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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65화 (65/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65화

앙헬은 조금 억울했다.

하 참, 나 참! 대현자가 한네만인가 하네만인가 살려 주는 대가로 팔 하나 잘라 가도 된다고, 분명 허락해 줬는데! 피도 한 컵 뽑아 가라고 그랬는데!

불멸은 앙헬이 꿈꾸는 최종 단계였다.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미 현존하는 불멸자의 신체 표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간 유안이 너한테 줄 머리카락 한 올도 없대서 얼마나 속을 태웠던가. 불로불사에 대한 연구는 전진이 없었고, 앙헬이 개발한 젊음 유지 비약은 부작용이 너무 심했다.

부작용이 얼마나 심하든 간에 귀부인들이나 권력자들에게 마탑 하나 더 세울 수 있는 비용을 받고 팔려 나가는 약물을 보며, 앙헬은 대현자가 정말로 부러워졌다.

누구는 불로불사 못해서 안달인데, 저기는 죽고 싶어 안달이라니. 세상은 참 불공평했다.

앙헬 입장에서 볼 때, 유안은 확실히 불멸자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위인이었다. 가진 건 많은 데 쓰는 법을 잘 몰랐다.

쉽게 호감을 사는 얼굴과 퍽 괜찮은 몸을 가지고도 함부로 굴리는 법이 없었고, 썩어 넘치는 돈을 펑펑 쓰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끌어안고 죽을 사람처럼 돈을 쌓아 두기만 했다.

앙헬은 유안이 유교 국가 한국에서 온 인간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유안이 이해가 안 갔다. 카만에 널린 졸부들이 사는 방식을 절반만 흉내 냈어도 유안은 퍽 인생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질 않으니 허구한 날 죽겠다고 용을 쓰는 거겠지.

“날 죽이면 봉인을 못 푼다니까…….”

이르커스는 유안이 불멸자로서 키워 낸 최고의 업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안보다 이르커스 쪽이 불멸에 더 잘 어울렸다.

열일곱 살밖에 안 됐으면서 저 허무해 보이는 얼굴을 보라. 화려한 이목구비 탓인지, 그도 아니면 매 순간 옆에서 죽여 달라 곡을 하는 스승 덕인지, 이르커스는 종종 공허해 보였다. 유안 옆에서 순진한 척 눈을 예쁘게 뜨고 있을 때와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방검 마법을 걸고, 평범한 마법사들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자체 개발 마법을 써 댔음에도 앙헬은 이르커스를 이길 수 없었다. 만약 앙헬 옆에 마도구에 봉인당한 채인 유안이 없었더라면 승부는 조금 더 빨리 났을 것이다.

이르커스는 유안의 신적인 부분을 닮아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번개로 사람을 지지고 ‘이걸로 죽을 줄은 몰랐는데?’ 하는 유안처럼, 이르커스 역시 기어코 검에 강화 마법을 걸어 앙헬을 찌르고도 ‘이걸로 죽진 않을 거잖아?’ 하고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왜 유안이 이르커스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는지 알 것도 같았다. 유안은 정말 기막히게 이르커스의 성격을 버려 놓았다. 앙헬은 가슴에 검이 꽂힌 상태로도 즐거워서 조금 웃었다.

“아직 웃을 수 있는 걸 보면 죽지도 않겠지.”

“정말 걸작이네요. 대현자님이…… 마도구만 잘 만드시는 줄 알았는데, 제자도 잘 키우실 줄은.”

이르커스는 이대로 앙헬의 목을 쳐 버릴지, 아니면 마도구 봉인 해제를 위해 이 불안한 마탑주를 살려 둘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앙헬의 모든 마법은 기본적으로 수식이 복잡했다. 기초 수식을 그대로 쓰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래 산 마녀들조차 앙헬의 마법 수식을 분석하고 해제하는 데 한참 시간을 들일 게 분명했다.

마법조차 그런데, 공들여 개발했다는 저 마도구는 해제하기 더 어려울 것이다. 개발자 본인조차도 해제하려면 몇 년은 달라붙어 고생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르커스는 앙헬을 별로 살려 두고 싶지 않았다. 언제 또 불로불사 연구를 해야 한다며 유안을 찾아와 팔을 잘라 달라고 하거나 피를 뽑아 달라고 할지 모르는 인간이었다.

고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이르커스는 앙헬의 가슴에 박힌 검을 가볍게 비틀어 뽑았다. 강화 마법이 걸린 검은 웬만한 철근보다 더 무거웠지만, 방검 마법을 무력화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당신은 이 자리에서 죽을 거야.”

이르커스는 그대로 검을 들어 앙헬의 목을 내리쳤다. 아처볼드의 목을 쳤을 때보다 더 정돈되고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앙헬은 절대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전 불로불사가 꿈이라서.”

앙헬이 흘린 피가 멋대로 바닥에서 꿈틀거리더니 일종의 마법진을 만들었다.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서로 엉겨 붙은 혈액이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이르커스는 몸을 피해, 재빠르게 유안이 봉인된 관으로 손을 뻗는 앙헬에게 본능적으로 공격 마법을 걸었다. 수식 계산은커녕 이 마법을 써야겠다고 인지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마법에 의해 손이 잘린 앙헬은, 아프지도 않은지 작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다른 마법으로 이르커스의 공격을 받아쳤다. 그 과정에서 이르커스의 소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 형태의 마도구가 산산이 부서졌다.

틈이 갈라진 흑요석이 바닥을 구르다, 앙헬의 피와 섞여 다시 팡 터졌다. 이르커스가 어찌할 새도 없이 이르커스는 유안이 제게 처음으로 줬던 선물을 눈앞에서 잃고 말았다.

이르커스가 제 손을 떠난 물건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앙헬은 재빠르게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웬만해선 다시 보지 맙시다, 3황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앙헬은 엉망이 된 황궁에서 제 잘린 손 하나만을 남긴 채 도망쳤다.

????????????

“마탑주 새끼,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라단타가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테리즈나 에델라이드가 내리쳤을 때처럼 테이블이 갈라지진 않았으나, 그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베첼 공작은 시름이 가득한 얼굴로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제 조손을 바라보았다. 평소 유들유들한 얼굴로 제게도 훈수를 두던 라단타는 지금 평정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침착하세요. 대현자를 치웠으니, 애초에 저희가 목적한 바는 어느 정도 이룬 겁니다.”

“조부님께서는 아직도 가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황태자로 책봉만 안 됐을 뿐이지, 그 자식이 황궁을 점거했는데.”

“사냥 대회 이후 아무런 공식 발표도 없으니, 점거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황궁 일부가 날아간 것도 아직은 다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대현자가 봉인됐다는 것도, 황자님께서 황궁을 떠나신 것도 모르는 귀족들이 태반이에요.”

“……이르커스가 마탑주를 협박하면 앙헬, 그 자식은 또 자기 살겠다고 기껏 해 놓은 봉인을 풀어 버릴 겁니다.”

“마탑주가 붙잡히기 전에 저희가 더 일찍 움직이면 될 일입니다.”

결국, 다 된 스튜에 재가 뿌려졌다. 라단타는 대현자가 봉인되고 나서야 대현자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가 제 이복동생이라는 걸 완전히 인지했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거침없이 궁을 무너트리고 외교 문제를 생각하지 않은 채 마탑주를 곧바로 공격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현 황제는 이르커스의 행태를 지적하거나 꾸짖는 대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마치 이르커스가 자기에게 덤비는 걸 두려워하는 늙은 사자 같은 모습이었다.

“대현자와 달리, 이르커스는 불멸자가 아닙니다. 그것만으로 싸워 볼 만한 가치는 있지요.”

“공작가 사병을 모아서 황궁으로 쳐들어가면 반역이 될 텐데.”

“황제께 미리 연통을 넣어 두겠습니다. 황궁 기사단도 함부로 나서지 않을 테죠. 대현자가 봉인됐다는 것만 알려도 3황자 편에 서겠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라단타는 제 얼굴을 마른 손으로 쓸어 넘겼다. 당연히 제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해 왔던 황좌를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투자를 해야 하는 이 상황이 속 쓰렸다.

“이르커스도 바보는 아니니, 우리가 다시 자리를 찾아 쳐들어오리라는 건 짐작할 겁니다. 수가 적어 그렇지, 이르커스 쪽에는 마녀가 둘이나 붙어 있지 않습니까.”

“멜킨 소백작이 뒤를 봐줘 궁에 들였다는 이들 말이군요……. 멜킨 경은 몰라도 에리스 멜킨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습니다. 3황자와 정치적으로 거래가 오고 간 게 분명하니.”

베첼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그의 딸이자 제국의 황비는 불안함에 잠 못 이뤄 건강이 쇠약해졌고, 자랑스러운 손자였던 라단타는 분노와 수치심 때문에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이럴 때일수록 백전노장인 자신이 이성을 차리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한 황제는 대현자만큼이나 제 아들인 이르커스 역시 두려워한다. 라단타 쪽에서 이르커스만 공격하겠노라고 언질을 보낸다면 황제는 기꺼이 공작가의 사병에게도 황궁 문을 열어 줄 터였다. 이르커스를 두려워하는 것만큼, 라단타와 베첼 공작을 두려워하지는 않기 때문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럴 때는 차라리 유용했다. 황제가 조금만 협력해 준다면 황궁 안에서 이르커스를 몰아세우는 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대현자처럼 죽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면, 아무리 강한 마검사라도 쪽수 싸움에서 밀리기 마련이니까.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이르커스 역시 라단타가 돌아올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이르커스에게 발각되지 않게끔 공작가의 사병을 들이고, 이르커스 쪽에 붙어 있는 마녀들을 제압하는 게 새로운 과제였다.

“마리아는 여전히 3황자를 좋아합니까?”

“갑자기 마리아 얘기는…… 왜 꺼내십니까.”

“마리아를 유인책으로 한번 써 볼까 해서.”

베첼 공작은 8살짜리 손녀를 떠올렸다.

얼굴은 예쁘장하지만, 라단타에 비하면 그렇게 활용도가 높은 아이는 아니었다. 추후 외교용으로 결혼 시장에 내놓을 정도의 가치는 되지만, 그 이상의 값어치는 아닌 아이.

“마리아는 그냥 두죠. 그 애는 아직 너무 어리고…….”

“저런.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요.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 합니다. 황자께서는 저희가 지금 수세에 몰렸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

“마리아도 자기가 형제에게 도움이 됐다는 걸 알면 기뻐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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