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78화
안에 든 편지지는 고작 한 장이었다. 테리즈다운 간결함이었다. 보통 유언장은 삶에 미련이 남아 길어지기 마련이라던데, 죽음 앞에서도 테리즈 펄번은 큰 미련이 없었던 모양이다.
[대현자에게.
봉인됐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렇게 뻗대고 살더니…… 너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보통 편지라고 하면 안부 인사부터 시작하는 게 기본 아닌가? 대충 날씨가 어떻고, 건강은 어떻고, 이런 말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냅다 ‘너 그럴 줄 알았다’로 시작하는 편지는 나도 생전 처음이었다.
[네가 이걸 읽고 있다는 건, 에델라이드가 살아 있을 때 네가 깨어났다는 거겠지.
못 읽는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난 죽기 전에 빚을 갚았는데, 네가 못 받은 거니 내 책임은 아니다.]
“뭐라고 적혀 있어? 전 나이트 펠로우 수장이 남긴 거니까, 비밀스러운 내용인가?”
“아니. 그냥 나 엿 먹이는 내용인데.”
“하하, 농담도.”
진짜인데.
나는 침착하게 그 아래로 적힌 몇 줄의 글을 더 읽었다.
장황한 감사 인사나 널 원망했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소리가 있었다면 소름은 좀 돋았을지언정 뿌듯하긴 했을 텐데. 테리즈는 절대 빈말은 하지 않는 대장부였다.
[동봉한 열쇠 꾸러미는 대륙에 위치한 나이트 펠로우 은신처들의 열쇠다.
젊은 시절 일은 서로 좋지 않은 기억일 테니, 굳이 들추지 않겠다. 네게 서운했던 걸 지금 와서 꺼내 봐야 잉크 낭비만 하게 될 뿐이니.
네가 무리해서 에델라이드를 도와준 것에 대해서 늦었지만, 정식으로 감사를 표하마.
나, 테리즈 펄번은 그 은혜를 갚고자 한다.]
이 부분은 감동적이었는데, 그 아래 덧붙인 문장이 열 받았다.
[하지만, 은신처 위치가 어디인지는 스스로 알아내도록 해. 대현자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마법 못 쓰는데 어떻게 알아내.
에델라이드한테 너희 은신처 어디냐고 탈탈 털어 내는 것 말곤 자력으로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나는 열쇠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대륙 전 지역에 있는 은신처 열쇠라더니, 꾸러미에 든 열쇠 개수를 세어 보니 열 개가 넘었다. 정보 길드라 여기저기 퍼져 있을 줄은 알았지만, 내 예상보다 테리즈가 운영했던 나이트 펠로우는 규모가 컸던 모양이다.
“에델의 조모와 꽤 가까웠나 봐.”
“아닐걸. 테리즈는 말년까지 날 진짜 싫어했어. 에델이 아니었으면 굳이 내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을 사람이었고.”
“그래?”
“난 딱 한 번을 제외하곤, 테리즈의 그 어떤 부탁도 들어주지 않았거든.”
“그런 것치곤 유품까지 받았네.”
“…….”
“조금은 그립지? 그런 표정을 다 짓고.”
나는 이졸데의 말에 내 얼굴을 더듬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가 멋쩍게 편지를 다시 상자 안으로 집어넣자, 이졸데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별수 없는 인간이구나, 대현자.”
그 말이 괜히 내 가슴을 울렸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지 못하게 영생을 살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인간이구나.
????????????
내 마법 능력을 앗아 간 카만에서의 생활이 제일 안정적이라니, 참 우스운 일이다.
에이사는 주기적으로 내 몸 상태를 살피기 위해 얼굴을 비췄다. 정확히는 마나 상태와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가 얼마나 갈지를 살피러 오는 거였다.
“아직도 체내에 마나가 안 쌓이네요.”
“마나 흐름 같은 건 다 느껴지는데, 여전히 활용은 안 돼.”
“제가 보기엔 마법 능력이 돌아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단 회복할 방법이 없는지를 알아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
“그냥 마법 없이 살까?”
“대현자님 성격에요? 화병으로도 못 죽으시는 분이…… 답답해서 어떻게 사시려고요.”
마법 계약은 정말이지 위대한 발명품이다. 너무 위대한 나머지 사람을 무척 힘들게 했다.
당시엔 단순하게 ‘하하, 한 50년 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앙헬이 마탑에 걸려 있는 마법 계약 때문에 쪽도 못 쓰고 죽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50년이 뭐야. 한 세기 넘게 갈지도 몰랐다. 그보다 더 오래갈 수도 있었고.
“마법 계약…… 이거 누가 개발한 마법이야? 어떤 놈인지 아주 지독하다. 언어학계의 촘스키 같은 놈일 게 틀림없어.”
“촘스키? 그게 누군데요?”
“너 모르는 사람 있어.”
에이사가 내 대답에 입을 삐쭉 내밀며 자기가 모르는 게 어디 있냐고 받아쳤다. 아마 마법 역사 쪽으로 넘어가면 에이사도 웬만한 역사적 인물은 다 알 테지만, 지구 사람은 확실히 모를 것이다. 나는 손만 뻗어, 옛날처럼 에이사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예전에는 나보다 한참 작았는데, 12년이라는 시간을 무시할 순 없는지 이제는 고개만 살짝 숙이면 눈이 마주쳤다. 어릴 때 보고 한참 못 보다가, 못 본 새에 훌쩍 자란 사촌 동생을 만난 기분이었다.
“마법 계약의 시초는 주신, 엘리오스예요. 균형과 조화의 신이니까.”
“어쩐지. 인간이 개발한 것치곤 너무 융통성이 없더라.”
“마법 계약 실컷 해 본 저희 오빠한테 물어봤는데요, 계약 위반 때문에 어떤 제약 같은 게 걸리면 해제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고 복잡하대요.”
“그건 또 무슨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말이니…….”
간단하고 복잡하다는 게 대체 뭔데.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왔다.
이르커스가 그냥 마법 계약에 따라 날 죽여 주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렇게 마법 능력을 되찾으려고 기를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마법을 못 쓰니 ‘대현자’라는 칭호에 걸맞지도 않고, 사소한 부분에서 하나하나 다 불편하긴 했다.
그래도 현대 한국에서 살아왔던 기간이 19년은 되기 때문에, 그럭저럭 비마법사의 삶을 욕하면서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르커스가 자기가 입을 피해를 다 알면서도 꿋꿋하게 나와의 마법 계약을 파기하려고 든다는 거였다.
고집도 그런 황소고집이 없었다. 마녀 둘의 수명을 갉아먹으면서까지 꼭 계약을 없던 일로 해야겠다는데…… 내가 어쩌겠는가. 대항이라도 하려면 이 지독한 페널티를 벗어나야 했다.
“예를 들어, 대현자님이랑 제가 마법 계약을 맺어요. 계약 내용은 ‘카만으로 귀화하시면, 제가 대현자님과 결혼할게요’ 이런 걸로 하고.”
“계약 내용이 뭐 그래? 내가 어떻게 너처럼 새파랗게 어린 애랑…….”
“아, 좀. 그냥 들어 보세요. 예시잖아요, 예시.”
“……그래. 마저 말해 봐.”
“그럼 이제 대현자님이 카만으로 국적을 바꾸는 순간, 계약에 효력이 생겨서 저는 무조건 대현자님과 결혼을 해야 한단 말이에요. 아무리 피하고 피해도 좀 늦어질지언정 무조건 대현자님의 부인이 되어야 한다고요.”
“말만 들어도 끔찍해. 너처럼 창창한 애 인생을 내가 왜 조져야 해.”
“이때 제가 억지로 계약을 위반해 버리면, 그러니까 대현자님 말고 다른 사람이랑 후다닥 결혼해 버리면요. 그럼 전 마법 계약 위반으로 뭔가 피해를 받겠죠?”
“그렇지. 아마 네가 결혼한 다른 사람이 급사하지 않을까?”
“그렇죠. 근데, 이제 그 피해를 없던 일로 만들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아요.”
기기묘묘한 예시를 들며 마법 계약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던 에이사가 아까 한 말 그대로 내게 간단하지만 엄청나게 복잡한 방법을 제시해 줬다.
“지도에서 카만을 지워 버리면 계약 전제 조건이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카만으로 귀화하면’이라는 조건에서 ‘카만’을 없애 버리면 조건 성립이 안 된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황제 자리를 썩 탐탁지 않아 했던 이르커스의 반응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내가 죽여 달라고 하도 성화여서 결국 입궁하긴 했어도,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몇 년을 질질 끌었으니까.
그럼 그냥 황궁 박살 내고 황제라는 직위를 없애 버리면 나랑 이르커스의 마법 계약도 없던 일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카만이라는 나라를 지도에서 없애 버리는 것만큼이나 말만 간단하지 아주 복잡한 일이 될 건 자명했다.
나라 하나 없애면 사망자와 난민의 수를 감당할 수 없어진다. 공격 마법 하나만 잘못 써도 회복되는 데 몇 년씩 걸리는데,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나 하나 죽자고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 때문에 할 수 있을 때도 황궁 박살 안 내고 온건한 방법을 쓰고자 노력한 건데, 인제 와서 그런 짓을 할 순 없었다.
“마탑과 마탑주 사이에 걸려 있던 계약도 비슷해요. ‘마탑을 수호하지 못하면 마탑주는 응당 그 목숨으로 대가를 지불한다’인데……. 몇 세기 동안 마탑이 박살 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다들 그 마법 계약은 전제 조건 자체가 성립 안 되는 계약이라고 여겼죠. 다들 완전 까먹고 있었어요.”
“마법 계약, 머리 터질 거 같아. 엘리오스 밀어내고 다시 헤누스를 주교로 삼을래.”
“간단하게 말하자면 카만 왕족의 직계 핏줄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대현자님한테 걸려 있는 마법 제약도 알아서 풀린다는 소리예요. 전제가 성립이 안 되니까.”
이건 카만을 세계 지도에서 지우는 일보다 어려운데? 나는 아주 잠깐 겸허한 마음으로 비마법사의 삶을 받아들일까 고민했다.
왕족이라 여기저기 결혼하고 다녔을 텐데, 그 핏줄을 어떻게 찾아서 다 죽인단 말인가? 직계만 골라 세상에서 없애 버린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비마법사로 살련다.”
“포기가 빠르시네요. 다 죽이겠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게다가, 의외로 카만 왕실은 손이 귀하다고요. 내전 때 폭발에 휘말려서 거의 다 죽기도 했고…….”
“야, 마법 좀 쓰자고 왕족 다 죽이면 그게 미치광이지 대현자니?”
“저는 대현자님이 가끔 옳은 소리 하실 때마다 낯설어요…….”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제약도 풀리겠지. 설마, 평생 가겠니. 불멸자인 내가 참고 사는 수밖에.”
내 속 편한 소리에 에이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며 텅 빈 내 체내에 자기 마나를 억지로 밀어 넣어 주는 건 고마웠다. 그래 봤자 마법 발동이 안 되니까 별로 소용은 없지만.
나는 깊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마법 계약의 전제 조건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게 그렇게 쉬웠으면 마법 계약이 상인과 용병들 사이에서 인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르커스가 마녀 둘을 데리고 강제로 계약을 파기할 생각부터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르커스 등장 전까지 마법 계약과 큰 인연 없이 살아왔던 나는 몰라도 이르커스는 마법 계약에 대해서 꽤 세세하게 알아봤을 테니까.
“그리고 이건…… 에델라이드 님은 대현자님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뭔데?”
“제국 쪽 분위기가 요즘 다시 흉흉하대요. 무슨 일이 날 것 같다고.”
갑자기 누가 머리 위로 찬물을 부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내 페널티에 대해서 들을 때는 그냥 더럽게 복잡하다는 감상이 전부였는데, 제국에 무슨 일이 있다는 소리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보면 나도 참 중증이었다.
“라단타가 돌아왔대요.”
12년 전에 도망쳤던 악역이 죽지도 않고 또 왔다는 소리에 가슴이 뛰었다. 역시 라 뭐시기……. 소설 초반부터 이름 나오는 인간답게 오래도 살아 있구나. 독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