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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66화 (66/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66화

    마리아는 오랜만에 보는 제 이복형제인 이르커스를 향해 달려왔다.

    마리아는 그간 엄격하게 ‘체통 없이 이르커스를 쫓아다니지 말라’라고 자신을 혼냈던 조부를 떠올렸다.

    베첼 공작은 마리아가 라단타보다 이르커스에게 호감을 보이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런 베첼 공작으로부터 웬일인지 이르커스를 따라다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진 건 최근 일이었다.

    “이르!”

    마리아는 스스럼없이 이르커스의 애칭을 부르며 달려가 와락 안겼다. 마리아가 달리는 보폭에 맞춰 기사와 시종들이 뒤에서 우르르 쫓아오는 광경은 꽤 우스꽝스러웠다.

    “마리…… 나한테 와도 되는 거야?”

    “흥, 내가 황녀인데 내 마음이지.”

    “방에 한동안 갇혀 있었으면서. 마음대로 쫓아다닌 것 때문에…….”

    이르커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저보다 한참 작은 마리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마리아는 이르커스의 품에 안긴 채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몰라. 형제끼리 잘 지내는 걸로 왜 다들 그렇게 유난이었던 거야? 어른들은 너무 이랬다저랬다 해.”

    “라단타 입장에서는 네가 날 쫓아다니는 게 곤란했을 테니까.”

    “그런 것치고는…….”

    이젠 다시 쫓아다녀도 된다던데?

    마리아는 남몰래 전해진 제 조부의 전언을 떠올렸다. 순간적으로 이르커스에게 ‘이제 베첼 공작이 너랑 친하게 지내래’라고 지시한 걸 털어놓을 뻔했으나, 간신히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베첼 공작의 심계를 이해하기에 마리아는 너무 어렸다. 8살 때 제왕학을 독파한 라단타에 비하면 그다지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었다. 애초에 공부하는 걸 싫어하기도 했다.

    마리아는 이르커스 같은 마검사가 되고 싶었다. ‘마검사’라는 단어만 들어도 멋졌다. 그냥 검사도 아니고 마검사? 기왕 황녀로 태어났으니, 검으로 세상을 뒤집을 패기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불행하게도 마법적 재능이 없어 ‘마’검사가 될 수는 없지만, 검사 정도는 지금부터라도 수련하면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

    후에 어딘가로 시집보낼 때 얼굴이나 몸에 흠집이 나 있으면 안 된다는 이유 하나로 베첼 공작에게 검술을 배우지 말라는 엄포를 듣고 반쯤 포기한 상태였지만, 공작은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마리아에게 이르커스와 친밀하게 지내라는 지시를 잘 이행하고 나면 검술을 배울 수 있게끔 선생을 붙여 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이 모든 사항은 이르커스에게는 비밀이었다. 마리아는 푸른 눈을 깜빡이며 저를 가늠하듯 바라보는 이르커스의 화려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르커스를 속이는 건 미안했지만, 마리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리아의 작은 세상에선 이르커스보다 베첼 공작이 더 대단하며 권위 있는 인물이었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고 검술을 배우려면 공작의 허락이 꼭 필요했으므로.

    ‘이르커스가 직접 가르쳐 주면 좋을 텐데…….’

    마리아는 베첼 공작이 목 뒤를 붙잡고 쓰러질 법한 생각이나 했다.

    정치적인 관계가 어떻고, 이르커스와 라단타 사이가 파탄이 났든 말든 마리아는 이르커스가 좋았다. 이르커스는 어린 마리아에게 친절했고, 얼굴도 막 반짝거렸다. 말주변은 좀 별로였지만, 이르커스가 해 주는 용병 생활이나 남쪽 숲에 관한 이야기는 마리아에게도 꽤 흥미로웠다.

    “나, 또 대현자 이야기해 줘. 나무 정령이랑, 남쪽 숲이랑…….”

    “으음, 오늘은 다른 거 하고 놀까?”

    “왜? 이르는 대현자에 대한 이야기 아니면 재밌게 말 잘 못 하잖아.”

    “…….”

    “대현자가 봉인돼서 슬퍼?”

    마리아의 악의 없는 질문에 이유 없이 두드려 맞은 이르커스는 ‘대현자’와 ‘봉인’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

    여덟 살 어린애에게 입단속을 확실하게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베첼 공작이 우스웠다. 유안이 너무 의젓해서 당황스럽다던 열두 살의 이르커스조차도 감정과 비밀을 쉽게 숨기지 못했는데.

    “응. 너무 슬프고, 외로워.”

    ????????????

    “……여덟 살짜리 애를 이용한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역이용.”

    “열일곱 살이 여덟 살 데리고 잘하는 짓이다.”

    “유안처럼 말하지 마.”

    트리스탄은 부지불식간에 침울해지는 이르커스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그간 이르커스는 제법 의연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르커스의 다른 스승인 트리스탄이 보기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실,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이르커스가 궁 하나를 날릴 만큼 본격적으로 공격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앙헬은 기어코 유안의 팔을 잘라서 튀었을 것이다. 그럼 황궁 내부 문제도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이르커스는 분명 마탑과의 전면전을 선포했을 터였다.

    트리스탄은 그렇게 일이 커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유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트리스탄은 유안보다 이르커스 쪽이 더 중요했다. 어찌 되었든 이르커스는 같은 용병단에서 한솥밥 먹고 지내던 동료였으니까.

    “한네만은 좀 어때?”

    “카만으로 돌려보냈어. 동생이랑 지내면서 회복 좀 하고 오라고.”

    “몸 상한 데는 없다니까 다행이야.”

    “한네만이 너한테 꼭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더라. 자기가 인질로 잡히지만 않았어도…….”

    “자책하지 말라 그래.”

    이르커스는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뻐근한 목과 피곤함 때문에 자꾸만 감기는 눈과 달리, 정신은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한유안은 이르커스에게 거짓말을 했다.

    유안의 최우선순위는 이르커스가 아니라 죽음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만일 유안이 이르커스를 최우선순위에 올려놓았다 하더라도, 그 이유는 이르커스가 유안에게 죽음을 선사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인 탓이다.

    “그냥 다 죽일까…….”

    “그랬다가 대현자가 깨어나면 너 진짜 큰일 난다.”

    “…….”

    “정신 좀 차려.”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한구석에 남아 있는 이르커스의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다운’ 선한 성격은 이 모든 시련을 묵묵히 견뎌 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유안과 함께 살면서 차곡차곡 쌓인 다른 성격은 그냥 전부 밀어 버리고 쉽게 가자고 이르커스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유안이 조금만 더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어.”

    이르커스는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로 눈을 감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사밀라와 쥬리아가 마법진이 그려지다 만 그 봉인용 마도구를 해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르커스로선 두 마녀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끝내 유안의 허락을 받지 못하더라도, 이번에 유안이 깨어나게 되면 이르커스는 곧바로 유안과 자신의 마법 계약을 파기할 생각이었다. 얄팍한 인내심이 슬슬 한계를 호소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으면 내가 뭘 했는지…… 뭘 참았는지…… 아무리 대현자라도 모를 테니까.”

    ????????????

    예카리나가 내 앞에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바로 인지했다. 예카리나가 담긴 관을 묻은 건 나였다. 슬퍼하는 그녀의 딸들을 데리고 쇼생크 탈출이라도 하듯 황궁을 빠져나온 것도 나였고.

    나는 예카리나의 창백한 얼굴 위로 흰 천이 씌워지는 걸 똑똑히 봤다. 몸이 차게 식고, 딱딱하게 굳어 가며, 몇 번을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던…… 가장 가까이서 마주했던 첫 죽음의 순간.

    “얌전히 봉인당한 줄 알았는데 악몽을 꾸네. 이거 설마, 50년 내내 꿔야 하는 거 아니죠?”

    “왜, 날 50년이나 보는 건 싫어?”

    “진짜도 아닌 사람을 50년이나 봐서 어쩌려고.”

    사람의 뇌는 스스로를 잘 속인다고 한다. 꿈은 그냥 내 무의식의 단편일 뿐이다. 저건 진짜 예카리나가 아니라, 그냥 내가 힘들어서 만들어 낸 예카리나에 대한 기억 집합체였다.

    “제가 힘들긴 한가 봐요. 마음이 약해졌나. 당신이 꿈에 나오고.”

    “그러게 말이야. 천하의 한유안이.”

    예카리나는 내가 기억했던 그대로였다.

    마른 몸과 주름이 지기 시작한 얼굴, 새치가 섞인 금발까지. 웃는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쇠약해진 피부 위로 드문드문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황궁에서 다윈을 보좌하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시간을 보냈으니, 마녀인 예카리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날 원망하지?”

    당시의 나는 예카리나를 동정했다.

    예카리나는 황비고 나는 노예인데 그랬다. 진짜 주제 파악이 안 됐던 것 같다.

    나는 예카리나가 없었다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세계인이었고, 예카리나는 내가 없어도 그냥 조금 심심해지고 말 뿐인데. 그럼에도 나는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예카리나가 안쓰러웠다.

    당신은 왜 누군가를 사랑해서 스스로 파멸하지?

    그런 질문을 수도 없이 하고 싶었다. 만약 내가 예카리나였다면, 요카난의 목을 잘라 버린 살로메처럼 그냥 다윈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 다윈은 정말 목이 잘리기 전까지도 예카리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아주 원망하진 않아요.”

    “정말? 의외다.”

    “당신 딸들이 싫다고 난리를 쳐도, 당신이 바라는 대로 황제 자리에 앉혀 줬다면 진작 죽었을 텐데. 결국, 나도 당신이 바라는 걸 들어주지 않아서 이 고생을 하는 거죠.”

    그간 기막히게 남 탓을 해 왔지만, 실상 이 영생 저주가 이만큼 오래 유지된 데에는 내 탓이 컸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억지로 마녀들을 황제로 만들 수 있었다. 싫단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무력으로 조종해서 앉히는 것 정도야 조금 시간과 품이 들 뿐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싫다는 마녀들에게 황제 자리를 강요하지 않았고, 쥬리아처럼 황제 할 테니까 인류 멸망시킬 거라는 특이한 마녀들에겐 내가 됐다고 손사래를 쳤다.

    마치 내게 선택권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 내겐 항상 남을 이용해서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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