노련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게 그나마 이르커스에게는 위안이 됐다.

    “나는 이 내전에서 날 죽이고자 하는 이의 검에 등을 내어 줄 생각입니다.”

    “……그래서 얻게 되는 게 뭐죠? 무모한 결정입니다.”

    “글쎄. 대현자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얻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그냥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미치다 못해 목숨까지 거시고.”

    “내가 죽게 될지, 아니면 죽지 못하게 될지, 아직은 모를 일입니다. 후작께서는 본인 형제와 달리 줄을 잘 섰다고 생각하십니까?”

    “…….”

    “내 생각은 다른데.”

    라단타가 이르커스를 찌르면, 그때 유안은 어쩔 수 없이 마녀들에게 이르커스와의 계약을 파기해 달라고 부탁하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서 죽거나, 영생을 살게 되거나.

    유안은 자기 자신의 죽음은 간곡히 바라면서 이르커스가 자기 눈앞에서 죽는 건 두고 보지 못할 사람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고 해 놓고서, 그 ‘인간’에 이르커스가 들어가길 바라지 않는 모순적인 사람.

    너무 오래 돌아왔다.

    이르커스는 다가올 날들을 기대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안이 돌아오고, 내전이 일어나고…… 그리고 자신이 유안이 말하던 ‘악역’의 손에 위험에 빠질 날을.

    늘 이르커스를 혼자 내버려 두지 못하던 유안이, 어쩔 수 없이 계약을 파기해 가며 즉사와 영생 사이에서 자신을 선택할 날을.

    ????????????

    “에델 너, 나한테 할 말 없니?”

    “무슨 말?”

    “로베인 제국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던데.”

    제국 내부에서 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은 카만에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로베인 입장에서는 마탑전을 치른 뒤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다시 내전이 터질 위기라는 걸 타국에 알려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아무리 쉬쉬해도 정보가 새어 나가니, 카만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에델라이드도 이 사실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다.

    “그거, 에이사가 말했지.”

    “아니? 내가 스스로 알았는데?”

    내 반응에 에델라이드가 코웃음을 쳤다.

    이르커스 생각이 날 시간도 없게 해 주겠다며, 봐야 할 서류를 몰아쳐 준 에델라이드 덕에 제국 정세까지 신경 쓸 틈이 없기는 했다.

    게다가 에이사나 이졸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나를 대하는 걸 어려워했다. 나를 무슨 사이비 교주처럼 모시던 마탑 놈들이 전 대륙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니 ‘검은색 저주 받았어 싫어 싫어’ 인간만 주변에 남게 된 것이다.

    나는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질겁하며 물러서는 사람들을 위해, 역병이라도 걸려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처럼 극도로 외출을 자제했다.

    정보를 물어다 주는 사람이라곤 에델라이드와 이졸데, 에이사가 전부였으니 내가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스스로 알아냈다’라고 말하는 게 에델라이드한테는 우스운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에이사 걔도 참. 비밀로 해 달라니까 그걸 고새 가서 다 말하네.”

    “왜 나한테 숨겨? 내가 설마 바로 로베인으로 쫓아갈까 봐?”

    “아니야? 갈 거잖아. 기껏 도망쳐 나와 놓고, 제 발로 기어들어 갈 거면서.”

    “너, 날 너무 쉽게 본다. 나 그렇게 쉬운 대현자 아니거든.”

    마음이 조금 흔들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냉담하게 생각해 보면 나는 내 발로 이르커스 곁에서 도망친 상태였다.

    무엇보다 라단타가 아무리 기를 써도, 어디 악마랑 새롭게 계약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먼치킨 주인공인 이르커스를 이길 수는 없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르커스가 짠 판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이르커스가 왜?”

    “당신이 제 발로 로베인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나까지 끌어들이는 것 같다고.”

    내가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그게 무슨 소리인지 다시 말해 달라고 하자, 에델라이드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이제 마법도 못 쓰는 당신이 황궁 마법사인 한네만의 도움을 받아서 탈출했는데, 이르커스가 그걸 몰랐겠니? 한네만이 아무리 당신에게 목숨을 빚졌더라도 직속 상사는 황제인 이르커스인데.”

    “…….”

    “마음만 먹으면 자기가 직접 쫓아오거나 마녀들을 보내서 전처럼 당신을 납치해 갈 수도 있는데, 당신이 여기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안 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나한테 질려서…….”

    “헛소리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래.”

    남쪽 숲에 누워서 이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이르커스가 날 너무 쉽게 놔줬고, 쫓아오지 않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웠으니까.

    한네만의 좌표 실수부터가 사실 노골적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정말 한네만의 마법 사용 미숙으로 일어난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치곤 이동 마법 자체는 신체 하나 안 잘리고 무사히 이루어졌다.

    역시, 목숨 구해 준 놈보단 돈 주는 놈이 우위라는 건가. 나는 다시 한번 한네만을 응징할 계획을 세우며 에델라이드한테 시선을 돌렸다.

    “네 할머니가 나한테 남긴 열쇠, 그거 나이트 펠로우 은신처 열쇠래.”

    “……나도 위치 몰라.”

    “네가 왜 몰라. 나한테 진 빚은 잊지 않겠다며. 좀 알려 줘.”

    “정말 로베인으로 안 돌아갈 거야?”

    “라단타가 이르커스를 어떻게 이기겠니?”

    에델라이드가 골치 아프다는 듯 자기 이마를 싸맸다.

    “남이 짠 판에 순순히 놀아나는 것도 싫은데, 옆 나라 황제가 자기 뜻대로 안 됐다고 은신처 뒤지고 다닐 생각하니까 골치 아파.”

    “너는 이르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그 정도는 아닐걸?”

    “맞을걸? 다른 건 몰라도 당신에 대해서라면 이르커스, 그 자식이 음험하다는 거에 나라도 걸 수 있어.”

    나라를 왜 함부로 걸어…….

    트리스탄이 나라를 걸었다면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겼을 텐데, 에델라이드가 나라를 건다니까 심각하게 들렸다. 사람은 이래서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따라 말의 신빙성 정도가 달라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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