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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60화 (60/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60화

“당신은 사냥 대회에 참가할 필요 없어. 원래 그런 자리 안 좋아하잖아.”

불길한 예감은 어째 틀리는 법이 없다.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르커스를 바라보았다.

옛날에 내가 캐러벨에 안 데려가겠다고 선 그었던 걸 복수라도 하는 건지, 이르커스는 뭐만 하면 ‘유안은 굳이 할 필요 없어’라고 하며 내게 원하지 않는 자유 시간을 줬다.

물론, 왜 저러는지 이유는 안다. 내게 걸린 마법 사용 제약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지만, 에델라이드의 말대로 적어도 한 세기는 갈 모양이었다.

마침 강력한 마녀가 둘이나 있으니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를 없애 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지만, 마녀라 할지라도 페널티에 간섭할 수는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괜히 페널티 없애려다 불똥 튈지 모르니까 도와주기 싫다나? 예카리나와 달리, 그 후손들은 하나같이 다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었다.

계약을 어기기 전이면 페널티가 덜한 방향으로 파기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어긴 뒤라서 더 간섭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어렵다는 애들 데리고 페널티 풀어 달라고 더 징징거리기도 좀 그랬다. 나는 죽지 않지만 쥬리아나 사밀라는 목숨이 하나였다. 괜히 나 도와준다고 나섰다가 어디 크게 다치거나 목숨 잃는 것보다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비마법사로 사는 게 나았다.

하지만 이르커스가 이렇게 날 보호하려고 들 때면…… 솔직히 좀 같잖았다. 자식새끼 키워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서류나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좀 열 받았다.

“3황자가 참여했는데 그 옆에 대현자가 없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지 않겠어?”

“연회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니 다들 이해하겠지. 대현자는 이런 자리를 싫어하시는구나, 하고.”

“너 정말 내가 악해져서 이래?”

“…….”

“내가 마법을 못 써서, 너 하나 황제로 못 만들어 줄까 봐 이러냐고.”

실상 이르커스는 나 없이도 황제가 될 만한 자질이 차고 넘쳤다.

이놈이 주인공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수틀리면 그냥 손에 피 좀 묻히고 왕관을 탈취하면 그만이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얘랑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항상 뜻대로 되지는 않는 거니까.

“위험할 게 뻔한 자리에 데려가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잊었나 본데, 난 안 죽어.”

“하지만 다치긴 하잖아. 아픈 건 그대로 느끼고.”

이르커스가 훑어보는 척하던 서류들을 책상 한구석으로 완전히 밀어 버렸다. 힘에 못 이겨 구겨진 서류 끝이 처량했다.

내가 카만에 갔다 돌아온 이후로 이르커스와 나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차라리 이르커스가 ‘너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하면서 노발대발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렸더라면 달래 가면서 사이를 회복할 수라도 있었을 텐데. 이르커스는 먼저 대형 사고부터 쳐 놓고 내가 오길 기다린 주제에 내게 감정적으로 구는 대신, 묘하게 거리를 뒀다.

처음에는 내가 약해져서 애가 날 하찮게 여기나 싶었지만, 시간을 두고 지켜보니 이르커스가 내게 하려는 건 그냥…… 과보호였다. 아무리 마법 능력이 사라졌어도 죽지 않는 내게 이러는 건 이르커스 하나뿐일 것이다.

“마녀들이 당신 대신 동행해 주기로 했어.”

그 마녀 자매도 참 이해가 안 갔다. 같은 핏줄이 도와달라 그런다고 냉큼 도와주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도와달라고 할 때는 다들 자기 목적만 말하면서 제대로 반응도 안 하더니. 피가 아무리 물보다 진하다지만 이건 명백한 차별이다.

쥬리아는 이 모든 상황에 심드렁한 눈치였지만, 사밀라가 이상하리만큼 이르커스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어 했다.

오지랖 넓고 남에게 간섭하기 좋아하는 사밀라가 또 본인다운 짓을 했다고 넘기기엔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마탑주 대항으로 데리고 들어온 게 아니라면서 왜 마녀들을 끌어들인 건지 이르커스가 설명해 주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황궁에 오래 기거했다간 필시 병들게 되는 마녀다. 이르커스가 기거하는 곳에 편의를 봐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너…… 그 마녀들은 어떻게 만났고, 왜 데려온 거야?”

나는 늦게 귀가한 자녀에게 ‘지금이 대체 몇 시냐’ 하고 추궁하는 부모님 톤으로 이르커스에게 마녀들에 관해 물었다.

생각해 보면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는 데다,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게 아니면 사람들 속에 섞여 사는 걸 싫어하는 마녀들을 찾아내서 포섭한 것도 참 대단했다.

“그냥 우연히 만났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리고 도움 받을 일이 있어서 불렀고. 황궁처럼 사람 많은 곳에 오래 붙들어 둘 수 없으니, 일이 끝나면 둘 다 돌아갈 거야.”

결과적으로 이르커스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답변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근처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르커스가 마녀들로부터 도움 받겠다는 일이 뭔지 정확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짐작 가는 부분은 하나 있었다.

“너, 함부로 나와의 계약을 파기하려고 하지 마.”

“…….”

“너랑 내 계약은 내 목숨이 걸려 있는 거니까……. 네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르잖니.”

마녀 둘에게 이르커스가 도움 받아야 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결국 나와의 마법 계약 정도밖에 없었다. 사밀라로부터 ‘이르커스가 안 되면 내가 널 죽여 주겠다’라는 말까지 들은 이상,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충분했고.

나는 바보가 아니다. 따지자면 눈치는 빠른 편이었고, 정황을 보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을 만큼은 노련했다. 열일곱 살밖에 안 된 이르커스의 심계를 파악하지 못할 만큼 나이를 헛먹지는 않았다.

“하나만 물어보자. 황제가 되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나를 죽이고 싶지 않은 거야?”

전자라면 계약 내용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조정해 줄 수 있다. 하지만 후자라면…… 그건 나도 양보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이르커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꼿꼿했던 자세가 무너지며 내가 알던 그 어린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날 좋아하고, 내게 서운해하고, 가끔은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그 얼굴.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

“…….”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면, 난 분명 미쳐 버릴 테니까.”

????????????

결국, 나는 사냥 대회에 불참했다. 사실 그렇게 가고 싶은 행사도 아니었다. 불쌍한 동물들 사냥터에 풀어 놓고 사람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사냥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

멜킨 소백작이 약혼자로서 이르커스를 응원하기 위해 사냥터 초입에 마련된 임시 거처에 가 있었고, 트리스탄과 로버트는 이르커스를 따라 사냥 대회에 참가했다.

마녀를 둘이나 데리고 들어갔으니, 웬만한 천재지변이 아니고서야 이르커스는 안전할 터였다. 사냥터에 갑자기 드래곤이라도 출현하지 않는 이상 위험해질 일은 웬만하면 없을 테니까.

“너, 아프다더니 두 발로 잘 걷네.”

그리고 나는 한네만을 이끌고 내 방으로 찾아와, 차를 얻어 마시고 있는 앙헬의 뻔뻔한 낯짝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한네만은 앙헬 옆에 붙들린 채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대현자님이 지지대로 마법사 하나 보내 주신 덕에 이렇게 부축 받으면서 올 수 있었죠.”

“야, 애 놀란다. 겁주지 말고 차나 마셔.”

“친절에 감사를 표한 건데 겁주지 말라니. 서운한데요.”

능구렁이 같은 새끼.

이르커스가 없는 새에 날 찾아온 이유야 뻔했다. 그 관 형태로 만들었다는 마도구를 슬슬 사용해 볼 생각이겠지. 마침 내가 약해진 데다 사냥 대회 때문에 혼자 있을 테니까.

“총 맞은 건 다 나았니?”

“아직이요. 역시 대현자님이 만드신 마탄다워요.”

“너도 나름 마탑주라고 그거 맞고도 살아 있는 거 보면 참 대단하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넌 목숨이 한 여섯 개는 될 거야.”

“칭찬 감사합니다.”

앙헬은 나름대로 고상하게 차를 한 모금 홀짝인 뒤,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서.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과 달리, 테이블을 넘어 내 손목을 쥐는 앙헬의 손은 뱀처럼 차가웠다. 만약 내게 마법 능력이 남아 있었더라면 이 새끼는 방금 낙뢰를 맞았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고 하자, 인질이나 다름없는 꼴로 앙헬 옆에 앉아 있는 한네만이 눈에 들어왔다.

한네만은 내가 보낸 놈이니 내 책임이기는 했다. 나는 앙헬을 바로 뿌리치는 대신, 앙헬이 내게 뭘 하려는 건지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갑자기 앙헬의 주머니 안에서 그 커다란 관 형태의 마도구가 튀어나오지도 않을 것이고, 앙헬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당장 날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앙헬에게 붙잡힌 손목에서부터 검은 글자들이 내 팔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마법이었다. 오래 살면서 온갖 마법 다 봤지만, 이런 수식으로 전개되는 마법은 나도 처음이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 이 마법이 뭔지 집중해서 확인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순식간에 속이 매스꺼워지고 두통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는 마녀처럼 저주도 못 걸 텐데, 꼭 마법이 아니라 저주의 일종 같았다.

“다 끝나면 한네만은 놔줘라.”

“정말…… 쓸데없이 물러지셨군요.”

“너한텐 아직 돌처럼 딱딱하니까 히죽거리지 마.”

내 말에 앙헬이 유쾌하게 웃었다. 이놈이 웃을 때마다 내 골이 같이 울렸다.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한네만만 이 방에서 나가고 나면 역공이라도 펼칠 생각이었다.

이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대현자를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내가 어? 전대 마탑주들이랑 술도 마시고, 싸움도 하고, 때려눕히고 그랬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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