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71화
마법 계약을 없던 일로 해 주겠다고 해도 이르커스는 묵묵부답이었다. 물론 쌍수 들고 좋다고 환영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날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당연히 싫다 그러지. 내가 죽이지 않아서 내 자손 대대로 나 좀 죽여 달라고 찾아오는 나의 스승?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이르커스가 대체 왜 그럴까…… 하고 한탄하자,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사밀라와 번갈아 가며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쥬리아가 냉담하게 받아쳤다.
저 말을 들으니 정신이 확 들었다. 내가 생각해 봐도 자손 대대로 나 좀 죽여 달라고 찾아오는 대현자는 확실히 무서웠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이르커스 입장에선 속 뒤집히는 게 당연하지. 내가 안 죽여 주겠다니까 남의 손에 죽겠다는 연모 상대? 사밀라였으면 바로 동반 자살하자고 난리 쳤어.”
“그건 사밀라가 사랑에 미쳐서 그렇고.”
“이르커스랑 사밀라한테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네.”
쥬리아는 정말 맞는 소리를 잘했다. 뼈 맞는 소리를…….
사밀라가 까르르 웃으면서 헛소리하는 척 정곡을 찌른다면, 쥬리아는 그냥 필터 하나 없이 맞는 말로 사람 마음을 후벼 팠다.
“그러게, 내가 황제 하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지 말지.”
“나도 지난 과거를 후회 중이니까 자꾸 들추지 마.”
“인류 멸망,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내가 전쟁 일으키고 다닐 때, 너는 이미 죽은 사람일 텐데.”
“…….”
“사밀라나 나나 너랑 이르커스의 지독한 삽질 때문에 수명 반 토막 났으니까 책임져.”
말로 사람을 패는 대회가 있다면 쥬리아는 적어도 금상은 받을 거다. 나는 할 말이 없어져서 슬그머니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쥬리아가 아무리 인간을 싫어하고, 살아 있는 건 사밀라를 제외하면 전부 끔찍하게 생각하더라도, 드물게 죽여 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저 손을 잡아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쥬리아 말대로 인류가 멸망하든 말든 그건 내 죽음 이후의 일이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게 또…… 나 하나 죽자고 인류 멸망을 시키자니 양심에 찔렸다.
이게 걸리고, 저게 걸리고, 이래서 못 죽고, 저래서 못 죽고…….
돌이켜 보면 나는 죽음에 대한 진정성이 좀 부족해 보였다. 죽음도 내 진정성이 모자라서 아직 허락 못 해 준다고 버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쥬리아.”
“왜.”
“나, 도망칠까?”
“어디로?”
“어디든.”
쥬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자기랑 사밀라 귀찮아지지 않도록 가만히 있다가, 순순히 계약 파기나 당하라는 잔혹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밀라는 그렇다 쳐도 쥬리아는 내 편일 줄 알았는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체감할 줄은 몰랐다. 요즘 시대엔 신빙성 없는 소리 된 거 아니었어? 머나먼 친척 한 명 없이 이세계 트립당한 사람은 억울해서 살 수가 없었다.
“너 지금 이르커스가 너한테 보이는 애정이 감당 안 돼서 애 거둬 놓고 도망치려는 거잖아. 진짜 최악의 행동이라고 생각해.”
“……그 정도야?”
“응.”
하지만 여기 가만히 있다가 계약 파기당하면 이르커스가 죽거나 영생 살지도 모르는데?
12년이 지났지만, 마법 능력이 돌아오지 않는 내 상태를 보면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절대 안 죽을 것 같던 앙헬이 마법 계약 때문에 죽은 것만 봐도 왜 마법사들이 마법 계약에 치를 떠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얌전히 계약 파기를 당하라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슨 결과가 나올 줄 알고.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결과는 이르커스가 내 눈앞에서 손쓸 새도 없이 죽거나 나와 같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 둘 사이에 껴서 마녀 생 말년에 고생하고 있는 사밀라랑 쥬리아한테는 미안하지만, 최악의 스승이 되든 말든 그냥 튀고 싶었다.
“이르커스는 내가 죽는 게 싫겠지만, 나는 이르커스가 영생 사는 게 더 싫어.”
“왜?”
“왜냐니? 영생 살아 보니 끔찍하기 짝이 없는데, 이르가 이 비참한 불멸자의 삶을 산다고 생각하면 비명 지를 것 같다고.”
“그럼 비명 질러. 그리고 뭐 착각하나 본데, 꼭 불멸자가 되리란 보장도 없어. 그냥 즉사할 수도 있잖아.”
“으아악.”
나는 쥬리아가 시킨 대로 작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지도 않았는데 바로 시끄럽다는 핀잔이 되돌아왔다.
“이르커스는 영생을 살게 돼도 너처럼 비참해하지 않을걸.”
혼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으려니 쥬리아가 보던 책을 집어 던지고 내게 말을 툭 내뱉었다. 쥬리아 성격에 날 위로해 주려는 건 아닐 테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넌 혼자였지만 이르커스가 영생을 살게 되면 걔한테는 네가 있잖아. 걔는 너와의 단란한 영생이라고 하면 오히려 좋아할걸. 사밀라만큼 또라이니까.”
“…….”
“좀 더 고민해 봐. 슬프고 외로워하는 애 버리고 혼자서 영생을 살 건지, 아니면 덜 외롭게 둘이서 영생을 살 건지.”
“내가 드디어 죽는다는 선택지는 없어?”
“그 개소리, 이르커스한테도 했니? 그럼 그냥 죽든가.”
나는 다른 책을 집어, 내게 던지려는 쥬리아를 향해 바로 항복 선언을 했다. 맞아 주기엔 쥬리아는 너무 머리를 잘 맞혔다.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금세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나는 누운 채로 쥬리아가 한 말들을 곱씹어 봤다.
만약 계약 파기 페널티 때문에 이르커스가 나와 같은 영생 저주에 걸린다면, 나는 드디어 대륙에 하나뿐인 불멸자가 아니게 된다.
조금쯤은 덜 외로워질 거라는 말이 마음을 흔들었다. 만약 쥬리아가 직접적으로 툭툭 말하는 게 아니라, 옥장판 파는 판매원처럼 ‘고객님, 이건 다시 없을 기회예요!’ 이랬더라면 홀라당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민을 거듭할수록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시작도 전에 끝을 생각하는 게 얼마나 나쁜 버릇인지 스스로도 알지만, 불멸자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 아는 입장에서 덜 외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르커스를 같은 처지로 전락시킬 수는 없었다.
“……모르겠다. 그냥 최악의 스승이 될래.”
내 중얼거림에 쥬리아는 이렇다 저렇다 대꾸하지 않았다.
쥬리아의 손에 죽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나 편하게 죽자고 인류 멸망시키는 게 누워서 이런 고민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을 수도 있었는데.
????????????
“저 불로불사를 원하지는 않지만, 일단 오래 살고 싶거든요…….”
“그래. 그래서 내가 네 목숨 살려 줬잖아.”
“…….”
“속으로 ‘대현자 새끼, 이걸로 언제까지 부려 먹을 거야?’라고 생각했지?”
“……아닌데요?”
“답이 늦다.”
한네만은 조금만 더 괴롭히면 울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들들 볶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뒤로 내가 편하게 갈굴 수 있는 사람이 한네만밖에 없었으므로 별수 없었다.
“붉은 매 용병단은 아직 사기 안 당했니?”
“저희 용병단이 왜 사기를 당해요.”
“네가 황궁 마법사로 일하게 되면 트리스탄이나 로버트 같은 애들은 무조건 사기당할 줄 알았는데.”
“완전 번창했거든요? 과거의 조그마한 용병단이 아니라고요.”
지금까지는 나한테 제대로 된 말대답 한번 못하더니, 자기 가족이나 다름없는 붉은 매 용병단 얘기가 나오자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한네만이 살았으니 이때까지 잘 굴러가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번창했다는 건 또 의외였다. 트리스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놈 아래에서 어떻게 조직이 번창할 수 있단 말인가.
“단장님도 궁에 계셔서…… 비공식적으로는 이졸데 님이 운영하고 계세요.”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결혼을 잘하면 인생이 술술 풀리는구나. 카만에서 사자 같은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던 트리스탄의 말이 떠올랐다.
트리스탄이 12년간 이르커스의 곁을 지키고 있다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12년 동안 원거리 부부 생활을 해 왔다는 소리가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부 금실이 좋다니. 이름이 운명을 결정 짓는 시대는 지나갔나 보다.
“그래서 빨리 말해. 해 줄 거야?”
“제가 대현자님 데리고 나간 거 알면 저, 황궁에서 잘려요.”
“잘려도 돌아갈 직장 있잖아. 붉은 매 용병단.”
“급여가 다르다고요.”
나는 잠깐 멈칫했다. 나의 한국인 자아가 ‘급여는 중요하지…….’ 하고 브레이크를 밟았기 때문이었다.
“에이사가 지금 카만에서 호의호식하고 사는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니.”
“……에이사가 잘한 덕?”
“아니지, 내 덕이지. 너 산 것도 내 덕, 네 동생 출세한 것도 내 덕. 그런데, 넌 지금 궁에서 잘릴 게 무서워서 날 물심양면으로 돕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야?”
“대현자님은 진짜 최악이에요…….”
“칭찬 고맙다.”
한네만은 낯빛이 죽은 얼굴로 중간에 걸려도 모른다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나는 지체 없이 한네만의 마법을 이용해 궁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을 끌어 봐야 쥬리아와 사밀라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로 이르커스와의 마법 계약만 강제 파기당할 게 뻔했다.
자고로 사과와 도망은 결심했을 때 바로 저질러야 한다.
나는 울상인 한네만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줬다. 돈, 이제껏 많이 벌었으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내 말에도 한네만의 얼굴은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