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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75화 (75/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75화

“그러니까, 대현자가 봉인에서 깨어났고 황궁을 탈출해서 남쪽 숲에 가 있다는 건데.”

“그렇죠. 왜 도망치셨지? 황제가 대현자님한테 구혼했다는 소문이 제국에 파다하던데. 결혼하기 싫으셨나?”

“너 같으면 결혼하고 싶겠니? 이르커스 걔가 얼굴은 괜찮은데, 나머지는 전부 별로야.”

에델라이드는 이졸데가 받은 편지를 살짝 훑어보았다. ‘여보~ 오늘도 여보가 보고 싶어 죽겠구려~’ 따위의 오글거리는 문장이 잔뜩 적혀 있는 편지가 내포하고 있는 본론은 ‘대현자 일어났다’였다.

“당신 남편은 원래 이렇게 편지에 사족이 길어?”

“원거리 부부니까. 내가 얼마나 보고 싶겠냐? 네가 이해해라. 그래도 이번 편지는 제법 간결한 편이야.”

“전 남편이 이렇게 깜찍하게 편지 써 주면 좋을 것 같긴 해요.”

“좋기는…… 본론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고도의 암호인가 했네. 이렇게 쓰면 여러 번 읽어야 하잖아.”

에델라이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이사의 마법으로 진짜처럼 움직이는 정교한 기계 손이 편지를 깔끔하게 접어 봉투 안에 도로 담았다.

“네 오빠도 대현자가 일어나서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랬지.”

“맞아요. ‘대현자한테 빚지지 마, 계속 부려 먹혀’라고도 말했어요.”

“한네만 걔도 참…… 고생이 많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여자는 각기 다른 이유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델라이드가 카만의 왕정을 폐지한 이후로 이 셋은 종종 모여 티타임을 가졌다. 각자 위치가 달랐지만, 나름대로 서로를 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에델라이드는 제 아래에서 국가 영웅 격 마법사로 일하고 있는 에이사와 왕실 기사단이 폐지됨에 따라 수도인 캐러벨의 치안을 책임져 주는 이졸데에게 크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조모인 테리즈가 노령으로 사망한 뒤, 에델라이드가 가장 기댈 수 있는 사람도 바로 에이사와 이졸데였다.

“대현자를…… 한 번은 만나 보는 게 좋겠지?”

그 탓에 에델라이드는 자신이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이 두 사람을 불러 티 테이블에 앉혔다.

이졸데는 이렇게 국정 운영 및 사사로운 개인 질문에 자신을 고문으로 활용할 거면 돈이라도 달라고 투덜거렸지만, 어찌 됐든 저보다 한참 어린 에델라이드의 고민을 제법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늘 ‘좋다’는 말만 해서 의사 결정에 큰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에이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괜찮지 않을까요? 마침 남쪽 숲에 계시니까, 로베인 쪽에 복잡하게 방문 절차 밟을 필요도 없을 것 같고.”

“그, 대현자 보러 가는 길에 나도 좀 데려가 줘라. 내 남편 데려간 놈 얼굴 좀 보게.”

“아니, 기묘하게 찜찜하단 말이야.”

“어떤 게 마음에 걸리길래 그래?”

“대현자가 한네만을 들들 볶아서 황궁을 탈출한 것까진 이해가 되는데, 그걸 이르커스가 그냥 두고 봤다는 게.”

에델라이드는 근래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마주친 이르커스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는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었지, 스물아홉 살의 이르커스는 귀엽기는커녕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이야 남의 외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에델라이드가 보기에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 안에 든 알맹이는 짐작하기 어려운 무언가였다.

“뭔가 이르커스가 깔아 놓은 판에 발 들이는 것 같아서 좀 그래.”

“너무 과민한 거 아니야? 그냥 두고 보는 게 아니라, 뒤로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가 모르는 걸지도 모르잖아.”

“맞아요. 저는 황제가 그렇게 모략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대현자님 제자인 거면 그쪽도 작전 없이 몸으로 부딪치는 부류 아닐까요?”

한때 정보 길드 수장으로 지냈던 경력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에델라이드 역시 뭐가 수상한지 정확히 물증을 잡아낼 수는 없었다.

“뭐, 만나기만 하는 건데 별일 없겠지.”

에델라이든 결국 찻잔을 비우며 남쪽 숲에 방문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유 모를 꺼림칙함보다 대현자와의 해후가 먼저였다. 어찌 됐든 대현자는 카만의 은인이었고, 에델라이드는 테리즈로부터 대현자에게 전해 달라는 물건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으니까.

이르커스가 바라는 대로 천천히 판이 움직이고 있었다.

????????????

[사람이 셋이나 찾아왔어.]

“누군데?”

[글쎄. 인간들은 나이를 먹으면 너무 많은 게 바뀌니까. 한 명은 아주 오래전에 한번 본 적 있는 것 같아.]

“이르는 아니지?”

[응.]

“그럼 뭐, 에델이겠네.”

내 예상과 달리, 이르커스는 도망친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안 쫓아와서 다행인데, 안 쫓아오니까 이상했다. 이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을 대체 어쩐단 말인가.

마법 계약을 파기하기 전에 내가 튀었으니, 이르커스 입장에서도 직접 나를 쫓아오는 건 부담스러울 것이다. 괜히 따라붙었다가 마법 계약이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면서 강제성을 발휘하면, 자기도 어쩔 수 없이 날 죽여야 하니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냥 내게 드디어 질렸을 수도 있었다. 꾸준히 구애하는 걸 알면서도 매번 난 모른다며 튀는 스승에게 어느 제자가 순애를 유지하고 싶겠는가.

웬만큼 미치지 않고서야 보답 받지 못하는 감정을 퍼 주는 건 어려웠다. 사람의 마음은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게 아니라서, 언젠가는 바닥이 드러나고 만다. 이르커스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혼자 땅 팔 거면 왜 도망쳤어?]

“네가 이 복잡한 인간의 마음을 뭘 알겠니.”

[도망쳤으면서 쫓아와 주길 바라는 인간의 심리는 그다지 이해하고 싶지 않아.]

길버트가 이제 자리에서 좀 일어나라며 나를 독촉했다. 나는 덜 마른 빨래처럼 눅눅하게 몸을 일으켰다.

내가 다시 결계를 보강할 수 없는 상황이라, 에델라이드가 마법사를 데리고 왔다면 남쪽 숲 안으로 들어오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굳이 마중 안 나가도 알아서 아틀리에까지 찾아오겠지. 에델라이드라면 좀 오래전이긴 해도 테리즈의 원수를 갚겠다며 이미 날 찾아온 적이 있었으니까.

“누워만 있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알거든? 그런데, 진짜 누워만 있고 싶다.”

[약한 소리 말고 일어나. 데인이 빨리 상대하고 인간 다 내쫓으래.]

“내가 앓느니 죽지.”

못 죽지만…….

머릿속에 드는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며 에델라이드와 다른 두 명이 앉을 만한 자리를 만들기 위해 느릿느릿 움직였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인간 입장에서는 황폐해졌고, 숲 입장에서는 드디어 원 상태를 찾은 아틀리에는 사람이 머무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전에 마도구 개발하러 왔을 때도 상태가 안 좋기는 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심각했다.

가구 중에 쓸 만한 건 거의 남지 않았고, 나무 바닥은 이미 온갖 잡초들로 뒤덮인 지 오래였다. 마법이라도 쓸 수 있으면 알뜰살뜰 가꿔 놨을 텐데, 마법을 못 쓰니 직접 노동 외에는 아틀리에를 복구할 방법이 없었다.

잡일이나 치우기는 노예 시절 질릴 만큼 해 봐서 잘하는 편이지만, 잘하는 것과 별개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틀리에는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남들 앉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바닥에 깔 만한 천들을 찾아보는데, 있으나 마나 한 아틀리에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 주지 않았는데도 반쯤 박살 난 문 너머로 에이사가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들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정말 어렸는데, 에이사는 어느덧 청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대현자님!”

“아니, 대현자가 무슨 이런 폐가에 살아.”

“빈티지가 요즘 다시 유행이라잖아요.”

셋밖에 없으면서 우글우글 내 아틀리에로 침범한 인간 중에서 모르는 얼굴은 한 명밖에 없었다.

사자 갈기 같은 갈색 머리와 풍채 좋은 중년 여성은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물론, 본능적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은 됐다.

“설마, 이졸데?”

“뭐야, 대현자라 그런가…… 바로 알아보네?”

“어어, 사자 같길래…….”

그야 트리스탄이 말한 사자 같은 부인이라는 서술에 이졸데가 정확히 맞아떨어졌으니 못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은유적인 표현인 줄 알았는데, 묘사 그 자체였을 줄이야.

나는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문학 지문을 틀렸을 때의 기분을 느끼며 세 사람이 앉을 만한 자리에 낡은 천을 깔아 주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에델, 너는 엄청 바쁠 텐데.”

일단 손님을 맞이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예고도 없이 찾아온 세 사람을 앉혀 놓고 보니 얘네가 왜 왔나 의문스러웠다.

“마도구에서 풀려났다길래 얼굴 한번 보려고 왔지. 에이사는 숲 입구에 있는 결계 때문에 데려왔고, 여기 이졸데는 자기 남편 데려간 남자 면상을 꼭 봐야겠다고 그래서.”

“너무 오해의 소지로 가득 찬 말이다. 내가 데려간 게 맞긴 한데…….”

“거, 월급 좀 팍팍 주고 그럽시다.”

이졸데가 호탕하게 내 등을 팡팡 내리쳤다. 한 대 맞을 때마다 몸이 앞으로 죽죽 밀렸다. 트리스탄이랑은 다른 방향으로 참 거리감 없는 인간이었다.

내가 무력하게 등을 내준 채로 에델라이드에게 그게 용건 전부냐고 되묻자, 에델라이드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할머니가 너한테 전해 달라고 남겨 둔 게 있어서. 빚을 졌으니 갚아야 하잖아.”

“테리즈가?”

“그래. 이거 받아.”

테리즈라면 진작 노령으로 죽었을 텐데.

나는 에델라이드가 내게 건네준 작은 상자를 받아 들었다.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 걸로 봐서 뭐가 많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안에 든 게 뭔지 알아?”

“아니. 열어 보지 말고 전해 달라고 하셔서 나도 한 번도 안 열어 봤어.”

테리즈 얘기에 에델라이드의 얼굴에 긴 그림자가 졌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된 뒤에도 에델라이드는 여전히 테리즈를 추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한테도 안 남긴 유품을 너한테 주다니. 할머니도 참 너무하지.”

나이트 펠로우와 카만이 테리즈가 에델라이드에게 남긴 유산 그 자체였으니 물건으로 남길 필요가 없었을 거다. 에델라이드는 테리즈가 하려고 했지만, 망설이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이뤘으니 그 자체가 테리즈의 유산이기도 했다.

이르커스도 내가 죽는다면, 테리즈를 추억하는 에델라이드처럼 저렇게 쓸쓸한 표정을 지을까?

나는 고개를 휘저으며 불쑥 치고 들어오는 이르커스에 대한 생각을 내몰았다. 길버트 말대로 이렇게 도망쳐 나와서까지 구구절절 이르커스를 생각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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