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63화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이르커스의 스승이 되면 안 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맞다.
이르커스가 진짜 참 스승으로 삼을 만한 건 차라리 트리스탄 쪽이었다. 트리스탄이 눈치가 좀 없고, 아무 생각 없이 살긴 해도, 나처럼 어린 이르커스를 막 굴리진 않았을 테니까.
평범한 인간이니까 이르커스한테 ‘인간성을 버려야 한다’라는 충고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나처럼 너무 오래 살아서 닳고 닳은 기색을 드러내지도 않았겠지.
이르커스를 향해 죽는다는 소리도 숨 쉬듯이 하지 않았을 것이고, 황제로 만들어 주는 대신 죽여 달라는 계약을 하지도 않았을 테다.
자존감 하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은 채로 살아왔는데, 좋은 스승이었냐는 질문에는 늘 확신이 안 섰다.
예카리나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스승이었다. 날 초·중·고 도합 12년 동안 가르쳐 주신 학교 선생님들도, 심지어는 보습 학원 시간제 강사들조차도 나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진짜 맞는 말만 해서 짜증 나고 반박할 거리 없게 만드네.”
말싸움으로 어디 가서 져 본 적 없는 내가, 100살 조금 넘은 마탑주한테 받아칠 말이 없다는 게 제일 자존심 상했다.
마법으로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예카리나가 죽기 전으로 돌아가서 영생 저주 멈추라고 소리부터 질렀겠지.
그러니 지나온 이르커스와 내 세월을 없던 일로 만들 순 없었다. 열두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이르커스와 나는 누구보다 가까이 붙어살았고,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집착했다.
스승으로서 제대로 행동하지 못했으니, 이르커스가 내게 그런 맹목적인 애정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내가 정말 참 스승이었더라면 이르커스가 날 연애 상대로 인지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뭔가…… 나도 모르게 수많은 여지를 주고, 틈을 내비친 탓에 이르커스가 헛된 희망을 놓지 못하는 거겠지.
따져 보면 이것도 다 내 탓이었다.
400살 생일에 <이르커스의 서> 주인공 좀 마주쳤다고 들떠선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가 뭔지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홀라당 계약한 것부터 문제였다. 보험 약관에 아무 생각 없이 사인할 놈은 바로 나였던 거다.
이래서 사람이 겸손하게 살아야 후회를 좀 덜 하는데. 나의 천성은 겸손과는 거리가 일억 광년 정도 먼 탓에 인생이 후회의 연속이었다.
“야, 어지럽다. 더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그냥 빨리 봉인해라.”
50년 정도 봉인됐다 깨어나면 이르커스는 죽겠지.
이펜하임 대륙의 평균 수명은 대한민국의 평균 수명보다도 좀 짧았다. 예순일곱이면 평균 수명을 넘긴 나이였다. 이르커스가 아무리 한 작품의 주인공이라지만, 세월의 흐름을 피해 갈 수는 없을 테다.
나처럼 영생 저주에 걸리지 않는 이상,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한 번도 실체를 드러낸 적 없다는 헤누스나 엘리오스와 같은 신들을 제외하면 이 땅의 모든 존재가 예외 없이 순리에 따라 죽음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내가 봉인에서 풀려날 즈음이면 이르커스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였다. 어쩌면 나는 이번에도 죽지 못할 것이다. 남에게는 쉽게 허락되는 죽음이 내게는 늘 어려운 숙제였다.
“앙헬.”
“네?”
“너 꼭 불로불사 연구 성공해서 꼭 불멸자 해라.”
나는 앙헬이 만들었다는 마도구 안에 몸을 누이면서 앙헬을 향해 최대의 저주를 퍼부었다. 앙헬은 그 말이 덕담인 줄 알았는지 속도 없이 웃었다. 꼭 성공해 보이겠다는 결연한 목소리가 참 위안이 됐다.
“대현자님께 그런 말 들으니까 기쁘긴 한데, 좀 불안하네요. 보통 이런 말 들으면 요절하던데.”
“이미 100살 넘은 놈이 요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저 자식도 한번 영생 살아 보면 이게 얼마나 거지 같은지 알게 될 거다. 이 세계에 나 말고 죽음에게 허락 받지 못하는 인물이 생긴다면 차라리 앙헬 같은 놈이었으면 했다.
뭔가를 사랑할 줄 아는 놈들은 절대로 영생을 살면 안 된다. 불멸자는 미치기 딱 좋은 설정값이다. 성격 버리는 건 기본 옵션이고, 나처럼 이렇게 미련 철철 흐르는 인간으로 살다 마음의 상처만 입게 된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앙헬이 마도구의 뚜껑을 덮었다.
이르커스한테 마지막으로 ‘꼭 좋은 황제가 되렴’ 같은 덕담 한번 못 해 주고 이렇게 봉인돼야 한다는 게 좀 억울했다. 아무리 참된 스승은 아니었다지만 내가 걜 어떻게 키웠는데.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야 하냐.
하지만 한편으론 이르커스가 이 꼴을 못 보고 넘어가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르커스와 내가 함께한 5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 이르커스도 나를 잊을 것이다. 어린 마음에 품었던 연정도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도 사라질 테지.
그러고 나면 약혼자인 에리스 멜킨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을 사랑해 주는 다른 누군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깨어나면 이르커스가 아니라, 이르커스의 후손이 나를 반겨 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또 그 후손을 붙들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너 황제 만들어 줄 테니까 나 좀 죽여 줘, 하고. 그땐 계약 없이 잘 어르고 달래서…… 그러면 언젠가는 죽을 수 있겠지.
그냥 늘 그래 왔듯이 다시 한번 죽음이 내게서 멀어졌을 뿐이었다. 한두 번도 아닌데, 슬퍼할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르커스는 내가 없어도 황제가 될 수 있을 만큼 강해졌고, 옆에는 마녀 둘에 용병 단장인 트리스탄도 있었다. 에델라이드도 빚을 지워 놨으니 이르커스가 손을 뻗으면 맞잡을 수밖에 없을 거다.
라단타와 앙헬은 좀 번거롭겠지만, 어차피 판도는 기울었다. 내가 사라진 탓에 귀족들을 매수하거나 뒷공작을 벌이는 일이 좀 고생스러워지더라도 이르커스라면 마땅히 해낼 수 있었다.
원래도 나 없이 황제가 될 주인공이었으니까.
이르커스는 나의 주인공이지만, 나는 이르커스의 인생에 주인공이 되어선 안 된다.
앙헬이 마도구 위로 마법 수식을 그려 넣는 동안, 나는 조금 울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슬플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그랬다.
????????????
라단타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원래라면 유안이 제 발로 마도구에 들어가는 장면은 조금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이르커스가 보는 앞에서 이뤄질 예정이었다.
라단타와 앙헬의 계획은 일단 이랬다.
마법을 못 쓰게 된 대현자보다 적법한 황위 계승권이 있고, 마검사인 이르커스를 먼저 붙들어 두자. 이르커스만 붙잡아 봉인해 버리면 대현자는 어쩔 수 없이 그 봉인을 풀기 위해 시간을 허비할 터였다.
분명 앙헬은 자기 입으로 라단타에게 계획을 말해 줬었다. ‘사냥 대회에서 3황자를 자극해, 마도구 앞으로 데려오세요.’라고 지시한 건 마탑주 본인이었다.
그런데 앙헬은 지금 본인이 세웠던 계획은 알 바 아니라는 양 누구보다 즐겁게 유안을 봉인하고 있었다.
라단타가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이르커스 일행을 데리고 왔음에도 앙헬은 이미 라단타의 뒤통수를 치고, 선수까지 쳐 유안을 마도구에 밀어 넣은 거였다.
“상황 설명이 필요한데.”
라단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르커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앙헬이 혀를 찼다. 라단타를 향해 조금만 더 늦게 오시지 그랬냐는 핀잔을 주는 건 덤이었다.
“구태여 상황 설명이랄 게 필요할까요?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대현자님께서 제 발로 봉인당해 주시겠다고 하시길래, 갑자기 굴러 들어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지요.”
“마탑주…….”
“1황자님께서도 절 부르실 때 계승 싸움을 도와달라고는 하지는 않으셨잖아요? 전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랍니다.”
앙헬은 마법진을 이어 그리던 마도구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앙헬은 라단타와 편을 먹을 생각이 없었다. 제국의 황위야 누가 물려받던 마탑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외교 문제가 얽히면 골치 아파지는 건 마탑의 행정관들이지, 마탑주인 앙헬이 아니었다.
연구를 빌미로 몇십 년 틀어박히면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도 마탑주를 처형하거나 공격할 수 없었다. 마탑과의 전면전을 치를 생각이 아닌 이상, 강력한 마법사들이 다수 모여 있는 마탑과 척을 지는 건 국가 입장에서 손해였다.
그러니 콧대 높게 누구의 부탁이든 거절하던 앙헬을 혹하게 하려면 라단타 입장에선 연구비 지원뿐만 아니라 ‘대현자’라는 카드 역시 동시에 내밀어야 했다.
라단타의 예상대로 마탑은 대현자를 넘기겠다는 말에 바로 반응을 보였다. 좋은 미끼를 끼니 대어가 낚인 것이다.
하지만 마탑은 단 한 순간도 라단타의 편이었던 적이 없었다. 라단타가 그간 앙헬을 자신과 같은 패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앙헬에게 라단타는 이용하기 쉬운 애송이에 불과했다. 이르커스에 비해선 나이가 많지만, 그래 봐야 앙헬과 비교했을 땐 갓 태어난 신생아와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라단타는 이르커스에 비해 사회성은 높을지언정 마법적 재능은 현저히 떨어졌다. 거기에 오만하기는 얼마나 오만하던지. 당연히 마탑주가 제 편에 서 주는 줄 알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라단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앙헬은 1년 정도는 즐거워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날 배신했군.”
“배신이라니. 같은 편이었던 적이 없는데, 이게 어떻게 배신입니까?”
“…….”
“제 목적은 처음부터 대현자라고 꾸준하게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신 건 1황자님 아닙니까.”
앙헬을 향해 곧장 검을 휘두른 건 라단타가 아니라 이르커스였다.
이르커스는 앙헬이 라단타의 뒤통수를 쳤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라단타가 유안을 미끼로 자신을 봉인하려 들었단 사실 역시 알 바 아니었다.
“마탑주를 죽이면 봉인이 풀리나?”
앙헬의 하얀 머리카락이 검 끝에 걸려 싹둑 잘려 나갔다.
이르커스의 관심은 오로지 마도구 안에 봉인된 유안만을 향해 있었다. 아직 완전히 그려지지 않은 마법진은 앙헬로부터 마나를 공급받지 못한 탓에 천천히 빛을 잃었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게 유안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마도구에서 유안을 꺼내고 나면 마도구는 폐기하고 유안은 묶어 버려야겠다.
이르커스는 앙헬을 향해 검을 겨눈 채 무감하게 생각했다. 가만히 두면 유안은 어디로 도망칠지 몰랐다. 이전과 달리 마법 사용에 제약이 걸렸으니, 물리적으로 충분히 묶어 둘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