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현자는 죽고 싶어-73화 (73/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73화

남쪽 숲에 결계를 쳐 둔 이유는 날 찾아오는 불청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인간을 싫어하는 나무 정령들을 위해, 평범한 인간이 숲에 못 들어오게끔 조치해 놓은 거기도 했다. 막상 인간인 내가 남쪽 숲 한가운데에 아틀리에 짓고 살았으니, 나무 정령 입장에서는 ‘너도 같이 나가’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마법 못 쓰니까 불편해 죽겠네.”

날이 어두워져, 한네만이 냅다 떨어트려 놓은 숲 근처 어딘가에서 대충 누워 하룻밤을 보냈다. 안 먹고 안 자도 죽지는 않지만, 정말 죽지만 않을 뿐 몸이 힘든 건 똑같았다.

물론, 음식 구하는 건 귀찮아서 그냥 굶었다. 이 근방에 열린 나무 열매를 허락도 없이 따 먹었다간 안 그래도 날 싫어하는 데인한테 꼬투리를 잡힐 게 분명했다. 아무 걱정 없이 숲에서 잘살고 있는 짐승 잡아먹기도 싫었고.

나 하나 굶으면 동식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데, 내 배 채우겠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기도 좀 그랬다. 그거 안 먹어도 난 안 뒈지는데.

사실 이건 그냥 그럴듯한 명분이고, 너무 귀찮았다.

혼자 살 때는 길버트가 도와주긴 했어도 기초적인 생활은 다 스스로 했었는데. 이르커스가 열두 살 때까지만 해도 내 식사뿐만 아니라, 남의 식사도 챙겨 주는 성실한 생활을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간 황궁에서 호의호식하고 지낸 탓인지 스스로 뭘 해 먹어야겠다는 결심이 쉽게 서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은 몸이 편하면 안 된다니까. 남이 해 주는 밥 받아먹으면서 지냈더니, 직접 뭘 하기가 살기보다 싫었다.

내내 식사를 걸러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휘적휘적 걸어, 남쪽 숲의 입구를 찾은 건 좋았다. 아무 생각 없이 숲 안으로 들어가려다 내가 친 결계에 내가 튕겨 나오기 전까진.

과거, 황궁 마법사씩이나 돼서 이 결계 하나 바로 해제 못 한다고 내가 엄청 뭐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치스럽다……. 이젠 나도 내가 쳐 놓은 결계를 해제할 수 없었다.

나는 좀 절망스러워졌다. 마법 못 쓰는 대현자가 어떻게 대현자냐. 앞에 ‘대’ 압수해.

공복으로 숲 주위를 헤맨 탓에 머리는 어지럽고, 몸에 힘은 안 들어가는데, 기껏 발품 팔아 찾아낸 숲 입구부터 입장을 거절당하다니.

내가 결계 근처로 접근했으니, 나무 정령 중 누구라도 내 기운을 감지하고 마중 나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물푸레나무 정령, 데인이 마법 능력이 사라진 나를 보고 엄청나게 깐족거릴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애먼 분노가 이제 세상에 몇 없을 (전)카만 왕족들을 향했다. 이 자식들…… 너희 때문에 내가 이게 다 무슨 고생이냐.

어느 정도 결계 앞에 정승처럼 서서 기다리다 보니, 내 예상대로 나무 정령들이 꾸물거리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나무 정령이 제일 먼저 뛰어와 내가 누군지 확인하더니, 이내 다른 나무 정령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기왕이면 길버트를 데리고 와 주지.

하필이면 데인을 데려왔다. 나는 어린나무 정령을 향해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야…… 어른 데려올 거면 잘 좀 골라 와.

하지만 이해 못 할 일은 또 아니었다.

저 어린나무 정령한테는 한때 여기 살던 인간이 몇 년 만에 돌아와서 들어오지도 않고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거니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제일 호전적이고 ‘인간 죽어!’를 외치는 데인을 데려와, 자기 안전을 보장하는 게 먼저겠지.

“오랜만이다.”

[뭐야, 진짜 대현자잖아. 누가 사칭이라도 한 줄 알았더니.]

“날 어떻게 사칭해. 검은색으로 머리 색이랑 눈 색 바꾸기 싫어서 웬만하면 사칭 못 할걸.”

[그렇겠지. 인간은 고작 색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족속들이니까.]

시니컬 한 데인의 말도 오랜만에 들으니 참 정감 있었다.

“결계, 안쪽에서 좀 해제해 봐봐. 나 좀 들어가게.”

[네가 직접 해제하고 들어오면 되잖아.]

“내가 직접 못해서 너한테 부탁한다는 생각은 안 드니?”

[네가 친 걸 왜 해제 못 하는데?]

내가 데인의 시니컬 함에 정감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진짜 웬만하면 데인에게 내 마법 능력의 부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숲 안으로 들어가려면 내 자존심을 버릴 필요가 있었다.

최대한 간결하게 말을 골랐다. 장황하게 설명해 봐야 데인은 제대로 듣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카만 왕족들과의 마법 계약을 어겨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만 딱 골라 듣겠지.

데인은 내 세 줄 요약을 듣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이내 진짜냐고 두 번 정도 더 되물었다. 속고만 살았는지 내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대현자인데 마법을 못 쓰게 됐다고?]

“그래. 그러니까, 좀 들여보내 줘. 다리 아프다고.”

[대현자인데?]

“그만 놀려라.”

오늘부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나무는 물푸레나무다.

나는 입으로 추정되는 나무 홈을 쩍 벌리고 크게 웃는 데인을 노려보았다. 데인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껄껄 웃더니, 다른 나무 정령들까지 다 들으라는 듯 [대현자인데, 마법을 못 쓴대!] 하고 소리쳤다. 얄밉기로는 이 자식도 앙헬 못지않았다.

내가 이를 박박 갈고 있자, 저 멀리서 느릿느릿 다가온 길버트가 가지를 들어 데인의 뒤통수를 갈겼다.

[유안한테 너무 그러지 마.]

[넌 왜 매번 저 인간 편만 들어?]

[그야, 유안은 내 친구니까.]

친구? 역시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최고다. 내가 살다 살다 나무 정령한테 친구 소리도 들어 보고.

나는 나 대신 데인의 뒤통수를 갈기고 입구에 쳐진 결계를 해제하기 시작하는 길버트를 보며 크게 감동 받았다.

길버트한테 썩 잘해 준 기억은 없는데, 길버트가 인간인 나를 ‘친구’로 여겨 준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별것도 아닌데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 내렸다.

남쪽 숲은 내게 친정집이나 다름없었다. 고향은 로베인 황궁 정원 분수대지만, 따지자면 아틀리에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까.

남쪽 숲을 친정집이라고 생각한다면 길버트는 친정 부모님에 가까웠고, 데인은 아직도 결혼 안 한 얄미운 남동생 같았다.

[물론, 유안이 그렇게 거들먹거렸으면서 이제 와 자기가 친 결계조차 혼자 못 푸는 건 조금 웃길 수 있다고 생각해.]

“야, 너까지…….”

[마법 못 쓰는 상태로는 나무 정령이 떼로 달려들면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뭘 믿고 이곳에 돌아왔는지도 좀 궁금하고.]

길버트를 향한 내 감동은 유감스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길버트의 입에서 감동 파괴 발언이 끊임없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어쩌다 길바닥에서 노숙하다 온 꼴로 돌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노숙하다 온 건 맞지만, 엉망으로 살아도 잔소리 한번 안 하던 길버트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지금 내 꼴이 상당히 초췌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길버트 덕에 숲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친정집 방문 한번 참 힘들다.

본능적으로 마법을 써서 숲에 들어왔던 이르커스나, 남들이 치고 빠질 때 타이밍을 잘 봐서 기어들어 왔던 에델라이드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본능적으로 발동되는 마법도 없고, 적절하게 결계가 열리는 타이밍을 잡지도 못했는데.

[잘 돌아왔어, 유안.]

길버트의 입에서 형식적인 인사가 흘러나왔다. 잘 돌아왔다는 그 말이 공기 중에 웅웅 울렸다.

나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내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

길버트와 나는 카만이 남쪽 숲에 대한 소유권 전쟁을 벌였던 시점에 처음 만났다.

당시 모든 나무 정령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나무 정령들은 굳이 서로를 지칭해서 부르지 않았다. 한데 모여 살긴 했지만, 인간처럼 무리를 형성하거나 사회를 이루진 않았으니까.

각자 터전을 잡고, 뿔뿔이 흩어져 살던 나무 정령들을 한데 모이게 해 준 건 단연코 인간들이었다. 잘살고 있던 동네에 갑자기 ‘이 숲, 이제부터 저희 거예요’라고 말하는 인간이 나타나면 아무리 나무 정령이라고 할지라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카만의 남쪽 숲 소유권 주장에 제국이 뒤집혀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했다면, 가만히 잘살고 있던 나무 정령들 입장에서는 ‘쟤네 왜 싸움? 애초에 여기 우리 건데…….’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만은 숲의 본 거주자들인 나무 정령을 남쪽 숲 한구석으로 몰아내려고 했다. 영토 분쟁에 실 거주자가 끼어들면, 아무리 카만이 거기 조상 대대로 우리 거였다고 엄살을 피워 봤자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나무 정령 덕에 나오는 질 좋은 흙과 수많은 자원 때문에 전쟁하는 중이면서, 그 생산 주체인 나무 정령을 내쫓을 생각을 했다는 게 참 어이가 없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 테지만, 당시 나는 카만 왕족들로부터 나무 정령들을 몰아내 달라는 소리를 전해 듣고 ‘이 자식들 제정신인가?’라고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벼룩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었다.

나는 카만 왕족들을 붙잡아 두고 역사 교육이라도 다시 시켜 주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다. 뭘 알아듣는 인간이어야 설교를 하지. 승리와 욕심에 눈먼 인간에게는 무슨 말을 하든 소용이 없었다. 자기 듣고 싶은 소리만 딱 골라 듣는 사람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 당시의 내 목적은 노약자들이 잔뜩 죽어 나가는 전쟁을 멈추는 거였지, 남쪽 숲을 지키는 게 아니었다. 실상 마법 펑펑 쓸 수 있고, 죽지도 않는 내 입장에서는 남쪽 숲에서 자원이 나오든 말든 알 바도 아니었다.

설렁설렁 남쪽 숲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날 죽이겠다고 제일 전면에 서 있던 게 바로 길버트였다.

당시에는 이름이 없어서 그냥 떡갈나무 정령1에 불과했지만, 그 시절의 길버트는 데인만큼이나 호전적이었다. 길버트도 젊었으니까.

하긴, 인간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 숲 이제 우리 거라고 쳐들어오는 데 차분한 성질을 유지하기도 쉽진 않았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