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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62화 (62/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62화

    이르커스는 열두 살 이전까지 온갖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야밤에 암살자가 칼 들고 쫓아오는 건 애교고, 온갖 산해진미가 넘치는 황궁에서 굶어 죽을 뻔하기도 했다.

    좀 챙겨 준다 싶었던 사용인이 자신에게 독을 먹이는 건 너무 흔한 일이라, 이르커스는 일찍이 웬만한 독에는 기절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남들은 독 내성을 키운다고 훈련도 한다는데, 이르커스는 그냥 목숨 줄이 질긴 탓에 수많은 독살 시도를 당하면서 내성이 생겼다.

    이런 살해 위협도 달에 한두 번이어야 견딜 만하지, 하루에 한두 번이면 미치기 딱 좋았다.

    이르커스는 왜 손위 형제들이 라단타한테 죽임당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비열한 황족에도 급이 있기 마련이다. 죽은 형제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비열했지만, 라단타에 비하면 그 급이 떨어졌다.

    라단타에게는 집념이라는 게 있었다. 한 번 실패했다고 암살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증거를 없애 가면서 될 때까지 시도했다. 성실함도 이 정도면 광기였다.

    저만한 집념이면 이르커스는 그냥 라단타에게 황제 자리를 주고 싶었다. 어린 이르커스는 그다지 권력에 대한 야망이 없었다. 그냥 생존을 위해서 황위를 계승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가만히 있다가 라단타가 황제가 되고 나면, 라단타는 반란의 씨앗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지금보다 더 끈질기게 이르커스를 죽이려고 할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렇게 시달리기 전에 먼저 황제가 돼서 라단타를 치워 버려야 했다. 그게 바로 열두 살의 이르커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이르커스는 황궁에서 도망쳤다. 얼굴에 철판 깔고 버티자면 못 버틸 것도 없었지만, 독은 좀 그만 먹고 싶었다.

    이르커스는 기왕이면 살고 싶었다. 자길 죽이려는 사람들만 가득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열두 살까지 버텼으니, 허무하게 죽기 싫었다.

    악착같이 살고자 하는 의지 덕에 열두 살의 이르커스는 남쪽 숲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이르커스가 일부러 마법을 쓰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척척 알아서 그가 가야 할 길을 개척해 냈다.

    그 길 끝에서 이르커스는 유안을 만났다. 황궁 시녀들이 종종 자기들끼리 떠들던 ‘운명적 사랑’의 시작이었다.

    “내 생각에 그건 운명적 사랑이 아니라…… 그냥 미친 악연 같아.”

    트리스탄은 유안과 이르커스의 첫 만남을 듣고 그렇게 말했다.

    진정한 운명적 사랑은 이졸데와 자신의 사랑이고, 유안과 이르커스의 만남은 그냥 악연이라는 게 그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거기에 한네만과 로버트도 동의했다. 평소 의견이 통합되는 일이 도통 없던 붉은 매 용병단이 이르커스만 제외하고 모두 같은 의견을 냈다.

    “솔직히 넌 대현자만 연관되면 제정신을 못 차리니까. 안 만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았겠냐?”

    “트리스탄.”

    “화내지 말고 이성적으로 들어 봐라. 로버트도 고개 막 끄덕이잖아.”

    트리스탄은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입이 잔뜩 나올 만한 상황이긴 했다. 지금 이르커스는 누가 봐도 라단타의 도발에 넘어가서 사냥 대회에서 빠져나와, 앙헬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드래곤 레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만, 지금 이건 약간 자살행위? 그런 느낌이야.”

    “드래곤 슬레이어의 제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네.”

    “내가 드래곤 슬레이어냐? 내 스승이 드래곤 슬레이어지……. 난 드래곤 레어 들어가면 그냥 뒈져, 인마.”

    로버트가 옆에서 단장님은 3분 만에 죽을 거라고 맞장구를 쳤다. 악담이 아주 판을 쳤다. 사밀라는 뭐가 즐거운지 깔깔 웃기 바빴다.

    이런 이르커스 일행의 긴장감 없는 분위기는 오히려 라단타 쪽을 자극했다.

    대현자를 밑밥으로 깔고 이르커스의 주의를 끌어 사냥 대회에서 빼 오는 것까지, 라단타는 앙헬이 지시한 모든 것을 무사히 수행했다.

    앙헬만 제대로 해낸다면 이르커스를 눈앞에서 치워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기회를 만들기 위해 라단타는 카만에 사병도 파견했고, 마탑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기부금도 헌금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약혼자도 있으면서 스승을 사랑하는 건가?”

    기사들이 전부 있는 곳에서 이르커스에게 그 질문을 던진 건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누구나 다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라단타가 질문했다.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던 이르커스 일행 사이에서 말이 뚝 끊겼다. 공공연한 비밀이긴 하지만, 들춰서 좋을 일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네가 남색가에 스승을 사랑하는 파렴치한이더라도 나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이르.”

    “…….”

    “그냥 멜킨 백작가가 줄을 잘못 잡았구나, 싶어 안타까워질 뿐이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라단타는 이르커스가 제 질문에 답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침묵이 최선의 방어인 질문이니까. 라단타도 굳이 이르커스의 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대현자가 없었다면 형님은 지금 죽었을 텐데요.”

    침묵을 깨트리고 돌아온 답변은 라단타의 예상외였다.

    이르커스는 조곤조곤 다음 말을 이었다.

    “제 스승이 ‘정상적인’ 방법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제가 그 스승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더라면…… 당신이 살아서 제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었을 텐데.”

    ????????????

    앙헬은 진짜 비겁하고 치사한 데다가 싸가지까지 없는 마탑주다.

    내가 순순히 봉인당해 주겠다고 했으면 ‘대현자님, 쿨 거래 감사드려요. 그 협상 받아들일게요.’ 하면서 한네만을 놔줬어야지. 이놈은 끝까지 인질을 잡고 놓지 않았다.

    사실 영리한 거긴 했다. 앙헬이 한네만을 놔주는 순간, 나도 한 번 도주를 시도해 볼 생각이었으니까.

    “너 진짜 쟤 죽이면 나, 관 뚜껑 열고 다시 일어난다.”

    “설마 제가 한 입으로 두말하겠습니까?”

    “넌 한 입으로 네 말도 할 놈이잖아.”

    “하하. 저, 그렇게까지 비열하진…… 않지 않나?”

    마탑은 꼭 박살 내야지. 기필코 내 손으로 탑을 무너트리고 마법사들을 흩어 버려야지.

    내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앙헬이 만든 마도구 안에 눕는 동안, 한네만은 질질 짜면서 내게 죄송하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가 죄송해? 나는 그런 한네만을 향해 잘 도망칠 생각이나 하라고 호통이나 쳤다.

    솔직히 한네만이 앙헬한테 잡힌 건 내 탓이었다. 내가 할 일 많고, 나한테 맞는 마도구 개발하기 귀찮다는 사소한 이유로 한네만에게 황궁 마법사라는 밑밥을 던져 사지로 내몰았으니까.

    앙헬이 한네만을 전혀 신경 안 쓰는 눈치길래 괜찮을 줄 알았지. 마탑주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오래전에 탈주한 마법사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겠나 싶어 안일하게 군 것도 없잖아 있었다.

    한네만이 트리스탄이나 로버트에 비해 영리하고 눈치도 있어 보여 믿음이 간 것도 문제였다. 바보들이랑 비교하면 안 되는 건데……. 나는 점점 더 한네만에게 미안해졌다.

    “신처럼 모시던 대현자님을 이 두 손으로 봉인하려니 흥분되네요.”

    “고자로 만들기 전에 조용히 해라.”

    “하하. 마법에, 인질에…… 곧 봉인까지 당하실 분이 입은 잔뜩 살아서. 사실 지금의 대현자님은 좀 실망스러워요.”

    실망스럽다는 소리에 없던 고혈압이 생길 것 같았다. 자기가 뭔데 나한테 실망이다 뭐다 난리야.

    “3황자도 아니고, 이런 허접한 마법사 하나 살리겠다고 봉인당해 준다며 협상하는 것부터가 대현자님과 어울리지 않는다고나 할까.”

    나도 모르게 ‘나다운 게 뭔데?’라는 학원물 드라마 남자 주인공 같은 대사를 칠 뻔했다.

    나도 가끔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헷갈리고, 내 인간성도 퓨즈 나간 전등처럼 꺼졌다 커졌다 갈피를 못 잡는데, 별로 친하지도 않은 마탑주가 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떠드니까 기분이 더러웠다.

    속박 마법 때문에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기분이 두 배로 거지 같은 걸 수도 있었다. 성질머리를 참지 못하고 당장 앙헬을 향해 중지 두 개를 쌍으로 들어 보이며 너나 잘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경질을 부릴 기운조차 없었다.

    “그래도 저,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마세요. 대현자님이랑 3황자님은 같이 지내서 좋을 게 없는 사이잖아요.”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너, 내가 마법 못 쓴다고 물로 보이냐?”

    “그럴 리가요. 여전히 저한텐 신이나 다름없으신데.”

    “진짜 몇 대만 때리고 싶다.”

    마법만 쓸 수 있었어도 앙헬을 백만 볼트로 지져 줬을 텐데.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는 무척 무력한 존재였다.

    사실 더 열 받는 건 앙헬이 뱉은 말에 틀린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소리도 있지 않나. 지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그래도 좋은 스승이 아니었다는 데엔 동의하지 않으세요? 들어 보니 3황자는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었다던데.”

    “…….”

    “1황자님께 들었거든요. 원래는 무척 정이 넘치는 어린애였는데, 정신이 나가서 돌아왔다고.”

    앙헬의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아니거든, 네가 뭘 알아……. 변명할 만한 말을 애써 떠올리려고 했지만, 곧바로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르커스를 망친 건 사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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