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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68화 (68/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68화

“봉인당해 있는 동안 예카리나를 봤어.”

“……그거, 이르커스한테는 말하지 마.”

“안 말해. 내가 생각해도 진짜 구질구질하니까.”

“예카리나가 뭐랬는데?”

“나보고 영원히 죽지 않을 거래. 진짜 너무하지 않니? 어떻게 진짜도 아니면서 그런 저주를 퍼부을 수가 있어?”

다시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내 기억의 집합체면서 왜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안 해 주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가는 거지?

사밀라는 억울해하는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담뱃대를 가볍게 툭툭 털어 매캐한 연기를 내뱉었다.

절로 기침이 났다. 내가 인상을 쓴 채 노려보자, 사밀라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못 죽긴 할걸.”

“너까지 이러기야?”

“나라서 그러는 거지. 난 이르커스 편이잖아.”

담뱃대를 들고 있지 않은 사밀라의 손이 내 목 위로 올라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보다 사밀라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이르커스가 왜 나랑 쥬리아를 찾아왔는지 알아?”

사밀라의 손에 가슴 위쪽이 눌려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힘이 아주 장사였다. 테리즈와 에델라이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사밀라를 순수 악력으로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짐작은 하고 있어. 계약 파기를 도와달라고 했겠지.”

“그래. 마법 계약은 계약 당사자가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없으니까. 우리 보고 도와달라고 찾아왔었어.”

역시, 예카리나가 나오는 꿈은 길몽이 아니라 흉몽이 맞나 보다.

“그러지 마, 사밀라.”

저절로 애원조의 말이 튀어나왔다. 이것만큼은 정말 하지 말라고 해야 했다.

황제가 되었다면, 이르커스는 계약에 따라 날 죽여야만 한다. ‘카만의 왕족을 해할 수 없다’와 같은 수동적인 형태의 계약이 아니라, ‘황제가 되면 대현자를 죽여야 한다’의 능동적인 형태의 계약이니,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없던 계약이 될 수는 없었다.

그 말인즉 황제로 즉위한 순간부터 이르커스에게는 계약을 이행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이르커스도 내가 깨어난 뒤, 종일 같이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회복을 빌미로 내게 시간을 주고 있는 것이고.

날 죽여야 한다는 계약 조건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르커스가 마녀들의 도움을 받아 계약을 파기하려고 한다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계약을 파기하는 순간, 아주 높은 확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내 영생 저주를 공유해, 나와 같은 불멸자의 삶을 살게 될 테니까.

나는 적어도 예카리나의 다른 후손이 황제가 되기를 기다려서 재도전이라도 할 수 있지, 이르커스는 죽을 수 있는 조건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로 불멸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만큼은 진짜 막아야 했다. 앙헬 같은 미친 사이비 마탑주 새끼야 불멸을 꿈꾸는 또라이니까 영생이 주어져도 희희낙락 잘살 테지만, 이르커스는 근본적으로 앙헬이랑은 궤가 달랐다. 걘 조연이고, 우리 애는 주인공이란 말이에요.

“난 이르가 죽거나 영생을 사는 걸 원하지 않아.”

“이르커스는 당신을 죽이는 걸 원하지 않고. 그러기에 계약을 잘했어야지, 유안.”

“……제발, 사밀라. 넌 내가 원하면 마녀답지 못하게 날 죽여 준다고 약속했잖아.”

사밀라가 담뱃대를 저 멀리 치웠다. 그나마 숨쉬기가 조금 편해졌다.

비겁하게 과거의 구두 약속을 끌어 왔지만, 사밀라는 그게 언제 적 이야기냐며 웃지 않았다. 오히려 취조하듯 내게 반문했다.

“그건 네가 끝까지 죽음을 원할 때의 이야기지. 지금처럼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할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

“이르커스와 죽음 중에, 당신은 뭘 선택할 거야?”

????????????

“대현자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나를 와락 끌어안는 한네만 때문에 갈비뼈가 나가는 줄 알았다. 이 자식. 살려 뒀더니 반가움의 표시로 암살 시도를 한다.

“드디어 마도구 봉인 해제 작업도 끝이다…….”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봉인 해제 작업에 대해 작게 중얼거리는 한네만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줬다. 내가 깨어나서 기쁜 건지, 아니면 황궁 마법사 전원이 이르커스한테 시달렸다는 마도구 봉인이 드디어 풀려서 감격스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살아서 보니까 좋네. 잘 지냈니?”

“잘은 못 지냈고, 그냥 적당히 지내기는 했어요. 하아……. 지난 12년간 정말 매일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니까요.”

“왜?”

나는 한네만의 팔을 붙잡아 내 옆에 앉혔다.

사밀라는 사람 심란하게 하는 소리만 하고, 다른 황궁 사용인들은 이르커스한테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내게 말 한마디 붙이지 않았다.

이르커스를 직접 만나는 건 내가 아주 교묘하게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인에서 깨어난 지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르커스와 독대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은 사람을 안 만나서 편한데,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기사들이 막아섰다. 마법 능력이 전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사들을 밀어내고 나갈 여력이 없어서 이틀 동안 침대 생활만 했다.

혹시나 싶어 황궁 비밀 통로는 멀쩡한가 둘러봤지만, 그간 황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몇 세기 동안 잘 방치돼 있던 비밀 통로들도 죄다 막혀 있었다.

결국, 나는 정신은 깨어났으나 12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헬렐레 늘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명색에 대현자인데, 이렇게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거냐고.

하지만 한네만이라면 내게 미안해서라도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것 같았다. 내가 이러려고 널 앙헬이라는 여우의 손에서 구해 낸 거란다.

내게 붙잡혀 얼떨결에 옆에 착석한 한네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이놈은 트리스탄이나 로버트와 달리 눈치가 좀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들켰다간 사밀라처럼 헛소리만 해 대거나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수가 있었다.

“12년간 일어난 일, 세 줄 요약 좀 해 봐.”

“네?”

“세 줄 요약 좀 해 보라고. 이르가 즉위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한네만은 갑자기 대학원 교수에게 즉석 과제를 받은 대학원생처럼 얼굴빛이 확 죽어 버렸다.

아무리 축약해 보려고 해도 세 줄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 없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나 본데……. 나는 없는 인내심을 싹싹 끌어모아 한네만의 입이 열리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어……. 세 줄 요약은 불가능하고, 간단히 말하자면요. 한 5년은 1황자랑 전쟁 치렀고, 나머지 7년은 마탑이랑 전면전을 치렀어요.”

처음부터 세 줄 요약이 불가능한 일이구나. 나는 침착하게…… 아니, 침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간단히 말하지 말고, 자세히 말해 봐.”

“음…….”

“내가 봉인당해 가며 널 살려 줬는데 나한테 이것도 말 못 해 주니? 정말 실망이다.”

“아앗…….”

한네만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렇게 말을 아끼는지 모르겠다. 한네만도 혹시나 사밀라처럼 이르커스한테 들으라고 할까 봐, 나는 반복적으로 한네만을 향해 ‘네 입으로 말하라’라고 속삭였다.

결국 ‘내가 너 살렸잖아.’ 염불에 패배한 한네만은 주변을 슬슬 살피더니 내 옆에 앉아 지난 12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

한네만은 앙헬의 손아귀에서 구해진 뒤, 한동안 정신을 놓고 살았다고 했다. 에이사가 없었으면 다시는 사람 구실 못 하게 됐을 거라고 말할 때의 목소리는 퍽 침울했다.

카만에서 에델라이드의 보호를 받으면서, 나름대로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 (그거 사실 다 내 업적인데) 에이사와 함께 1년 정도 회복기를 가지고 황궁으로 돌아오니, 운 나쁘게도 궁을 나갔던 라단타가 이르커스를 몰아내기 위해 공작가 사병을 끌고 전쟁을 일으켰다.

“전 황제 놈은 아들내미가 공작가 사병 끌고 궁으로 들어오는 걸 그냥 보고 있었니?”

“아, 그게……. 전 황제는 그냥 모르쇠로 일관했어요. 공식적으로 쳐들어온 게 아니라, 막내 황녀 쪽 호위 기사라는 명목으로 천천히 증원했던 거거든요.”

라단타의 뒷배경인 베첼 공작은 막내 황녀, 마리아를 알차게 써먹었던 모양이다.

베첼 공작은 사병과 암살자들을 아직 궁내에 있는 막내 황녀 쪽으로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르커스를 꽤 좋아하고 따르는 어린 황녀를 통해 이르커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을 비밀스럽게 궁 안으로 들여와도 궁이라는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 점점 늘어나는 인원수를 모르기도 어려웠다. 이르커스는 거의 곧바로 베첼 공작이 마리아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과연, 똘똘한 내 제자다웠다.

베첼 공작의 생각을 눈치챈 그 순간부터, 이르커스는 라단타보다 자신을 좋아하는 마리아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지점에서 감탄했다. 세상 사람들! 우리 애가 회유도 할 줄 알고, 다 컸어요! 기특하다, 기특해.

마리아가 원하는 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고 활동적으로 뛰어노는 것이었고, 얼굴이나 몸을 좀 다치더라도 제대로 된 검술 스승을 가지는 거였다.

이르커스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검술 스승을 붙여 주겠다는 베첼 공작과 달리, 곧바로 자기가 마리아에게 검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내 제자가 누군가의 스승이 되었다는 얘기는 정말 흥미로웠다. 침대에 누운 채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눈을 빛내자, 한네만이 부담스러웠는지 몸을 슬쩍 뒤로 뺐다.

“이거, 제가 다 구구절절 말했다고 하시면 안 돼요.”

“어어. 계속해 봐.”

“진짜 안 하실 거죠?”

“그럼.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나 대현자라서 모르는 거 없다고 천편일률적으로 대답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저 얘기해.”

이르커스도 아마 한네만이 나한테 다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한네만의 당부를 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넘겼다.

결국 마리아는 검도 잘 가르쳐 주고, 자기한테 잘해 주는 데다가, 베첼 공작과 달리 권위적으로 굴지 않는 이르커스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역시 자기를 이용해 먹으려는 핏줄보다는 잘해 주는 남에게 끌리고 마는 게 사람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소리도 다 옛말이다.

그렇게 이르커스는 1년 만에 베첼 공작이 알뜰살뜰 심어 놨던 암살자와 사병들을 잡아다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위기감을 느낀 황제가 자기는 공격하지 말라며 이르커스에게 황태자 자리를 내주었고, 그 소식을 들은 라단타가 거품 물고 궁으로 쳐들어와서 전쟁이 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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