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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64화 (64/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64화

    “그때 한 번에 죽이지 못해서 유감이야. 유안이 뭐라고 하든 머리를 맞혀 버렸어야 했는데…….”

    “하하, 무서워라. 저도 이래서 빨리 치고 빠지려고 했는데. 다 틀렸네요.”

    사밀라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막 새로운 사랑을 찾아낸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쥬리아가 이 자리에 함께 있지 않다는 게 정말 아쉬웠다.

    “어머머.”

    주변의 마나가 요동치는 게 몸을 오싹거리게 했다. 카만의 왕궁 지하에서 마나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 안의 마법사들이 이런 감각을 느꼈을까?

    사밀라는 입맛을 다시며 대치 중인 앙헬과 이르커스를 바라보았다. 이기는 편 우리 편이라고 대차게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눈이 돌아 버린 이르커스가 피아 구분 없이 제게도 덤빌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1황자님은 지금 빨리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

    “당신은 어차피 황제가 못 될 거야. 욕심은 나겠지만…… 목숨부터 챙겨야 후일을 도모하지.”

    “대현자나 마녀나 똑같은 소리를 하는데. 정말 둘 다 예언 못 하는 거 맞습니까?”

    “예언은 못 하지. 하지만 너도 눈치껏 알잖아. 지금 완전 잘못 건드렸다는 거.”

    라단타는 제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신경 줄을 긁는 데 도가 텄다.

    앙헬을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게 라단타의 가장 큰 패인이었다. 애초에 ‘대현자’라는 카드로 마탑을 꼬드겼다면, 마탑은 정말 그 카드만을 목적으로 삼으리라는 걸 고려해 뒀어야 했다.

    마탑에 처박혀 연구나 하는 놈들이 명분과 위신을 따지는 귀족들과 전혀 다른 족속이라는 걸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또 다른 문제는 바로 이르커스였다.

    이르커스는…… 대현자라는 통제가 사라지자 앞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냥 대회에서 막 돌아온 탓에 날이 선 검은 사람 목을 치기 딱 좋아 보였다.

    마탑과의 관계나 황궁의 안위,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지 등은 이르커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르커스가 그간 큰 사고를 일으키지 않고 궁 내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건, 전부 대현자의 존재 덕이었다.

    “마탑주를 죽이고 나면 다음은 당신일걸.”

    “그건 반역이 될 텐데요.”

    “유안이 봉인당하면 이르커스가 그런 걸 신경이나 쓸 거 같아? 쟤는 말이야, 유안이 자기 옆에 남아만 준다면 자기가 죽거나 같이 영생 불멸을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구.”

    “…….”

    “나야 재미있는 꼴 구경해서 좋긴 하다. 아아, 낭만적이야. 꼭 고전 비극 같지 않니?”

    들뜬 얼굴을 하고 제 뺨을 양손으로 감싼 채 웃는 사밀라를 질린 얼굴로 쳐다본 라단타가 제 호위 기사 둘을 끌고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앙헬이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면, 궁 안에서 시간을 끌어 봐야 라단타 역시 좋은 꼴 보지 못할 게 뻔했다.

    사밀라의 말대로 후일을 도모하는 게 라단타에게도 더 나은 선택지였다. 베첼 공작가로 몸을 피한다면, 앙헬은 몰라도 라단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을 터였다.

    지금 이르커스는 확실히 앙헬을 죽일 생각이었다. 마탄이 장전된 총으로 앙헬을 쏴 버렸을 때보다 더한 살의가 느껴졌다.

    라단타가 제 기사들을 이끌고 궁을 빠져나가는 걸 구경하던 사밀라는 그 꼴이 제법 우습다고 생각했다.

    열두 살의 이르커스가 황궁에서 도망쳤던 것처럼, 이제 거의 서른이 가까워져 가는 라단타 역시 살기 위해 궁을 떠나고 있었다. 5년 만에 위치가 역전된 것이다.

    사밀라는 퇴거하는 라단타를 뒤쫓기 위해 검을 빼 드는 트리스탄과 로버트를 막아섰다. 라단타보다 앙헬 쪽이 더 중요하다는 사밀라의 말 몇 마디에, 눈치 없는 트리스탄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앙헬과 이르커스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언젠가 라단타 역시 이르커스가 그랬듯이 황궁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사밀라는 짧은 생을 사는 인간들이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는 게 즐거웠다.

    명색에 마탑주인 앙헬은 그래도 이르커스의 검을 제대로 받아치고 있었다.

    문제는 이르커스가 그냥 검사가 아니라 마검사라는 데에 있었다. 대현자만큼은 아니지만 대륙에서 몇 명 찾아보기 힘든 귀한 마검사는, 하필이면 마법 쪽 재능이 더 뛰어난 탓에 수식 하나 제대로 계산하지 않고 앙헬을 향해 공격 마법을 난사하기까지 했다.

    “저거 안 말려도 되는 거요?”

    “어머머. 트리스탄은 혹시 목숨이 막 아홉 개야?”

    “목숨은 하나지. 목숨이 무제한인 건 세상에 대현자 하나요.”

    “그럼 우린 이제 재빠르게 도망쳐야 해. 근데, 있지……. 저기 내동댕이쳐진 마법사, 네 동료 아니니?”

    “으악, 한네만!”

    그제야 실신 직전의 한네만을 발견한 트리스탄이 공격 마법에 휘말릴 뻔한 그를 몸을 날려 구했다. 사밀라는 그 장면도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며 지켜봤다.

    누가 봐도 이르커스는 지금 눈이 돈 상태였다. 쥬리아가 이걸 꼭 봐야 하는데!

    사밀라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제 자매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한네만을 업고 일단 황궁을 나가야겠다는 트리스탄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 주었다.

    단순하게 끝날 줄 알았던 ‘도움’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사밀라는 바깥의 상황은 전혀 모르는 채로 마도구 안에서 평화롭게 눈이나 감고 있을 유안이 이 꼴을 봤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조금 궁금해졌다.

    ????????????

    세상에는 통제할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다.

    고삐 풀린 말이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 같은 게 그렇다. 그것도 아니면 웬 마녀가 죽기 직전에 아무 생각 없이 남긴 축복 같은 것도 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해당한다.

    큰 범위로 놓고 보자면 유안이 사라진 상태의 이르커스 역시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이래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무서워요. 제가 열일곱 살엔 수식을 이해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

    “하지만, 어린 천재들은 빈틈이 너무 많죠.”

    앙헬은 공격 마법을 다 비껴 내면서 손으로 이르커스의 검을 움켜잡았다. 그사이에 금세 마법을 썼는지, 날이 선 검을 맨손으로 잡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마치 구멍이 뚫린 것처럼 앙헬의 손바닥이 이르커스의 검날을 그대로 삼켰다. 이르커스는 반사적으로 검을 비틀었으나, 한번 삼켜진 검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본능이 위험 신호를 보냈다. 용병 생활을 하며 갈고닦은 이르커스의 실전 경험이 순간적으로 다음에 닥칠 공격을 감지했다.

    앙헬의 손바닥을 통과한 검은 그대로 방향을 바꿔, 이르커스의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수식 여러 개를 조합한 마법은 그 원리를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역시 반사와 역전을 기초로 앙헬이 스스로 개발한 마법일 터였다.

    공격 마법을 기초로 두지 않으니,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마법.

    이르커스는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법으로 공격 마법을 금지당하고도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방금 제 눈으로 확인했다. 조금만 늦게 피했더라면 저 마법에 휘말려 제 검에 자신이 찔릴 뻔했으니까.

    “하하, 그걸 피하네. 역시 대현자님의 제자다워요.”

    머리카락이 절반 정도 잘려 나가고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던 앙헬은, 이르커스에게서 역으로 빼앗은 검을 손에 쥐었다.

    “마도구의 봉인은 50년짜리입니다. 제가 반동을 감수하면서 억지로 해제하지 않는 이상, 풀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고.”

    “풀 수 있다면 지금 풀어.”

    “아니, 곤란한걸요. 저도 원하는 바가 있어서 이 고생을 한 건데. 저와 협상하지 않겠어요?”

    그때 앙헬을 죽였어야 했는데.

    유안으로부터 받은 마탄을 그렇게 허비해서는 안 됐다.

    이르커스는 짧게 혀를 찼다. 마땅한 명분 없이 죽이게 되면 유안이 속상해할 테니, 적당히 복부를 조준하고 사격했던 게 실수였다.

    그때 저 간악한 머리를 날려 버렸다면 많은 게 쉬워졌을 것이다. 한네만이 인질로 잡히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유안이 앙헬과 협상할 일도 없었을 테다.

    이르커스는 훅 끼쳐 오는 감정 때문에 이성을 잃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골랐다.

    유안이 준 마도구 형태의 반지는 내구도가 점점 닳고 있었다. 앙헬과 싸우면서 아까와 같은 공격을 두어 번 튕겨 낸 것만으로 반지 가운데 박혀 있던 흑요석에 금이 갔다.

    마도구인 이상, 아무리 대현자가 만든 거라도 내구도가 있기 마련이다.

    이르커스가 만약 황궁을 전소시킬 만큼의 공격 마법을 사용한다면, 앙헬을 죽이는 건 가능할지언정 유안이 봉인된 저 마도구가 무사할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어떤 협상이지?”

    “대현자님의 신체 일부를 잘라 준다면, 제가 무리를 해서라도 몇 년 안에 봉인을 풀어 드리죠.”

    “미친 소리를 하는군.”

    “팔 하나에 피 한 컵 정도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않나요? 적어도 5년 안에는 제가 해제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한유안은 불멸자다. 팔을 자르든 피를 뽑든 죽지 않고, 어차피 회복할 몸이라는 것쯤 이르커스 역시 알고 있었다. 묵묵하게 50년을 기다리는 것보다 그 정도의 피와 살을 내주고 5년 정도를 기다리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것도.

    하지만, 이르커스는 유안의 머리카락 한 올도 앙헬에게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협상은 결렬이야, 마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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