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현자는 죽고 싶어-74화 (74/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74화

    지금이야 내가 쳐 놓은 결계를 내 손으로 못 풀어서 데인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과거의 나는 마음만 먹으면 남쪽 숲을 통째로 태워 버릴 수 있었다.

    이거 두고 전쟁하는 거 꼴 보기 싫으니까, 그냥 숲을 싹 다 태워 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전쟁의 원인이 된 지역을 지도상에서 없애 버리면 싸울 명분이 사라질 테니 전쟁을 좀 덜 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인간들 싸움에 동식물이 무슨 죄인가 싶어서 숲에 불을 지르는 무식한 방법은 머리로만 생각하고 실천하진 않았다. 전쟁이 예상외로 좀 일찍 끝난 덕에 내 얄팍한 인내심도 잘 버텨 줬다.

    [결국 이번에도 못 죽었네, 유안.]

    “아사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긴 했는데.”

    [그동안 연락 한번 없길래, 다들 이번에야말로 네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12년 동안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긴 했지.”

    길버트가 구해 준 나무 열매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내내 빈속이었다가 속에 뭐라도 욱여넣으니 그제야 머리가 돌아갔다.

    천천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한네만이 나 고생 좀 해 보라고 내가 준 좌표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떨어트린 게 아닌가 싶다. 너무 부려 먹어서 열 받았나? 이런 사소한 실수를 할 만한 애가 아닌데.

    다시 만나면 한네만을 응징할 계획을 세우며, 이제 거의 온실이나 다름없게 된 아틀리에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내가 쓰던 침대는 이미 넝쿨 식물의 지지대가 되어 쓸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그때, 네 손에 죽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내가 남쪽 숲에 처음 왔을 때 말이야. 데인이 아직 어린나무였고, 네가 나한테 돌아가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을 때.”

    내가 남쪽 숲에 들어서자마자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내 어깨를 관통했던 건 아직도 기억난다.

    넝쿨 식물들이 내 발목을 붙잡고, 숲 전체가 내게 적대적인 것처럼 바닥이 아래로 푹푹 꺼져 걸음 하나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분노한 나무 정령들이 우글우글 다가와, 이 인간을 죽여서 도로 인간들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구시렁거리던 소리가 아직 귀에 선연하다. 지금 데인이 내게 드러내는 적대감도 그 당시와 비교하면 아주 귀여운 수준이었다.

    나는 어차피 죽지 않는 몸이라 그런 공격을 받고도 아프다고만 느꼈을 뿐, 나무 정령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얘네 진짜 다른 인간한테 이랬다간, 인간과 나무 정령 사이에 전쟁 크게 나겠는데…….’ 하는 생각만 들었다.

    나니까 불도 안 지르고, 그냥 찔려 주고, 흙 좀 먹고 그랬지.

    카만 놈들이 나를 제일 먼저 남쪽 숲에 보낸 건 생각해 보면 잘한 일이었다. 평범한 인간들은 분노에 찬 나무 정령들을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들 죽어서 남쪽 숲의 좋은 양분이 되었겠지.

    [이르커스랑 무슨 일 있었나 봐.]

    내가 나무 정령들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고 있는 동안, 길버트가 전혀 감성에 젖지 않은 채로 본론만 딱 집어 말했다.

    내 주변 인물들은 마녀들도 그렇고, 다들 왜 이렇게 정곡만 집어 말하길 좋아하지? 주변에 트리스탄처럼 생각 없는 놈을 두고 살아야 내 감성 팔이를 잠자코 들어 줄 텐데.

    “이르 얘기는 갑자기 왜 해.”

    [몇 년 만에 혼자 돌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기억도 잘 안 나는 옛날 얘기니까. 그 애가 널 죽여 주지 않겠대?]

    길버트가 누워 있는 내 쪽으로 뿌리를 뻗었다.

    기본적으로 나무 정령은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지만, 길버트는 늘 내게 친절했다.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등 배기지 말라고 내게 자기 뿌리를 베개로 내주는 지금처럼.

    이 친절은 내가 남쪽 숲에 불을 지르는 대신, 카만 왕족 놈의 머리를 태워 버린 덕에 얻어 낸 것이다.

    어떻게든 나를 죽여 보려던 나무 정령들에게 내가 죽지 않는 몸이라는 걸 인지시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불멸자라는 걸 알게 되자, 나무 정령들은 겁에 질리긴커녕 점점 더 초연해졌다. 어린 정령들이라도 피신할 수 있게 시간을 달라는 게 나무 정령들의 뜻이었다. 나 하나 못 죽였다고 숲을 포기하고 어디로든 떠날 생각을 하는 놈들을 보니 내 속이 다 답답해졌다.

    그래서 길버트를 붙잡고, 냅다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너 내 친구해라’라고 말해 버렸던 거다. 동료로 삼아 버리기에 이 대사만큼 좋은 문장이 또 없었다.

    일단 나무 정령 편을 들려면 나무 정령이랑 뭐라도 관계가 있어야 했다. 지금보다 젊었던 그때의 나는 나름대로 노약자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을 만큼 상식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나무 정령 말고 나무 정령의 터전을 넘보는 인간을 족쳐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나는 카만 왕족들의 ‘남쪽 숲에서 나무 정령을 몰아내 달라’는 부탁은 들어주지 않았지만, 나무 정령들이 바라는 대로 ‘남쪽 숲이 인간의 국가에 소속되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은 실현시켰다.

    종전 이후에도 혹시나 인간들이 호시탐탐 남쪽 숲을 노릴까 봐, 아예 내가 들어와 아틀리에를 지어 놓고 칩거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냥 내가 할 거 다 해 보고 이제 더 할 일도 없겠다 싶어 일방적으로 눌러앉은 거지만, 덕택에 남쪽 숲은 대현자가 사는 곳으로 인식되어 함부로 ‘거기 저희 땅인데요?’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이 사라졌다.

    그러니 길버트가 내게 잘해 주는 건 일종의 은혜 갚기인 셈이다.

    처음에는 아틀리에 앞에 나무 열매나 좋은 흙을 가져다 두는 걸로 감사를 표하더니, 몇 년 지나자 아예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와 나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내가 죽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가만두면 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내가 넝쿨 식물의 지지대로 전락하지 않게 옆에서 돌봐 준 것이다.

    길버트가 있어, 나도 외롭지 않게 칩거 생활을 이어 갔다. 내가 부르기 쉽도록 그렇게 싫어하는 인간을 흉내 내서 각자의 이름을 붙이고, 귀찮은 인간들이 찾아오면 나를 대신해 내쫓아 주기도 했다.

    “내가 있을 곳은 역시 남쪽 숲밖에 없나 봐.”

    […….]

    “한번 잘 죽어 보겠다고 순진한 어린애를 함부로 거두면 안 됐던 건데.”

    내 말을 잠자코 듣던 길버트의 가지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구체적인 상황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같이 지내 온 세월이 있어, 길버트는 내 심란함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유안.]

    “왜.”

    [나도 언젠가는 시들어.]

    “…….”

    [남쪽 숲도 너에게 영원히 호의적이진 않겠지. 이 아틀리에를 봐. 네가 떠난 뒤부터 관리가 안 돼서 온실처럼 변했잖아.]

    나는 누운 채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길버트도 인간보다 오래 살 뿐, 고목이었으므로 언제 시들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였다.

    “안 죽으면 안 돼? 나무는 오래 살 수 있잖아.”

    [나무에게도 정해진 수명이 있는 법이야.]

    “나 빼고 다 뒈지네. 억울하게…….”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길래 그렇게 우울한 건지 말 안 해 줄 거야?]

    “너무 많은 문제가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안 와.”

    [아무거나 말해 봐. 아직 내가 시들려면 멀었으니, 얘기 정돈 들어 줄게.]

    역시, 그때 남쪽 숲이 아니라 카만 왕의 머리털을 태워 버린 건 정말 잘한 일이다. 내가 살면서 잘한 선택 Best 5에 들 만했다.

    “이르가 날 사랑해.”

    나는 앞뒤 설명 없이 본론만 털어놓았다. 살랑살랑 흔들리던 길버트의 가지가 뚝 멈췄다.

    [그게 문제가 돼? 인간은 원래 가족끼리 사랑하잖아.]

    “그런 사랑이 아니야, 길버트.”

    가족애였으면 지금 나도 이러고 안 있지. 날 바라보던 그 음울한 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술렁거렸다.

    “걔는 날 스승이나 부모가 아니라, 연인으로 삼고 싶은 거야. 그게 문제라고.”

    ????????????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야, 너흰 내가 단장이 아니라 단장 대리라고 우습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인마. 나가서 연무장 20바퀴씩 뛰고 와라. 제일 늦게 들어오는 놈은 엎드려뻗쳐 한 시간 추가다.”

    이졸데는 검집으로 미적미적 일어나는 단원 하나의 등을 팡 쳤다. 쉬라고 준 휴가에 나가서 술 마시고 싸움판을 벌인 용병들을 혼내는 중이었으므로 등을 내려치는 손길에 자비가 없었다.

    아악, 하고 연무장을 향해 내달리는 단원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이졸데가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인 트리스탄이 갑자기 ‘나 아무래도 제국 가서 기사 단장 될 거 같아’라는 허황된 소리와 함께 카만을 떠난 게 벌써 12년째였다.

    처음엔 저놈 저거 옆에 한네만이 붙어 있는 데도 사기를 당해서 어디 이상한 데 따라가나 싶었는데, 트리스탄은 정말로 로베인 제국의 황실 기사 단장이 돼 있었다.

    그 과정이 제법 험난하긴 했지만, 어쨌든 개천에서 난 드래곤이 된 트리스탄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뿌듯하긴 했다. 잘 길들인 남편은 두둑한 월급봉투도 매달 비는 돈 없이 전부 이졸데에게 부쳤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점점 규모가 커지는 붉은 매 용병단을 이졸데가 ‘단장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관리하는 게 나날이 어려워진다는 점이었다.

    트리스탄이 종종 얼굴을 비추러 몇 주씩 돌아오긴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졸데는 이럴 거면 트리스탄이 제게 단장직을 넘겼으면 했다.

    대리라서 서류 결재도 두 번 해야 하고, 이게 무슨 번거로운 일이란 말인가. 부부는 일심동체라면 트리스탄의 직위도 이졸데 거나 다름없었다.

    다음에 남편이 오면 바로 달달 볶아 용병단을 제 명의로 바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헉헉거리며 연무장을 뛰던 용병 단원 하나가 이졸데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이졸데 님! 편지 와 있는데요?”

    “오면 온 거지, 뜀박질은 왜 멈춰? 마저 뛰어.”

    “아니, 그게…… 단장님이 보내신 건데요? 그것도 사흘 전에요.”

    연무장 뛰다, 구석에 떨어져 있는 게 뭔가 싶어 주워 봤다는 단원이 편지를 높이 들어 보이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저 그럼, 마저…… 뛰겠습니다.”

    “아니다. 너 그거 들고 거기 가만있어.”

    “네?”

    “우리 자기 편지, 네가 먼저 보면 죽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