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59화
앙헬은 침상에 누운 채로 혼자 헛웃음을 흘렸다.
다시 생각해도 3황자와 대현자는 참 우스운 관계였다. 불멸자를 향한 필멸자의 동경이나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다수 인간이 영원불멸을 꿈꾼다. 자신에게 오랜 세월이 허락되면 더 강해지고, 부유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죽지 않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가슴을 찔러도, 목을 쳐도 죽지 않는다면 그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원불멸의 존재는 그래서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유안 역시 본인 입으로 영생을 ‘저주’라고 칭하니까. 불멸이 기꺼웠다면 유안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죽음을 찾아 헤매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보통 유안을 경외하는 한편으로 꺼림칙하게 여겼다.
앙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앙헬은 제 마법 실험의 재료로써 유안을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 호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어딘가에 번개를 한 번 내리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유안은 아무렇지 않게 몇 초 만에 낙뢰를 쳤다. 수식을 계산하거나 제게 가진 마나 양을 가늠하는 과정이 생략돼 있었다. 인간보다는 신에 가까운 경지였다.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 자주 까먹는다는 점에서조차 그랬다.
하늘에서 눈을 내리게 하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린다. 유안이 마음먹고 새로운 종교를 세웠다면 헤누스교나 엘리오스교는 꼼짝없이 신자들을 빼앗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앙헬은 일종의 신이나 영물을 경배하는 것처럼 유안을 모실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었다.
유안이 가진 영생 저주를 궁금해하고, 유안이 만든 마도구들에 눈독을 들이면서도 누군가 ‘유안을 사람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떨떠름하게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신도 영물도 따지자면 괴물이다. 같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종이 다른 생물을 같은 인간처럼 사랑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르커스는 유안을 사랑했다. 앙헬은 그게 참 우스웠다. 괴물끼리 서로 알아보는 법이라도 있나 보지.
이르커스는 마녀의 후손이라 선천적으로 뛰어난 마법 재능을 타고났다. 앙헬의 눈에도 이르커스의 특별함이 보였다.
만일 이르커스가 유안이 아닌 다른 스승을 만나 좋은 방향으로 올바르게 성장하고, 스승에게 삿된 마음을 품지 않았더라면 이르커스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됐을 것이다.
그만한 재능을 가진 이들은 몇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인재고, 이르커스는 사생아 출신이긴 하지만 황자라는 적법한 신분도 있었으니까. 환경은 나빠도 배경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하필 스승으로 삼은 상대가 괴물이었기 때문에 제자 역시 보고 배운 대로 괴물로 자랐다. 게다가 두 괴물은 수많은 범인 사이에서 서로를 유독 애틋하게 여겼다.
앙헬이 이르커스 앞에서 일부러 얼쩡거린 건 이르커스를 사적으로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안이 얽힌 문제에 이르커스가 ‘이성적으로’ ‘인간답게’ 반응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르커스는 앙헬의 짐작대로 유안과 관련된 문제엔 너무 쉽게 걸려들었고, 문제가 될 걸 알면서도 앙헬을 죽이려고 들었다.
다른 부분에선 정상적인 사회성을 보이던 이르커스가 유안과 관련된 문제만큼은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게 앙헬에게는 참으로 유쾌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유안을 묶어 둘 방법을 찾아냈으니까.
유안도 이르커스도 서로만 연관되었다 하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추문을 잠재우기 위해 약혼자를 들였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이 사제 지간이 서로에게 불명예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눈치챈 지 오래였다.
“앙헬.”
미친 사람처럼 앙헬이 혼자 히죽거리고 있는 동안, 라단타가 병문안이라는 형식적인 목적을 대고 앙헬을 찾아왔다.
몸을 일으키려는 노력이나 예를 갖추려는 태도 한번 없이,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 라단타를 바라보는 앙헬의 푸른 눈에 이채가 서렸다.
“황자님은 악어를 사냥해 본 적 있으십니까?”
“……악어?”
“황궁 사냥터에 악어는 없으니, 아마 없으실 테죠.”
라단타는 총에 맞은 뒤로 뜬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놓는 앙헬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단정한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유안이 궁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어떻게 그 관에 대현자를 밀어 넣을지에 관해 논의하려고 왔더니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었다.
그런 헛소리나 할 거면 이만 돌아가겠다고 말하려던 라단타는, 기이하게 반짝거리는 앙헬의 푸른 눈을 보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모든 짐승 사냥이 대개 그렇듯이 악어 역시 새끼부터 잡습니다. 어린 새끼를 붙잡아 두면 어미는 절대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거든요.”
“이르커스를 먼저 붙잡아서 유안의 유인책으로 쓰자는 소리인가?”
“과연 이해가 빠르십니다. 아무리 이가 날카로운 악어라도 쇠약해져 있는 데다, 자식이 볼모로 잡혀 있으면 작살에 꿰뚫리고 마는 겁니다.”
라단타는 앙헬의 설명을 듣고도 구겨진 얼굴을 펼 수 없었다.
이르커스는 어리지만, 너무 강했다. 유안이 없는 틈을 타 이르커스를 죽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나 라단타 쪽이 입은 피해만 점점 더 커질 뿐이었다.
대륙 전체를 뒤져도 몇 명 찾아보기 힘든 마검사에 웬만한 독에는 내성이 있고, 호위로 붙은 트리스탄 역시 작은 용병단의 단장직을 수행해 온 만큼 실력자였다.
베첼 공작이 비밀리에 암살자로 키웠던 인물들이 이르커스와 트리스탄 손에 몇 명이나 죽어 나갔는지 따지자면 끝도 없을 터였다. 지금은 차라리 마법 사용에 제약이 걸린 데다, 약해진 상태라는 대현자만을 노리는 게 더 합리적이었다.
“저쪽도 우리가 대현자를 노릴 거라고만 생각하지, 3황자를 노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뭐든 사냥을 잘하려면 굴을 세 개쯤 파 두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앙헬은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치료 마법을 써도 마탄이 관통하고 지나간 복부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과연, 대현자가 만든 마도구다웠다.
“3황자를 목표로 삼아 가두고자 하면, 대현자는 3황자를 위해 제 발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는지 모르겠군.”
“귀한 총에 맞으니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
“대현자가 스스로 봉인시켜 달라고 찾아오게 만들 만한 방법을 생각해 보면 종래에는 늘 3황자가 나오거든요. 서로 때문에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야 저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라단타의 시선이 앙헬의 복부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붕대로 감아 두고 있으나, 낫지 않은 상처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배어 나왔다.
“네 생각대로 흘러가지 못한다면 마탑은 그 책임을 지게 될 거야. 당신이 고집해서 목표를 대현자에서 3황자로 바꿔 놓은 거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
“이게 성공한다면 당신도 저도 누구보다 빠르게 3황자를 죽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기억하세요. 그를 못 죽이면, 우리가 죽습니다.”
????????????
“앙헬 걔도 참 대단하다. 총 처맞고 자리에서 일어난 건 다행인데, 이걸 없던 일로 해 주겠다니.”
“마탑도 로베인 제국이랑 척지고 싶지 않나 보지.”
“나였으면 합의금만 몇천만 갤런 뜯었어.”
트리스탄이 옆에서 쭈욱 기지개를 켰다. 깊게 생각하면 마음의 병이 오니, 그냥 잘된 일은 잘됐다고 생각하며 넘어가라는 구시렁거림이 뒤따라왔다.
트리스탄처럼 살 수만 있으면 영생도 꽤 살 만할 것이다.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이랑 생각 많은 놈 위에 눈치 없는 놈이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거겠지.
마탑은 마탑주를 쏜 이르커스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근신 처분 역시 금방 거둬졌다.
앙헬이 개인적인 마법 연구에 이용할 수 있게 이르커스의 피를 달라고 요청한 데다, 내가 만든 마도구 몇 개를 살펴보고 싶다고 비공식적으로 요구한 걸 제외하면 합의금을 달라는 말도 없었다.
피와 마도구 정도면 아주 남는 장사였다. 앙헬은 거의 죽을 뻔한 데다 한네만의 보고를 들어 보니 총상이 다 낫지 않아, 아직까지도 침대 생활 중이라고 했으니까.
나는 검에 찔리고, 걔는 총에 처맞고……. 마법사들 수난 시대가 아닐 수 없었다.
“좋게 끝난 게 아닌 것 같아서 꺼림칙해.”
“당신은 마탑주만 엮여 있으면 뭐든 너무 의심하는 경향이 있소.”
“속에 뭐가 들었을지 모르는 인간이니까. 라단타 같은 애송이랑은 결이 달라. 지금도 평범한 인간이 할 만한 대처는 하나도 안 하고 있잖아.”
그래도 라단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측이 가능한 인물이라면, 앙헬은 생각이라는 걸 하긴 하는지 궁금한 인간이었다.
테리즈나 에델라이드처럼 신념과 관계로 움직이는 인물도 아니었고, 라단타나 베첼 공작처럼 목표와 야망 때문에 움직이는 인간도 아니었다.
앙헬은 연구와 재미로만 움직이는 인간이었다. 자기 연구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를 재료로써 원하고, 재미있기 때문에 남의 제국 황위 싸움에 관여한다.
그러니 이르커스와는 별개의 방향으로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떤 계획을 세울지가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이르커스는 그냥 예고 없이 갑작스러운 일을 막 터트리는 스타일이고.
“이쯤 되면 라단타가 눈이 새빨개져서 날 잡아들이려고 할 줄 알았는데 조용한 것도 이상하고.”
“좋은 일이지, 뭘.”
“넌 정말 생각 없이 산다.”
“그게 내 장점이오.”
이르커스의 부탁에 따라 내 호위 노릇을 해 주고 있는 트리스탄이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그렇게 만만하냐는 질문도 따라붙었다.
만만하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구김살 없는 뇌로 살아왔는데 지금까지 눈 하나만 날아간 걸 보면, 역시 몸이 건강해야 머리가 고생을 안 한다는 현인들의 말은 진짜인 모양이었다.
“곧 황궁에서 사냥 대회를 주최한다고 했지.”
“이제 곧 겨울이니까. 연간 행사를 안 할 수는 없지 않소.”
“아마 다들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야.”
서늘해진 날씨 탓에 황궁 정원의 분수대는 이번 주부터 물을 뿜지 않고 있었다. 마법사를 동원해서 연회 등의 행사가 있을 때만 분수를 가동하고 그게 아닐 경우에는 마법사와 수자원 모두를 아끼는 것이다.
4세기 전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예카리나를 써먹으며 분수를 가동했던 걸 생각하면 참으로 인도적인 처사였다.
달라진 세상을 처음 느낀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400번이 넘는 겨울을 대면했으면서도 이번 겨울은 낌새가 좋지 않았다. 마법 능력을 잃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라지지 않은 흉터 때문인지……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