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58화
마탑주 피습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라단타와 앙헬은 내가 없다고 곧장 이르커스에게 갉작거리는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진 않았다. 그들도 이제 아는 것이다. 이르커스가 암살자 몇 명으로 처리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게다가 이르커스는 내가 없는 동안 기특하게도 멜킨 소백작을 비롯해 수많은 정치권 인사와 돈독한 관계를 맺어 놓은 상태였다. 사밀라와 쥬리아도 멜킨 소백작의 도움을 받아서 입궁시킨 거라고 하니, 내가 없는 동안 약혼자와의 사이도 많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르커스를 건드리는 건 라단타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이르커스가 뭐 하나 잘못되면, 제일 먼저 의심을 사는 건 당연히 계승 싸움의 경쟁자인 라단타일 테니까.
거기에 라단타의 친동생이자 이르커스의 이복동생인 막내 황녀 마리아가…… 이르커스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말았다. 라단타와 마리아의 외조부인 베첼 공작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아마 혈압이 올라서 쓰러지기 직전일 것이다.
마리아는 철없고 고집 센, 전형적인 공주님 스타일의 어린애인데 정원에서 우연히 이르커스를 마주친 이후로 이르커스의 반짝거리는 외모에 홀려 이르커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고 했다.
막내 황녀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보지 않아도 어떤 스타일일지 딱 감이 왔다. 예카리나를 비롯해 금사빠 마녀들을 그간 너무 많이 만나 온 덕이었다.
아무튼, 이 막내 황녀가 노골적으로 이르커스를 쫓아다니기 시작하면서 라단타의 심기는 두 배로 불편해졌다.
나중에 다 자라면 정치적 사유로 결혼 시장에 내다 팔 친동생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와 황위 싸움 중인 데다, 몇 번을 시도해도 죽지 않는 이복동생을 쫓아다니면 고깝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라단타는 결국 마리아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다. 별것도 아닌 이유를 대서 이르커스를 쫓아다니는 걸 못 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집념의 황녀였다. 근신 처분을 받자마자 라단타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듯 온갖 방법을 써 탈출해선 이르커스를 마저 쫓아다닌 것이다.
게다가 이르커스는 마리아에게 모나게 굴지 않았다. 마리아의 나이가 어린 건 둘째 치고 마리아가 자기를 쫓아다닐 때 라단타의 표정이 썩어 드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라단타는 앙헬을 통해 마법으로 마리아를 가뒀는데, 관이 아니라 방에 가둔 거지만 원리는 나를 봉인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관 형태의 마도구와 비슷하다고 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의식을 잃고 자기 방에 갇힌 마리아는 사흘 뒤에 깨어나 라단타와 앙헬에게 어마어마하게 분노를 터트렸다고 했다.
그리고 앙헬은……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걸, 그 능글맞고 허세 가득한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이르커스에게 이죽거리고 만 것이다.
‘황녀님은 고작 사흘이었지만, 대현자님은 영원히 가둬 둘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왜 나 없어서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애 면전에 대고 하느냐고. 앙헬 걔도 참 생각이 부족한 마법사다.
앙헬의 도발은 심지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르커스가 마녀인 쥬리아와 사밀라를 비밀리에 입궁시킨 후로 앙헬은 더욱 기고만장해진 것이다.
이르커스의 말에 따르면 두 마녀는 앙헬이 개발한 마도구 대비책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마도구 개발에 성공해 자아 존중감이 황궁 시계탑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앙헬이 보기엔 이르커스가 자기를 견제하기 위해 강력한 마녀들을 포섭한 것으로 보였을 터였다.
‘고작 마녀 둘 가지고 되겠습니까? 황자님은 정말 순진하시군요.’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앙헬 새끼가 그냥 아주 자기 무덤을 판 거였다. 불로불사 연구하는 놈치고 너무 죽고 싶어서 안달 난 거 아니냐고.
결국, 이르커스는 내가 불법 경매장에서 뜯어낸 총과 마탄으로 앙헬을 쏴 버렸다. 분명 잘한 일이 아닌데 내 입에서는 홀린 듯이 ‘잘했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잘하긴 뭐가 잘해.”
이르커스의 호위 기사 역으로 마찬가지로 방에 구금돼 있던 트리스탄이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볼 업무라도 있는 이르커스와 달리, 할 수 있는 일 하나 없이 방 안에 며칠이나 갇혀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기껏 대현자 당신이 정석적인 루트로 정치해서 애를 황제로 만들려고 노력 중인데, 이르커스가 다 된 스튜에 재 뿌린 거라고.”
“그럼 스튜 다시 끓이면 되지. 앙헬이 죽은 건 아니라며. 안 죽었으면 문제없어.”
“마탑이 어떻게 나올 줄 알고?”
“마탑이 강경하게 나오면 팔 하나 잘라 주지, 뭐. 실험 재료로 쓰라고.”
“……유안.”
나와 트리스탄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르커스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마탑에 나를 실험 재료로 넘기겠다는 소리가 이르커스의 속을 긁어 놓은 것 같았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외적인 이유는 거슬려서가 맞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라단타 쪽이 당신에게 마법 사용 제약이 걸렸다는 걸 알아.”
“소문 한번 빠르네.”
“심어 두거나 매수한 첩자들이 많을 테니까. 라단타가 부리는 기사들이나 다른 마법사들은 당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지만, 앙헬은 위험하다며.”
“내가 아무리 마법 사용을 못 해도 고작 100살 좀 넘은 애한테 밀릴까 봐?”
“그 몸을 하고 잘도 그런 말을 하네.”
이르커스의 시선이 내 복부로 내려갔다. 옷으로 꽁꽁 싸맨 데다 로브까지 걸치고 있는데 잘도 내 부상 위치를 파악하는 게 참 놀라웠다.
이건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 때문이지, 내가 약하기 때문이 아닌데……. 하지만 이 꼴론 변명해 봐야 이르커스한테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았다.
에델라이드가 카만의 실권을 잡고 오랜 세월 집권해 온 카만 왕족의 씨를 말려 준다면 내가 다시 이만큼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앞에 (구)가 붙어야 하는 카만 왕족과의 마법 계약이니, 그 핏줄을 타고난 인물이 뛰쳐나와 ‘조상의 원수!’ 하고 내게 검을 휘두르지 않는 이상, 이 정도로 회복되지 않는 부상을 입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터였다.
카만 왕족들도 딴에는 ‘왕족’이었으니, 여기저기 결혼해서 후손을 퍼트려 놓기는 했을 거다. 나 스스로 치료 마법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몸을 사려야 하는 건 맞지만, 남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랬다.
“신관들도 바로 못 고치는 검상을 달고 와서…… 마법도 못 쓰는 상태로 마탑주를 이기겠다는 거야?”
“나 대현자야. 마탑주 따위랑은 상대가…….”
냉담한 보라색 눈이 나를 바라봤다. 저런 차가운 시선을 받아 본 건 처음이라, 문장을 끝맺기가 어려웠다.
“당신은 지금 나보다 약해.”
“…….”
“트리스탄보다도 약할걸. 보유하고 있던 마나도 폭발을 일으키느라 다 끌어 썼을 테고, 마법은 사용할 수 없고…… 죽지 않는다는 걸 빼면 당신은 지금 이 방에 있는 그 누구보다 약해.”
자존심에 금이 쩍쩍 가는 소리가 들렸다.
억울하다. 지금 내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제자한테 약하단 소리를 들은 건가? 이 내가? 새파랗게 어린 제자한테?
하지만, 속이 상하는 것과 별개로 이르커스의 저 말은 사실이었다.
로버트 정도는 요령으로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트리스탄을 마법 없이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리고 이 방 안에서 마녀 둘과 이르커스를 제외하면 그나마 약체인 트리스탄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건 내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약해진 대현자는 필요 없어?”
“유안.”
“단물 다 빨았으니 뱉으려고?”
트리스탄과 두 마녀가 우리 둘의 말싸움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나도 나잇값을 못 하기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인간이라 모난 말이 툭툭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이르커스가 그런 게 아니라며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르커스의 손을 탁 쳐 냈다.
테리즈의 말에 흔들려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의 존재를 알면서도 별거 아니겠지, 하며 에델라이드를 도왔던 게 후회스러웠다.
“기껏 걱정돼서 아픈 몸 이끌고 돌아왔더니. 스승한테 못 하는 말이 없다, 너도.”
이렇게까지 신경질을 부릴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 상한 자존심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내게 손이 쳐 내진 이르커스가 자기 얼굴을 한 번 손으로 쓸어 넘겼다. 잘 정돈됐던 금발이 얼굴 위로 가닥가닥 흩어졌다.
“앙헬이든 라단타든, 약해진 당신을 노리면 난 정공법이고 뭐고 다 죽여 버릴 거야.”
저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밀라와 언제까지 이 꼴을 지켜봐야 하느냐고 사밀라를 향해 속닥거리는 쥬리아를 이끌고 방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내가 네 스승이 돼선 안 되는 거였는데.”
날 죽여 줄 재목이라고 후다닥 제자로 삼은 것 역시 후회스러웠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르커스와 관련된 내 모든 선택은 전부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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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풀어, 유안.”
“나 화 안 났는데?”
“자존심 좀 그만 세우고. 대현자라는 칭호, 옛날엔 부끄러워하더니 요즘은 목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거 아냐?”
“나잇값 못 해서 별수 없어.”
쥬리아는 어디로 보내 버렸는지 사밀라 혼자 내가 앉아 있는 황궁 정원 벤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잇값 못 한다는 말에 사밀라가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너도 많이 변했구나.”
“요즘 나한테 변했다는 말 하는 게 유행이니?”
“세 명 이상이 네게 이런 말을 했다면, 그건 유행이 아니라 진실이지.”
“거지 같은 진실이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는 생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하기만 한 인물은 수능 지문으로 나올 만한 고전 소설에서나 존재한다.
인간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마찬가지로 완전히 비양심적으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성격이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다 보면 세상을 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긴다. 이런 건 살아 있는 존재들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진짜 문제는 이런 변화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에 있다.
“이르커스는 널 사랑해.”
사밀라가 제 두 뺨을 양손으로 감싼 채, 공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내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을 꺼내 들었다.
이래서 금사빠들이 무섭다. 사랑에 관련해서는 누구보다 눈치가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도 이르커스를 사랑하고.”
“……아니야.”
부정의 말을 내뱉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라는 내 말에 사밀라가 마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서로 상처 주고 화를 낼 필요가 없지. 네가 잘하는 무시와 외면으로 일관해 버리면 그만일 테니까.”
“그건 내 죽음과 계약 때문에…….”
“유안. 변명은 그만둬. 부정하고 싶겠지만, 한 사람을 망쳤다는 후회가 드는 건 그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하기 때문이야.”
심장이 불온하게 두근거렸다. 낫지 않은 복부의 검상이 욱신거렸다.
사밀라는 이미 나를 한차례 찔러 놓고, 다른 검으로 한 번 더 찌르려는 매정한 검사처럼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죽음과 애정 중에 끝까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
“지금까지의 정을 봐서, 그때는 내가 기필코 황제 자리에 올라서 널 이르커스 대신 죽여 줄게. 마녀답지 못하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