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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70화 (70/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70화

    다음 보기 중 12년 만에 마주한 제자에게 해도 될 말을 고르시오.

    1. 역시 내가 없어도 혼자서 잘해 내는구나.

    2. 결혼은 왜 안 했니? 후사를 봐야 후계 문제로 골치 아파질 일이 없어진다.

    3. 황제가 되었으니, 계약에 따라서 날 좀 죽여 줘야겠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세 가지 보기를 빠르게 지웠다. 이거 몇 점짜리 문제야? 정답이 없는데. 출제를 잘못한 게 분명했다.

    아무리 나라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마주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르커스한테 1번부터 3번까지 차례대로 질문을 늘어놓을 만큼 무신경하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적절한 4번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겠지. 이래서 수능 출제 위원들이 그토록 고통 받는 거구나.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1번부터 3번까지 중에 그나마 나은 답안을 고르자면 역시 1번이었다. 2번 3번은 너무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었다. 뭔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청자로 하여금 해석할 여지를 주는 1번이야말로 그나마 정답에 근접해 보였다.

    “내가 없어도 혼자서 잘해 냈던데.”

    “…….”

    하지만 이르커스는 내가 고심해서 고른 답안에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밖에 할 말 없어?’라는 표정으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명색에 대현자인데 마법 못 쓰는 것도 억울해 죽겠건만, 제자가 원하는 답이 뭔지도 모르겠다. 모든 걸 다 아는 대현자라고 떵떵거리고 다녔던 과거의 업보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지금…… 이르커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표정 갈무리를 잘하던 애가 아닌데.

    “황제가 되었지?”

    나는 결국 이르커스와 나 사이에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1번에 이어 3번까지 마저 이어 말하기로 했다. 3번까지 말하고 이르커스가 묵묵부답이면 2번까지 저지를 셈이었다.

    이건 나도 불가항력이었다. 12년 만에 만난 제자와 어색하지 않게 대화할 수 있는 법 같은 건 수능에 안 나왔단 말이다. 400년 살면서 온갖 걸 다 새로 배웠지만, 새로 배운 내용 중에도 저런 건 없었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한 계약대로…….”

    “그 계약은 파기할 거야.”

    날 죽여 달라는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이르커스가 입을 열었다. 말 끊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선이 굵어진 얼굴은 열일곱 살 때와 달리, 앳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 지금 이르커스와 내가 나란히 선다면 누가 봐도 내가 연하로 보일 게 뻔했다.

    어린 시절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분명 내가 아는 이르커스인데, 꼭 전혀 모르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나를 볼 때면 이르커스는 최대한 눈을 예쁘게 뜨곤 했다. 트리스탄은 그걸 보고 가증스럽다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르커스 쪽이 더 새삼스러웠다. 내 귀엽고, 착하고, 기특하던 제자는 어디 가고 냉담한 표정의 황제만 내 앞에 앉아 있단 말인가.

    “파기? 누구 마음대로.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계약 파기는 안 돼.”

    “왜? 내가 죽거나 당신처럼 영생을 살게 될까 봐 두려워?”

    “너…….”

    “난 내가 당신을 죽여야만 하는 게 더 두려운데.”

    이르커스가 어려서부터 날 죽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스승을 죽이고 싶어 하는 제자는 많지 않을 테니까.

    내가 별로 좋은 스승은 아니었지만, 죽일 만한 짓을 한 적도 없으니 이르커스 입장에서는 자기를 거둬 준 첫 스승을 계약에 따라 제 손으로 죽여야만 했다.

    아무리 봐도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일이라는 데엔 나도 동의한다. 나도 그래서 마음 약해질까 봐, 냅다 이르커스를 주워 와선 마법 계약부터 해 놨던 것 아닌가.

    예카리나의 다른 후손들이 내 부탁을 거절했을 때처럼 순순히 물러서지 않기 위해서 걸어 놨던 마법 계약이 이렇게 내 뒤통수를 후려갈길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막 400살이 됐던 나는 진짜 정말 꼭 죽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사실, 지금도 진짜 정말 꼭 죽고 싶기는 했다. 12년 만에 일어나서 만난 사밀라와 한네만, 이르커스까지 나와는 다르게 나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만 더 지나면 익숙한 인간들의 노화와 죽음을 또 경험하게 될 텐데, 그 꼴 보기 전에 곱게 죽고 싶었다. 남의 죽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이쯤 되면 그만할 때가 됐다.

    하지만, 이르커스를 생각하면…… 그냥 내가 그토록 바라 왔던 죽음을 조금쯤 뒤로 미루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네가 그렇게 날 죽이고 싶지 않으면, 합의하에 계약은 없던 일로 하자.”

    절차가 좀 복잡하고, 내가 당장 마법 능력이 돌아오지 않아서 이르커스가 두 배로 고생하긴 하겠지만, 계약 당사자 간에 합의가 있다면 마법 계약을 없던 일로 할 수 있었다.

    이르커스가 기어코 마녀 둘 혹사해 가며 위험 부담을 안고 마법 계약을 파기하느니 이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예카리나의 다른 후손을 찾아서……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죽을 수 있겠지. 어쩌면 네가 후사를 남길지도 모를 일이고.”

    “…….”

    “그러고 보니, 결혼은 왜 안 했니? 황제가 스물아홉에 미혼이라니……. 진짜 기함할 일이다.”

    머리로는 방금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터진 입은 멈추지 않았다.

    이르커스는 합의하에 계약을 없던 일로 해 주겠다는 나의 인자한 발언을 듣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낌새만 봐서는 기분이 몇 배로 더러워진 것 같았다.

    “당신은 그렇게 죽고 싶어?”

    긴 침묵 끝에 이르커스가 내게 물었다.

    나는 전처럼 곧장 ‘당연한 소리를 하니?’라고 반문하지 못했다.

    음울한 보라색 눈은 이제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나는 또 말 몇 마디로 이르커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 채로.

    ????????????

    평범한 인간이던 시절……. 아니지, 나는 항상 비범한 인간이었다. 평범한 인간은 9월 모의고사 만점을 맞기 어렵잖아. 볼펜으로 허벅지 찔러 가며 밤샘 공부도 안 할 거고.

    정정해서 다시 말하겠다.

    일단 죽긴 죽는 인간이었던 시절에는 죽는 게 무서웠다.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얼마 없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때.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쯤 해서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하고 혼자 심도 있게 고민해 본 게 전부였다. 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정말 갓 태어난 거나 다름없어서 나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만일 내가 불멸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내가 거둔 이르커스에게 이렇게 상처 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르커스가 대놓고 날 좋아한다는 티를 팍팍 낼 때, 휩쓸려서 받아 줬을지도 모른다.

    같이 늙어 가고, 같이 죽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니까.

    시간 선을 함께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면, 나도 양심은 좀 찔리지만 이르커스를 속 편하게 대했을 것이다.

    “내가…… 당신한테 어떤, 살아갈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거야?”

    나는 이르커스를 위해 죽을 수는 있다. 봉인도 당해 줄 수 있고, 어디 하나 잘려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르커스를 위해 살 수는 없다.

    지금까지도 구질구질하게 예카리나를 추억하듯이 이르커스의 저 아름다운 면면을 떠올리고, 가끔은 이르커스가 나오는 악몽을 꾸며 살아가기엔 내가 너무 심약했다.

    “날 사랑한다면, 넌 날 죽여 줘야 해.”

    그리고 나처럼 심약한 인간들의 특징은 자기가 상처 받기 싫어서 남을 상처 주고 만다는 것이다.

    처음 이르커스를 거뒀을 때와 달리, 나는 이런 말들이 이르커스의 가슴을 얼마나 후벼 파는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당신이 한 번쯤은…….”

    “안 돼, 더 말하지 마.”

    이르커스의 눈만 봐도 이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 번쯤은 내 사랑에……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가슴에 얹힌 무거운 돌이 발끝으로 쿵, 떨어지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다시 마도구 안에 욱여넣어져 억지로 봉인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깊은 바닷속으로 누가 내 고개를 잡고, 억지로 처박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이르커스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그 긴 시간 동안 보답 받지도 못하고, 응해 주지도 않는 사랑을 왜 품고 사느냐고.

    예카리나의 핏줄은 전부 그런 사랑만 하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미련한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옆에 널리고 널린 좋은 사람들을 다 걷어차고 나를 붙잡고 있냐고.

    “미안해.”

    “유안, 제발…….”

    “너도 알잖니. 나는 네 손에 죽기 위해 널 거둔 거야.”

    이르커스를 사랑하면 안 된다.

    나는 머릿속으로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처럼 그 간단한 문장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온갖 고생 해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애 인생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었다.

    날 죽이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계약을 억지로 파기해서 그로 인해 페널티를 받고 죽거나 영원을 살게 되는 이르커스를 내 눈으로 지켜볼 수는 없다.

    “당신은 못 죽어.”

    자식새끼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더니.

    예카리나나 이르커스나 나보고 못 죽는다는 소리만 한다. 누가 한 핏줄 아니랄까 봐 아주 지독하다.

    문득, 사밀라가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이르커스와 죽음 중에, 당신은 뭘 선택할 거야?’

    지옥의 이지 선다형이었다. 적어도 보기 다섯 개는 주던가. 딱 두 개 주고 흑과 백으로 나눠 이거 아니면 저거 고르게 만들다니. 너무 가혹했다.

    애정인지 죽음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훌쩍 자란 제자를 앞에 두고 나는 결심했다.

    모든 선택을 유예하고, 멀리 도망쳐 버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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