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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69화 (69/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69화

“그럼 라단타는 죽었어?”

“아뇨. 도망쳤어요.”

“어디로?”

“행적이 불분명해요. 그래도 다시 돌아오긴 어려울 거예요. 전 황제를 죽인 게 라단타거든요.”

뭐만 하면 반역이다 뭐다 시비 털더니, 제일가는 패륜을 저지르고 도망쳤구나.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 와중에도 이르커스가 안 죽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제일 쓰레기 같았다.

결국 베첼 공작은 5년간의 전쟁 끝에 반역으로 몰려 사형당했고, 공작가 전체가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묶이는 바람에 황비와 황녀 역시 폐위됐다.

황비는 공작가라는 뒷배경을 잃었지만 심약하더라도 책임감은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남은 가솔들을 이끌고 베첼 공작가가 아닌 본인이 소유한 영지에 칩거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박쥐 같은 이가 넘쳐 나는 황궁이어도 한동안 라단타가 온갖 세력을 주무르고 다녔기에 폐위된 황비를 도와주는 인물들은 꽤 많은 모양이었다. 황비 개인이 인망이 좋아서 그런 걸 수도 있었고.

그리고 마리아는 황녀라는 직위가 없어지자, 오히려 좋다며 기사가 되기 위해 아카데미에 들어갔다고 했다.

기사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 비해 수학을 늦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검술에 재능이 있어 곧 졸업하게 되면 다시 기사 서임을 받고 궁으로 복귀할 모양이었다.

라단타가 큰 부상을 입고 황제를 시해한 뒤 도망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르커스가 황제로 즉위했다.

나쁘지 않은 계승이었다. 이 정도면 명분도 충분하고, 황태자 책봉 이후 황제가 되었으므로 정당성도 확실하다.

“현 황제가 즉위하는 걸로 말이 좀 많았어요.”

“아니, 왜? 다 죽이고 즉위한 것도 아니고, 아주 착하게 정상적으로 즉위했구만.”

“그…… 대현자님이 봉인당한 뒤로 대다수가 다시 라단타 쪽에 붙는 바람에 사생아를 황태자로 책봉한다고 불평불만이…….”

“인간들 진짜 레퍼토리가 변하질 않네.”

“그거 정리한다고 마탑과 전면전 일어나기 전에도 궁 내부가 시끄러웠죠. 온갖 비리 다 밝히고, 빌미 잡아서 물갈이도 좀 하고……. 그간 다들 많이 해 먹었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에킨도르 멜킨도 추방당했어요.”

진짜 한결같은 놈들이다. 이쯤이면 좀 특이한 짓을 할 법도 한데, 절대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다.

에킨도르 멜킨은 내가 봉인당하자마자 바로 라단타 쪽으로 갈아탔다. 그에 반해 에리스 멜킨은 약혼 관계를 유지하고 이르커스를 지지했다. 남매가 다른 쪽에 발을 걸치고 자리싸움을 벌인 거였다.

결국, 이르커스 쪽에 발을 걸친 에리스 멜킨이 멜킨 백작가의 최후 승리자가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줄을 잘 타야 한다.

에리스 멜킨은 이르커스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에킨도르를 국외로 추방했다. 이후 약혼을 무른 다음, 이르커스로부터 백작위보다 한 단계 높은 후작위를 수여 받았다.

“약혼 관계로는 서로 데면데면하더니, 정치적 아군이 되니까 잘 지내더라고요.”

이르커스와 에리스 멜킨에 대한 한네만의 한 줄 평은 저게 전부였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처럼 사랑은 싹트지 않았다. 나는 그 둘이 서로 갈라서는 동안, 마도구 안에서 그 후손까지 상상하고 있었는데.

“……잠깐. 그럼 이르커스, 아직도 미혼이야? 스물아홉인데? 황제가?”

“그걸로도 말이 좀 많았어요…….”

“그건 말이 많을 만해.”

베첼 공작가는 몰락했고, 라단타는 도망친 데다, 마리아가 황녀라는 직위를 잃었으면 이르커스에겐 후계자가 전혀 없었다.

“귀족들이 제발 아무하고나 결혼해서 후사 좀 봐 달라고 싹싹 빌었는데 그…… 너무 대놓고 대현자님을 언급해서요.”

“설마…….”

“네……. 대놓고 대현자님 아니면 결혼할 생각 없다고 못 박아 버려서…….”

나는 좀 기절할 것 같았다.

방금까진 ‘하하! 우리 이르커스 다 컸구나! 혼자서도 역시 잘하네!’ 하고 춤추는 말티즈 앞에서 손뼉 치는 주인처럼 뿌듯했는데, 지금은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황궁 사용인들이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걸더라.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르커스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 다시 마탑과의 전면전이 벌어진 탓에 ‘대현자와만 결혼하겠다’라는 이르커스의 망언은 흐지부지 묻혀 버렸다.

마탑과의 전면전은 앙헬 때문에 일어났다. 이르커스는 그간 마탑은 일단 방치해 둔 채 마녀들과 황궁 마법사들을 독촉해 가며 내 봉인을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한네만이 말하기로, 이르커스는 제법 이성적으로 행동하다가도 내 봉인만 관련되면 눈이 돌아서 마법사들을 아주 있는 대로 갈궜다고 했다.

“대현자님도 아시다시피, 이것저것 섞어서 마법 걸어 놓은 마도구가 진짜 다루기 번거롭거든요.”

“알지. 앙헬 걔가 다른 건 몰라도 마법 여러 개 섞는 거 진짜 잘하잖아. 비겁해 가지고.”

“마탑 놈들 다 꼴 보기 싫긴 하지만, 확실히 대단하긴 하더라고요. 저도 수식 몇 개 풀어 봤는데, 그거 풀 줄 안다고 봉인이 풀리는 건 아니라서……. 마탑 애들 동원하기 전까지는 진짜 막막했어요.”

황궁 마법사들이 지난 12년간 월급 이상의 노동을 했을 게 눈에 선해서 조금 안타까웠다. 그간 잘 놀고먹었을 텐데, 갑자기 웬 프로젝트가 떨어져서 12년간 개고생을 했겠구나.

내 봉인이 풀리고 가장 기뻐했을 사람은 장담하건대 이르커스가 아니라 그 황궁 마법사들이었을 것이다. 한네만도 날 보자마자 이제 봉인 해제 더 안 해도 된다며 기뻐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마탑전은 의외로 이르커스가 앙헬을 죽이겠다고 쳐들어간 게 아니라 앙헬이 내가 봉인당한 마도구를 회수해 가겠다고 제국으로 기어들어 와서 터진 거였다.

앙헬은 계획과 달리, 이르커스한테 자기 손만 잘리고 내 신체 일부는 전혀 얻어 가지 못한 모양이었다.

“죽을 때는 정말 노쇠한 모습으로 죽더라고요. 마탑주도 별수 없는 인간이었는지…….”

한네만이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탑이 박살 나는 동시에 마탑주로서 걸려 있는 마법 계약 때문에, 앙헬은 답지 않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내가 깨어나기 몇 달 전에 죽었다고 했으니 최근에 사망한 거였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마탑주인데도 한네만은 앙헬 얘기를 하면서 ‘안타깝다’고 표현했다.

실험에 계속 실패해서 성공적인 불로불사나 젊음 유지를 위해 적법한 실험 재료인 내가 꼭 필요했을 텐데, 그냥 잘라 가라고 했던 나와 달리 이르커스가 절대 틈을 내주지 않았을 테니 앙헬도 속이 탔을 것이다.

마탑전은 장장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전쟁이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게 아니니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럼 로베인 제국은 거의 12년이나 전란을 겪었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카만이 지원해 줘서 7년 만에 싹 정리가 되긴 했죠. 마탑이 없어진 걸로 신관들이 와서 좀 귀찮게 굴긴 했지만……. 이제 대현자님이 깨어나셨으니까 웬만한 일은 다 해결된 거나 다름없어요.”

그 대현자가 아직도 마법 못 쓰는데 해결된 거냐, 이게.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정말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한네만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12년 전에는 앳되기 짝이 없던 얼굴이 이제는 제법 성숙해졌다.

“에이사는 잘 지내?”

“그럼요. 카만에서 저보다 더 잘 먹고 잘살아요. 아, 에델라이드 님도요.”

“거기는 뭐, 잘 지내고 있다니까 다행이네.”

침대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이제 이것저것 알게 되었으니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았다.

“한네만, 너 내 탈출 좀 도와라.”

“……네?”

“이제 얘기 다 들었으니까, 황궁에서 나가려고.”

“……네에? 안 돼요!”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동 마법 아직도 1인용밖에 못 쓰니, 너?”

한네만이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상하좌우로 저었다. 나는 그런 한네만의 목덜미를 다정하게 감싸 잡았다.

“내가 너 살려 줬잖아.”

아마 한네만도 자기가 죽을 때까지 이 목숨값으로 부려 먹혀질 거라는 걸 직감했을 것이다. 구해 주기 전에도 알차게 부려 먹었던 것 같지만.

“유안.”

아직도 1인 이동 마법밖에 못 쓴다는 한네만의 멱살을 붙잡고 언제쯤 마법 실력이 늘 거냐고 짤짤 흔들려던 찰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기가 좀 멋쩍었다. 29살이 된 이르커스의 얼굴은 오래 보고 있기 어려웠다.

오래 살면서 세기의 미인이란 미인은 멀리서나마 다 구경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르커스는 과연 주인공답게 미모가 남달랐다. 저 얼굴에 대고 모진 말 하는 게 루키즘에 절어진 사회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참 쉽지 않았다.

“아직도 한네만이랑 단둘이 할 이야기가 남았나 봐.”

“아뇨? 전 이제 대현자님이랑 할 얘기 없습니다.”

“야, 너 이럴 거야?”

“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살아야죠…….”

카만에서 토끼 같은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에 한네만의 멱살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털어 내며 문 근처에 서서 나와 한네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이르커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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