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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72화 (72/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72화

    이게 얼마만의 바깥 공기냐.

    남쪽 숲에서 나무 정령들과 나는 자연인이다, 상태로 살다 황궁에 처박히고 마도구에 봉인돼 있느라고 그간 너무 삭막한 시간을 보냈다.

    깨어난 뒤에도 내가 방만 나서면 기사들이 막아서고, 창문 주위를 기웃거리기만 해도 마녀들이 달라붙는 통에 이동 가능 범위가 너무 한정적이었다. 마법을 못 쓰는 게 이렇게 불편하다니. 낙뢰 한 방이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던 시절이 그리웠다.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결국 ‘오래 살고 싶다’는 소리만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한네만을 끌어들였다.

    한네만은 내가 적어 준 수식을 울며 겨자 먹기로 풀면서도 몇 번이고 내게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한네만과 나의 독대가 길어지면 마녀들이 기웃거릴 게 뻔했으므로, 나는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한네만의 입을 틀어막고 시간 없으니 빨리 계산이나 하라고 강요했다.

    돌이켜 보니 나는 정말 최악이구나. 새삼 내 인성에 감탄이 나왔다. 한네만에게 개미 눈물만큼 미안해질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한네만도 생전 처음으로 자기가 아니라 타인을 특정 좌표로 단번에 이동시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따지자면 얻어 가는 게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고의 인내 끝에 석사 학위를 얻은 대학원생만큼의 성취는 있었겠지.

    평균 수준의 마법사들보다 조금 더 나은 실력을 가진 한네만에게 나나 이르커스쯤 돼야 쉽게 해낼 만한 마법을 성심성의껏 가르쳐 준 것만으로 내가 할 도리는 다했다고 본다. 마탑 놈들…… 아니지, (전)마탑 놈들은 그거 하나 배우겠다고 남쪽 숲으로 와서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못 배워 갔었는데.

    나는 제법 꼰대 같은 생각을 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동 마법을 실행하기 전에는 자기가 수식 틀려서 대현자님 잘못되면 어쩌냐고 중압감에 파들파들 떨더니, 한네만은 실수 없이 이동 마법을 성공시켰다. 12년간 허투루 황궁 마법사 생활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좌표 설정은 잘못했군…….

    하나를 알려 주면 백을 알던 이르커스 같은 천재는 역시 세상에 쉽게 태어나지 않는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 왜 그렇게 항상 심란한 표정이었는지 이해가 됐다. 이 녀석, 하면 잘할 수 있는 친구긴 한데 재능에 한계가 있잖아.

    남쪽 숲으로 정확한 좌표를 찍어 줬는데, 남쪽 숲은커녕 내가 그 입구에 쳐 뒀던 결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근방이긴 한 것 같았으나, 숲이라는 지형 특성상 사위가 어두워지자 시야에 들어오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폐부를 가득 채우는 나무 냄새와 숲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하루 정도는 노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길바닥에서 잔다고 죽지는 않을 테니까.

    ????????????

    “결국 도망쳤어.”

    “그럴 것 같더라.”

    이르커스는 유안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도 침착했다. 정말 그럴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거, 그 대현자 늙질 않아서 그런가,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12년이 뭐야. 걘 120년이 지나도 똑같을걸. 우리가 다 늙어 죽은 다음에도 똑같을 거야.”

    “이르, 너도 다시 생각해 봐라. 대현자가 계약 없던 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며.”

    트리스탄과 사밀라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내내 조용히 있는 이르커스가 신경 쓰였는지, 트리스탄이 아예 이르커스 쪽으로 몸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머리에 희끗한 새치가 올라오기 시작한 트리스탄은 외관만 나이를 먹었을 뿐, 성격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눈치가 없었고 깊이 생각하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월이라는 건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체내에 축적되기 마련이다. 트리스탄은 이다음 답을 듣지 않아도 이르커스가 어떻게 반응할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계약을 없던 일로 만들고 나면 유안을 자기 옆에 묶어 둘 확실한 명분이 없어진다고 하겠지.

    “그렇게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치워 버리는 건 안 돼.”

    “왜. 대현자가 그 계약 없으면 널 떠날까 봐?”

    “아니.”

    하지만, 이르커스 입에서 나온 대답은 트리스탄의 예상과 달랐다.

    트리스탄은 아직도 제 검술 제자의 심리를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한네만이 옆에 있었다면 ‘그냥 추측이라는 걸 할 생각 마세요’라고 한소리 했을 게 뻔했다.

    “난 유안이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손에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

    “나랑 같은 핏줄을 타고난 누군가가 유안을 죽이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데.”

    “……야, 나는 역시 너랑 대현자가 운명적 사랑보단 미친 악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트리스탄이 대놓고 혀를 찼다.

    한 제국의 황제 앞에서도 여전히 격의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르커스는 굳이 그런 트리스탄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기사 단장 시켜 준다는 소리에 혹해 가지고 여기까지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 소리, 12년이나 하면 안 질려?”

    “매해 새로워.”

    기사 단장이라는 직위를 얻은 뒤에도 트리스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르커스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도 한결같은 건 대현자와 마녀들을 제외하면 트리스탄이 유일했다.

    이르커스는 트리스탄을 믿기 때문에 붉은 매 용병단을 믿었다.

    한네만은 유안의 탈출을 도왔지만, 유안이 시키는 대로 이동 마법을 실행하기 전에 이르커스의 부탁을 먼저 들어줬다. 현재 유안에게는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한네만은 그저 그런 마법사였지만, 마나를 운용해도 크게 흐름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법사치고는 은밀 행동에 일가견이 있었다. 다른 마법과 함께 추적 마법을 사용하면 웬만해선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선천적으로 한네만은 제 마나 운용의 강점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애초에 동생인 에이사와 함께 타고난 특성부터가 마법사답지 않게 은밀했으니까.

    “한네만한테 일부러 좌표를 틀리라고 했어.”

    “대현자가 그걸 눈치 못 챌까?”

    “아마 일부러라고 생각 못 할걸. 애초에 한네만이 자길 속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유안은 생각보다 사람을 쉽게 믿었고, 오만하게 구는 인간치곤 허점이 너무 많았다.

    죽질 않으니 수틀리면 일단 몸으로 부딪쳐 보는 것도 유안의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이르커스는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게 된 유안이 별다른 위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길바닥에서 노숙을 결심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카만에 있는 당신 부인한테 은근히 말 좀 흘려 줘. 대현자가 깨어났고, 남쪽 숲으로 도망쳤다.”

    “이졸데에게?”

    “그래. 에이사한테도 한네만을 통해 흘려 놨으니, 조만간 에델라이드도 대현자가 남쪽 숲에 있다는 걸 알게 되겠지.”

    이르커스가 한네만에게 일부러 이동 좌표를 틀리라고 말한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유안이 봉인에서 풀렸다는 걸 에델라이드가 ‘스스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정보 길드인 나이트 펠로우 출신인 에델라이드는 발 빠르게 정보를 수집하면서도 그 정보의 출처가 어딘지를 늘 면밀하게 따졌다.

    “내가 직접 알려 주면 무슨 꿍꿍이냐고 생각할 거거든. 우린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서.”

    “각국의 군주면 좀 친하게 지내지 그래.”

    트리스탄의 말에 이르커스가 작게 웃었다. 에델라이드는 ‘군주’라는 표현에 치를 떨 인간이었다.

    유안이 도와줬던 내전 이후로 카만은 왕정을 폐지했다. 귀족들의 엄청난 반발이 잇따랐지만, 에델라이드는 스스로를 왕이 아닌 ‘지도자’라고 칭했다.

    앙헬이 로베인 제국에 쳐들어와 마탑전이 시작됐을 때, 몇 년 만에 드디어 제대로 정치적 기반을 다진 에델라이드 쪽에서 먼저 지원을 보냈다.

    에델라이드는 지원을 보내면서도 이르커스를 향해 ‘너 생각해서 보내는 게 아니라, 내가 대현자한테 빚진 게 있어서 도와주는 거다’라고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 국가 단위로 주고 받은 서신이니만큼 무척 정중하고 세련된 표현이 적혀 있었지만, 해석해 보자면 그냥 ‘대현자 때문에 도와준다’였다.

    이르커스는 여전히 다혈질에 불같은 성격이긴 하지만, 신의와 의리에 죽고 사는 에델라이드를 떠올렸다.

    유안이 12년 만에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에델라이드는 개인적으로 유안을 찾아갈 것이다. 대현자가 황궁에서 탈출해서 남쪽 숲에 혼자 있다면, 에델라이드로서는 그보다 더 대현자를 찾아가기 좋은 시기가 없으니까.

    “유안이 남쪽 숲에 틀어박히면 빼 오기가 어려워.”

    “나무 정령들 때문에?”

    “그래. 나무 정령들이 인간을 싫어하는 것도 문제지만…… 길버트를 해칠 수는 없거든. 그렇다고 유안이 제 발로 남쪽 숲에서 나와 줄 것 같지도 않고.”

    트리스탄은 교묘하게 유안의 도주 경로를 설계하는 이르커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설계해 둘 거면 유안이 왜 도망치게 뒀어? 마녀들한테 부탁했으면 그냥 잡아 둘 수 있었잖아.”

    “억지로 계약을 파기해 버리면 미움 사잖아.”

    이르커스가 한숨을 쉬며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억지로 마법 계약을 파기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자신이 죽거나 영생을 살게 되는 건 이르커스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안이 제게 크게 실망하거나 강제성을 가진 계약 파기 때문에 영영 도망칠 결심을 하는 건 곤란했다.

    “유안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게끔…… 그렇게 만들어 놔야 해.”

    손 틈 사이로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유안을 틀어쥐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한유안은 관계에 한해서는 겁쟁이에 보기 보다 마음도 약했다. 이르커스에겐 인간성을 버리라고 해 놓고, 역으로 자기가 인간성이 돌아와 이르커스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조차 스스로를 내던졌다.

    무르기 짝이 없는 유안에게 답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르커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더 기다릴 수 있었다.

    열두 살부터 스물아홉 살인 지금까지도 기다렸으니, 더 못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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