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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67화 (67/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67화

    “넌 참 다정해.”

    “그렇지 않아요. 날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날 재수 없는 대현자라고 생각한다고요.”

    “재수 없는 건 사실이니까 별수 없지. 재수 없음이 다정함이랑 양립하는 성질은 아니잖아.”

    “그건 맞지만.”

    “그래서 너한테 내 딸들을 맡겼지. 너라면 그 애들이 싫어하는 걸 억지로 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거든. 다윈이랑은 다르게 말이야.”

    “난 그냥…… 그럴 수 없었을 뿐이에요.”

    “어째서?”

    “내가 당신을 죽인 것도 아닌데, 난 당신의 죽음을 400년이나 곱씹고 있어요. 지금도 봐요, 꿈이랍시고 내 기억 저편에서 당신을 끌어다 진짜인 것처럼 세워 두고 있잖아.”

    ‘나를 좀 죽여 달라’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 소리인지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죽더라도 너는 영원히 살라’고 했던 예카리나의 환영을 보는 내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강요할 수가 없었다.

    이르커스 전에도 기회는 많았지만, 누군가 내 죽음을 등에 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게 싫었다. 누가 날 죽여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 누군가가 내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게 나는 400년이 넘는 시간을 살게 되었다.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린 탓이었다.

    죽은 사람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건 내가 오랫동안 살며 얻은 큰 교훈이었다. 예카리나 사후에 한동안 사람을 되살리는 마법을 개발하기 위해 광인처럼 마법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시간을 되돌리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 이후로는 타인의 죽음이 늘 무서웠다. 나만 남기고 모두 흙으로 되돌아가는 게 너무 불공평했다. 왜 나만 이렇게 오래 살아야 해? 왜 나만 이렇게 너희의 죽음을 목격해야 하냐고.

    두려움을 피해서 본능적으로 인간 사회로부터 도망쳤다. 인간성을 죽이기 위해 오랜 시간을 나무 정령들과 함께 보냈고, 쉽게 늙고 쉽게 죽는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이르커스가 나타났다.

    어차피 황제가 될 세계의 주인공.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고, 내가 조금만 등을 떠밀면 강요하지 않아도 날 죽일 수 있게 될 최적의 인물.

    “넌 내가 정말 네 기억의 일부일 뿐이라고 장담할 수 있니?”

    “…….”

    예카리나가 내게 손을 뻗었다. 뺨을 감싸는 손길이 차가웠다. 꿈이니 감각이 느껴질 리가 없는 데도 그랬다.

    “너는 영원히 죽지 않을 거야.”

    “…….”

    “이건 너를 위한 축복이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뺨에 닿았던 손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상하게 호흡하기가 어려웠다. 바다 깊숙이 잠겨 있다 수면으로 끌어 올려져 아주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들이쉬는 것처럼.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일까?

    예카리나는 내게 영생 저주를 걸면서 그걸 ‘축복’이라고 표현했다. 많은 필멸자가 영생을 원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예카리나의 ‘축복’이라는 표현이 영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늙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지구로 치면 중국의 진시황이 형님, 하며 불로불사의 비밀을 알려 달라고 쫓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 되었다.

    수많은 권력자와 부자가 나를 ‘대현자’라고 부르면서 칭송했다. 죽지 않는 인간은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나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선 채 어느 순간부터 정말 신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어떤 인간이라도 나와 달리 나이를 먹었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거나 일정 이상 노화가 진행된 이후에는 죽었다.

    그러니 불세출의 천재가 태어나도,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모략가가 나타나도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디서 누가 죽고, 대륙의 정세가 뒤바뀌고…… 그런 것들도 점차 남의 일이 되어 버렸다.

    만일 이르커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인간 사회에 완전히 관심을 꺼 버렸을지도 몰랐다.

    자기 집 짓겠다고 마을 하나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드래곤처럼 가끔 심심해지면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찾아가 번개로 좀 지지고, 마도구 개발이나 하다가 나이만 먹었을 터였다.

    그러니 어쩌면 이르커스와의 만남이 내게는 정말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끌리지만 않았더라도…… 이르커스가 내 뜻대로만 움직여 주었더라도, 우리는 그럴듯한 사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공생할 수 있었을 테니까.

    우주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감각이 없던 몸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꿈 하나 꾸지 않고 아래로 침잠해 있던 의식이 억지로 끌어 올려지는 느낌이었다. 골이 울리고 뼈 마디마디가 아팠다.

    사고를 당해 오래 누워 있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을 때의 감각이 이럴까? 막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인 게 관 형태 마도구의 덮개 안쪽이 아니라 병원 천장이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난 세월을 부정하기엔 내가 이펜하임 대륙에 발붙이고 산 기간만 400년이 넘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든 몸을 뒤척거렸다. 닫혀 있는 마도구의 덮개를 밀어 열고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체감상 몇 년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50년이 지났단 말인가? 눈 깜빡하면 한 세기가 지나가긴 하지만, 이번 50년은 너무 빨리 흐른 것 같았다.

    이제 이르커스도 나이를 먹었겠지.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의식을 차리고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상실감이었다.

    죽을 기회를 날려 버려서인지, 아니면 이르커스가 죽었다고 생각해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비어 버린 것처럼 공허했다.

    이쯤이면 <이르커스의 서>도 완결이 났을 것이다. 그 소설의 갑작스러운 불청객인 내가 사라졌으니, 이르커스도 어쩌면 정신을 차리고 멋진 황제 노릇을 했을지도 모른다.

    성군은 몰라도 폭동으로 죽지 않았을 만큼 괜찮은 황제로 살다, 후계자에게 직위를 물려줬을지 누가 알겠는가? 멜킨 소백작과 약혼도 했으니, 이르커스의 후손이 나를 반길 수도 있었다.

    그럼 아무렇지 않게 그 후손을 향해서 다시 한번 부탁해 보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다. ‘나 좀 죽여 주지 않겠니? 네 아버지한테 부탁했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 이런 소리나 하면서, 이번엔 마법 계약 없이 구슬려 가며 죽여 달라고 싹싹 빌어야겠지.

    내가 관 형태의 마도구 안에 누운 채로 꼼짝하지 않고 있자, 덮개가 강제로 열리기 시작했다.

    마법 능력이 돌아왔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마나의 흐름을 느껴 보려고 했지만, 내 몸 주위로 마나가 모여들지 않았다. 5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카만 왕족들과의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주 치가 떨렸다. 카만 새끼들, 진짜……. 인생에 도움이 안 돼도 너무 안 됐다. 에델라이드의 손에 왕족 대다수가 썰려 나갔을 테지만, 앞으로도 웬만하면 카만에는 발 디딜 생각이 없었다.

    나는 마도구 덮개를 강제로 열고 있는 상대가 누구일지 머리를 굴렸다. 앙헬이라면 덮개가 열리는 순간, 주먹질부터 할 생각이었다. 마법 못 쓴다고 내가 사람 못 칠 줄 알아? 내 체술도 어디 가서 꿀리진 않는다.

    덮개가 조금씩 열리고, 그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너무 오랜만에 빛을 본 탓에 시야가 희뿌옇게 변했다.

    “유안.”

    앙헬을 향해 원투 잽잽을 선보이려던 주먹에 힘이 탁 풀렸다. 빛에 천천히 적응한 시야가 조금씩 맑아졌다.

    의식을 차린 뒤, 처음으로 내 눈에 보인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이르커스였다. 그것도…… 예순일곱의 노인이라기엔 말도 안 되게 젊고, 퍽 그럴듯한 미남자로 성장한 이르커스.

    “드디어 일어났구나.”

    ????????????

    “마탑주는 죽었어.”

    사밀라는 12년 만에 눈에 띄게 늙어 있었다. 마녀면서 쥬리아와 함께 황궁 생활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드문드문 쥬리아와 함께 저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걸 반복했음에도, 마녀들의 특성 중 하나인 ‘사람들과 모여 살면 병 드는’ 성질을 이겨 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봉인 하나를 해제하는 데 12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 앙헬인가 앙겔인가, 걔도 참 아까운 인재야.”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연하다. 12년 동안 웬 마도구 안에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으니, 정상적으로 거동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앙헬의 사망 소식을 듣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10년이면 금수강산도 변한다지만, 신나게 불로불사를 연구해서 불멸자가 되겠다고 장담했던 놈이 죽었다니. 내 손으로 죽여도 모자랄 판에 마탑이 박살 나면서 마탑주의 ‘마탑 보호’ 마법 계약이 터져 마나 고갈로 뒈졌다는 게 가장 열 받았다.

    “이르커스는 황제가 됐지?”

    “으음…… 되기는 했지.”

    “정상적인 승계가 아니었어?”

    “그건 이르커스 본인한테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말을 해 줘야 말이지.”

    “유안이 일방적으로 피하고 있는 거면서.”

    그야 50년 지나서 일어날 줄 알았는데, 12년 만에 강제 기상당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빨리 파악해야 이르커스랑 뭐라도 대화를 할 텐데, 냅다 날 깨운 제자를 붙들고 ‘너 황제 됐냐?’라고 묻기가 참 어려웠다. 너무 노골적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너 황제 된 거면 빨리 나 좀 죽여라.’라고 말하는 것 같잖아.

    아무리 내가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대현자고, 이왕 이르게 봉인에서 풀려난 거 죽여 주면 땡큐라지만, 12년 만에 만난 제자와 해후를 풀기도 전에 그런 소리를 지껄일 만큼 염치가 없진 않았다.

    “쥬리아는?”

    “박살 난 마탑 수습 중. 한네만이랑 곧 돌아올 거야.”

    “한네만이 살았구나.”

    “그래, 네 덕이지.”

    사밀라가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실내에서 허락도 구하지 않고 불을 붙이는 꼴이 아니꼬웠지만, 뭐라고 핀잔줄 기운도 없어 침대 위에 완전히 누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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