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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61화 (61/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61화

    마탑주들은 대대로 다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죽지 않고’ ‘대현자 칭호를 가지고 있으며’ ‘거의 모든 마법을 구사하는’ 인간이란 마탑의 마법사들 사이에서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었으니까.

    수많은 마법사가 내 앞에서 빌빌 기었다. 다른 데 가선 높은 몸값 받고 일하는 놈들이 무급으로 발 닦개가 될 테니, 자기를 제자로 삼아 달라고 들러붙는 게 귀찮아서 남쪽 숲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끔 결계까지 쳤다.

    돌이켜 보면 참 귀찮긴 했지만, 날 사이비 주교처럼 모셔 주는 마법사들 덕에 자존감 하나는 떨어지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그냥 마도구 하나 만들어서 ‘그래, 선심 쓴다’ 하고 던져 주기만 해도 무릎을 꿇고 감사하다 말하는 놈들이 천지에 널려 있었으니.

    앙헬도 사실 몇십 년 전에는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금이야 마탑주 자리에 올라 체면을 차리고 있지만, 저놈도 어렸을 때는 나한테 함부로 말도 못 걸었다.

    그러니 이렇게 앙헬에게 붙잡혀 무력화되는 상황에 감회가 새로운 거겠지. 무려 대현자인 내가 고작 마탑주 따위가 건 마법에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도 몰랐는데.

    역시 인간은 좀 착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진정한 대인은 사사로운 능력을 과시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기고만장하게 ‘나 대현자인데?’ 하고 살았더니 개 허접으로만 봤던 놈들이 득달같이 칼로 찌르고 마법 걸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벼도 아니었고, 진정한 대인도 아니었으므로 이런 수난을 겪고도 뻔뻔하게 살 예정이었다. 이 개자식들. 내가 제약만 풀려 봐라. 마탑을 내가 꼭 일 순위로 박살 내 준다. 치졸하게 복수해 줄 거라고.

    “쟤 죽이지 마.”

    팔에서부터 올라온 검은 문자들이 차차 목 부근에도 자리를 잡았다.

    이런 마법은 400년 대현자 생에도 처음 봤다. 마녀들이 독하게 마음먹고 건 저주처럼 주변을 맴도는 마나 자체가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

    기초는 속박 마법인 것 같은데, 그 위에 뭘 더 섞은 건지 감도 안 왔다.

    앙헬 이 자식, 이거…… 안 본 새에 수학 실력이 많이 늘었는걸? 나는 의식이 가물가물 멀어지는 와중에도 한네만의 안위와 앙헬의 마법 수식 계산 및 활용 능력에 감탄이나 하고 있었다.

    “저도 웬만하면 그러고 싶은데…….”

    “웬만하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한네만은 그냥 놔줘라. 너, 쟤 죽이면 나한테 뒈져.”

    “그러고 싶은데 말이죠. 이 친구, 마탑에서 도망친 인재더라고요.”

    “야, 사람이 살다 보면 집단에서 탈주 좀 할 수 있지…….”

    “어떻게 도망친 걸까, 참 궁금하긴 해요. 평균 이상이긴 하지만 뭐 대단한 마법사도 아닌 것 같은데. 물어봐도 대답이 잘 안 돌아와서.”

    너 같으면 대답할 수 있겠냐고.

    헛웃음이 터졌다. 내가 한네만이어도 도망친 집단의 우두머리가 ‘너 어떻게 도망쳤냐?’라고 물으면 입 꾹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할 거다.

    한네만은 앙헬에게 붙들린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쟤 목숨이라도 건져 주려고 가만히 있던 건데, 다 틀렸다.

    나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내 손목을 꽉 붙잡고 있는 앙헬을 떨쳐 내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평범한 인간이 이 마법에 당했다면 진작에 의식을 잃었을 터였다. 나도 지금 어질어질하니까.

    하지만 악법도 법이고 이빨 빠진 호랑이도 호랑이다.

    마법 사용에 제약이 걸려 아무것도 못 하는 팔자가 됐어도 난 영물이나 다름없는 대현자였다. 내가 좆 됐다는 건 알았지만,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친구, 몇 년 전에 마탑 탈출로 수배까지 떴던 친구라 죽여야 해요. 저도 그냥 놔드리고 싶은데, 제가 일단은 마탑주라서.”

    “어이없어. 마탑주 아니었어도 죽였을 놈이.”

    “아무튼, 명분이 있는 게 그럴듯하잖아요.”

    나는 한네만을 향해 작게 고갯짓을 했다. 내가 신호하면 앙헬을 뿌리치고 튀라는 일종의 신호였는데, 한네만은 겁에 질려 신호를 파악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 한네만이 죽는다면 내 입장에선 여러모로 곤란했다. 한네만의 죽음은 8할 정도 내 책임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에이사가 슬퍼하고, 붉은 매 용병단이 조만간 사기를 당하게 될 거라는 건 확실했다.

    나는 속으로만 혀를 찼다.

    카만의 왕을 상대할 때처럼 마나를 끌어모으는 건 불가능했다. 일단 내 체내에 남아 있는 마나 자체가 얼마 없었다. 카만 때 빡쳐서 그냥 되는 대로 터트렸더니 회복이 더뎠다. 역시 사람은 기분 따라 살면 언젠가 후회를 한다.

    게다가 상대는 그냥 마법사도 아니고, 마탑주 앙헬이었다. 마나를 끌어모으면 바로 알아챌 것이다.

    마법이 안 되면 몸이 고생하는 수밖에.

    나는 앙헬의 손을 떼어 내는 걸 완전히 포기하고, 그대로 내 손목을 꺾어 부러트렸다. 가물가물해지던 정신이 손목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 때문에 순간적으로 맑아졌다.

    내가 스스로 손목을 부러트리고 제 손에서 빠져나가자, 앙헬은 바로 한네만의 목을 틀어쥐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원하는 게 뭐야. 나 봉인하는 거?”

    “일단 제 목표는 그거 맞아요.”

    “그럼 라단타는?”

    “그쪽은 봉인 목표를 바꿨습니다. 3황자로.”

    “왜? 이런 갈대 같은 새끼들. 합의해서 의견 하나로 합쳐라.”

    “하하. 마법 못 쓰는 대현자보다 마법도 쓰고 검도 쓸 줄 아는 3황자가 더 위험해졌잖아요.”

    저 말이 나를 떠보는 건지, 아니면 진담인지 파악이 잘 안 됐다.

    눈을 가늘게 좁혀 뜬 채로 앙헬의 표정을 살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면 대개 티가 났다. 아무리 사기를 잘 치는 놈이라도, 자기 자신까지 속일 만큼의 거짓말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얼굴 근육이나 동공의 떨림까지 조절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앙헬의 심중을 파악하는 건 온갖 인간 군상을 다 겪어 본 내게도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만나 봤던 마탑주 중에서 가장 음습하고 이상한 걸 오래 연구한 놈이 바로 앙헬이었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저놈은 이공계 대학원에서 교수 생활만 1세기 정도 한 놈이란 소리다.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협상하자.”

    나는 너덜거리는 내 손목을 부여잡고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봉인 30년에 팔 하나 잘라 줄게. 걔 죽이지 마.”

    “흠. 30년은 너무 짧은데요. 50년은 어떠세요?”

    “……50년 하면 쟤 놔주고 이르커스한테 관심 끌 거니? 네 목적은 애초부터 나라면서.”

    불멸자의 몸은 어디 하나 잘려도 어차피 재생한다. 더럽게 아프기야 하겠지만, 내가 의식 없을 때 잘라 가라고 하면 괜찮겠지.

    한네만이 앙헬 손에 죽는 것보단 그게 나았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생각해 낸 차악이 이거였다. 최선을 선택할 수 없다면 차악을 선택하라고, 대한민국 입시 수시 전형이 내게 알려 주지 않았던가.

    “50년에 팔 하나. 그리고 피도 좀 뽑아 갈래요.”

    “……진짜 너는 개 미친놈이야.”

    “싫으세요? 그럼 이…… 한네만 씨? 죽일게요.”

    “개 미친놈 취소. 넌 최고의 마탑주다, 이 자식아.”

    그제야 앙헬이 한네만의 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어냈다. 내가 스스로 봉인당하겠다고 하자, 안 그래도 앳돼 보이는 얼굴에 생기가 파릇파릇 돌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예쁘장한 그 얼굴이 꼴 보기 싫어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진짜 살다 살다 남의 목숨 구해 주겠다고 내 발로 개 허접한 마도구에 봉인당하러 걸어 들어갈 일도 생기고.

    늘 하던 생각이 똑같이 들었다.

    아……. 역시 일찍이 뒈졌어야 했는데.

    ????????????

    이르커스는 제게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쳐 냈다.

    예상대로 사냥 대회는 그냥 이름만 사냥 대회였다. 사냥터 내에 동물 사냥이 목적인 사람의 수보다 인간 살해에 뜻을 둔 인원이 더 많았다.

    “이르. 너, 정말 적이 많네.”

    혼자서도 다 때려잡을 놈의 호위를 서고 싶지 않다며 초장부터 어디론가 이탈해 버린 쥬리아와 달리, 사밀라는 활동성이라곤 쥐뿔도 없을 것 같은 귀부인용 드레스를 입고 이르커스를 활기차게 쫓아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활기가 넘치는지, 사밀라는 이르커스가 별도로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호위로 따라온 트리스탄과 로버트를 보호해 주는 중이었다.

    덕분에 제 몸 하나만 챙기던 이르커스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멀끔한 상태로 다음 화살이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크게 따지면 적 자체는 하나야. 이복형제.”

    “로맨틱해.”

    “어느 부분이?”

    “피가 반만 섞였다는 거.”

    “당신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이르커스와 사밀라는 화살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든 말든, 마주 앉아 차라도 마시는 사람들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트리스탄 역시 심드렁했다. 로버트만이 사냥 대회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 버티냐고 칭얼댔다. 개중에선 그나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냥 다 죽여 버리고 왕관만 날름 차지했으면 더 편했을 텐데.”

    “그랬겠지. 하지만, 유안이 절대 안 된다고 그러던걸. 폭군 된다고.”

    “폭군 되면 뭐 어떻다고. 잘생긴 폭군은 인기 많아.”

    까르르 웃던 사밀라가 문득 사냥터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상한 낌새를 가장 먼저 눈치챈 탓이었다.

    “저게 네 반쪽짜리 형제야?”

    “일단은.”

    “흐음, 닮진 않았네. 난 저렇게 생긴 애들은 좀 별로더라. 샌님인 척하면서 뒤로 엄청 밝히거든.”

    이르커스 일행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평범한 사람들의 시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곳에 라단타가 있었다.

    호위 기사들과 함께 사냥 대회에 참여한 라단타는 멀리서 보기에도 퍽 그럴듯했다. 정복에 망토까지 두르고, 허리에는 검을 찬 데다, 머리는 평소와 달리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였다.

    이르커스만큼은 아니지만, 미남자라는 소리를 꽤 많이 듣는 라단타에 대한 평이 박해도 너무 박했다. 사밀라가 흐응, 하고 작게 콧소리를 냈다.

    검집에 제 검을 집어넣은 이르커스는 그런 사밀라를 향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트리스탄과 로버트를 뒤로 물렸다.

    “사냥은 잘하고 있니?”

    마치 이르커스가 호위 기사들을 물리길 기다렸다는 듯 라단타가 이르커스 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성큼성큼 다가왔다. 사밀라와 이르커스만 라단타를 관찰한 게 아니라, 라단타 역시 이르커스 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사냥 얘기를 꺼내는 목소리가 쾌활했다. 누가 듣는다면 서로를 치워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난 형제가 아니라, 퍽 가까운 형제 사이라고 오해할 수 있을 만큼의 친근함이 느껴졌다.

    “글쎄요……. 사냥 대회 우승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운이 따라 주질 않아서.”

    “저런…… 형평성에는 좀 어긋나겠지만, 내가 잡은 사냥감을 조금 나눠 줄까? 검술이든 마법이든 특출나기로 소문난 3황자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도 부끄러울 테니까 말이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라단타는 속으로 이르커스를 싸가지 없는 새끼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르커스 역시 라단타를 성가시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속마음을 숨기는 데 능숙한 탓에 드문드문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그런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에 덫을 쳐 놓고 기다리다가 엄청난 걸 잡아서 말이야.”

    “…….”

    “대륙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한 종이 제 발로 덫을 향해 뛰어들었거든.”

    큰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사냥 대회의 우승은 제가 될 거라며 웃는 라단타의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이르커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래도 여전히 관심 없니,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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