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57화
“며칠이나 지났어?”
“일주일.”
“슬슬 돌아가야 해.”
“그 꼴을 하고? 이르커스가 날 죽이러 올걸.”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에델라이드가 내 어깨를 콱 붙잡아 다시 눕게 만들었다.
팔이 사라진 자리에 금속으로 만든 팔을 덧붙여 마법을 걸어 둔 게 효과가 좋았는지 에델라이드는 전에 비해 오히려 힘이 세진 느낌이었다. 아니면, 내가 약해진 걸 수도 있었고.
“마법 제약은 언제 풀리는 거람.”
“한 세기는 가지 않겠어? 당신, 너무 대차게 마법 계약을 위반해 버렸으니까.”
“마법 계약…… 이렇게 거지 같은 줄 알았으면 안 했지. 다신 안 맺어.”
마법사들이 왜 마법 계약을 싫어하는지 이해가 됐다. 간단한 계약이라면 위반 시 페널티도 적지만, 오래되고 복잡한 계약일수록 페널티가 큰 모양이었다.
“한네만이 이르커스한테 잘 전했을지 모르겠네.”
“갑자기 한네만이 왜 나와?”
“……몰랐어? 에이사랑 한네만이랑 서로 연락되잖아. 걔네 특이 체질이라, 통신 마법 안 쓰고도 자기들끼리 연락 주고받을 수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내가 좆 됐음을 느꼈다.
뭐라고? 왜 그걸 이제 말해 줘? 아주 기특한 마법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에이사를 향해 처음으로 배신감이 들었다.
내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지자 에델라이드가 황급히 대화 주제를 돌렸다. 에델라이드 입장에서는 한네만이 내 쪽에 있었으니, 그 남매의 특수 능력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서 말을 꺼냈다가 낭패를 본 모양이었다.
“그럼 이르커스가 지금 내 꼴이 어떤지 다 안다는 거네?”
“아마 알겠지? 난 그 음습한 놈이 당신한테 감시 안 붙였을 거라고 생각 안 해.”
“야, 이르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 애가 좀 과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음습한 인간은 아니야.”
“진짜 제자에 대한 콩깍지도 이 정도면 병이다……. 근데, 직접 행차하지도 않고 별다른 전언도 없으니 괜찮은 거 아닐까? 당신은 이르커스를 너무 과보호해. 걘 이제 열두 살이 아니라고.”
에델라이드의 입에서까지 ‘과보호’라는 단어를 들으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열일곱 살이거나 열두 살이거나 나랑은 똑같이 388살 차이인데, 이르커스가 여든이 된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이였다.
“너도 나한테 잔소리할 시간에 테리즈한테나 효도해.”
“…….”
“테리즈한테 가서 미안하다고 하라고. 내전에서 이기고 네가 살아 있으니 망정이지, 넌 하마터면 테리즈가 물려준 모든 걸 잃을 뻔했어.”
“대현자한테 이런 소리도 듣고, 내가 죽다 살아나긴 했나 보다.”
테리즈 펄번은 아마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평균 수명이라는 게 있었고, 테리즈는 이미 그 평균 수명을 넘은 지 오래였다.
게다가 에델라이드가 내전을 일으킨 것 때문에 심적으로 충격까지 받은 상태였다. 보통 노쇠한 인간들은 이런 상황에서 오래 살지 못했다.
“테리즈가 죽기 전에 착한 손녀 노릇을 해야지.”
“당신, 제법 인간적으로 변했네.”
“내가?”
“그래. 이르커스 때문인가. 웃기단 말이지…… 이르커스는 물러 터진 어린애였다가 당신 때문에 완전 성격 버린 어른으로 자랐는데, 오히려 당신이 역으로 인간적으로 변하다니.”
“너 내 잔소리 듣기 싫어서 지금 또 말 돌리는 거지?”
에델라이드가 내게 무슨 말을 하겠냐며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좀 의외였다. 에델라이드를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역사 공부를 좀 해 보면 전후에 나 같은 위인을 토사구팽하는 지도자가 훨씬 많기 때문이었다. 한국사에도 나오지 않던가. 선조가 이순신을 토사구팽하는 장면이.
나는 에델라이드가 내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내가 약해진 틈을 타 라단타 쪽과 접선이라도 할 줄 알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꽤 거래 가치가 높은 인질이니까.
하지만, 에델라이드는 그러지 않았다.
테리즈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고, 에델라이드가 신의와 신념을 중시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에델라이드는 나를 팔아넘기는 대신, 헤누스교의 신관을 불러들여 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애썼다.
“아무튼, 당신에겐 빚을 졌어.”
“알면 됐다.”
“재수 없게 말해서 고마움 깎아 먹지 말고. 나중에 이르커스랑 사이 나빠지면 카만으로 와. 내가 고용해 줄게.”
“카만은 이제 지긋지긋해. 이르랑 사이 나빠지기 전에 내가 이번에야말로 뒈져야지.”
내 죽는다는 소리에 에델라이드가 코웃음을 쳤다. 아주 기고만장한 태도였다.
“장담하는데, 당신 못 죽을걸?”
“이게 전쟁 이기게 해 줬더니 면전에 대고 악담을 하네.”
“이르커스가 과연 당신을 죽게 놔둘까?”
“걔가 나 죽일 건데 그게 무슨 소리야.”
마저 코웃음을 치던 에델라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랑 시시덕거릴 시간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마 전후 처리 절차가 간단하지는 않을 테니, 에델라이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아, 맞다. 유안.”
완전히 방을 나서기 전, 에델라이드가 내 쪽을 돌아봤다. 나는 침대에 도롱이처럼 누운 채로 상체만 살짝 일으켜 에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르커스는 아니고, 이르커스가 보낸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왔어.”
“누구? 트리스탄?”
“아니, 여자 둘이던데. 자매래.”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마녀들이 있었다. 하나는 세계 멸망시키겠다고 난리 치던 마녀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 멸망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 최고라고 난리 치던 마녀였다.
“혹시 이름이 쥬리아랑 사밀라야?”
“응. 아는 사람 맞네? 들여보낼까?”
“아니.”
따지자면 거의 한 세기 만에 보는 인물들이니 반가워야 마땅하지만, 별로 알은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 둘은 정말 피곤한 마녀들이기 때문이다.
마법 사용이 가능했던 시점에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데 도가 텄던 마녀들이 내가 무력해진 지금, 얼마나 내 옆에서 깐족거릴지 상상만으로 기가 쫙 빨렸다.
쥬리아는 몰라도 사밀라는 아주 24시간 붙어서 못 도망치는 나를 붙들고 지난 연애사에 대해서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지독한 마녀들……. 자기들끼리 노후를 즐기겠다더니 어쩌다 이르커스랑 알게 돼서 나를 찾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거절해도 소용없기는 해. 이미 와 있거든.”
“이럴 거면 왜 물어봤어?”
“당신 열 받으라고.”
나는 당당하게 열린 문 사이로 마녀 둘을 들여보내는 에델라이드를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전쟁 끝나자마자 에델라이드는 쿨하게 내 말을 전부 안 듣기 시작했다.
“유안!”
방 안으로 들어온 사밀라가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잡고, 종종걸음으로 뛰어와선 나를 와락 껴안았다. 독한 장미 향수 냄새가 풀풀 풍겼다. 그 뒤로 쥬리아가 우중충하게 걸어 들어왔다.
“정말 보고 싶었어, 유안.”
“어, 어…… 그래. 나도…… 근데 사밀라, 나 상처 눌리거든…….”
“아이참, 이 정도 가지고 엄살은.”
엄살 아니고 정말 아프단 말이다. 사밀라는 내 뺨을 마구 주물럭거렸다. 죽는소리를 해도 내게서 쉽게 떨어질 마녀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너희 왜…… 이르커스랑 아는 거야?”
“어머머? 이르커스가 당신한테 말 안 했어?”
“뭘?”
“사밀라, 비밀은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게 좋아.”
사밀라가 그 특유의 떠벌이는 목소리로 모든 걸 다 불려는 찰나, 쥬리아가 사밀라를 저지했다.
“아참참, 비밀이었나 보다. 별거 아니구. 이르커스가 당신을 무사히 제국으로 데려와 달라고 우리한테 부탁했어.”
“아니, 너희 셋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그런 게 중요해? 이르커스랑 우리는 따지자면 한 핏줄인데.”
그건 그렇지.
더 캐물어 봤자 사밀라도 쥬리아도 이르커스를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면 이건 이제 이르커스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르커스는 잘 지내?”
내 질문에 쥬리아와 사밀라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애들처럼.
나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에 두 사람을 향해 ‘왜?’라고 두어 번 더 답을 독촉했다.
“그게 참…… 잘 지낸다기보다는…….”
“마탑주를 쐈어.”
“……뭐라고?”
“마탄이 장전된 총으로 마탑주를 쏴 버렸다고.”
나는 다시 기절할 뻔했다.
이런 미친……. 이래서 애를 혼자 오래 두면 안 된다는 거구나.
????????????
“다 비켜.”
이르커스는 현재 자기 방에 구금된 상태였다. 약혼자인 멜킨 소백작과도 만날 수 없는 상태라며 내 앞을 기사들이 막아섰지만, 나는 양옆에 마녀들을 대동한 채로 기사들을 힘으로 밀쳤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이 마구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아이고……. 주인님, 살살 좀 가요. 하지만 나는 살살 다닐 정신머리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자기 방을 집무실처럼 꾸며 두고 서류를 보고 있던 이르커스가 날 돌아봤다. 사람 쏴 버리고 구금당한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평온한 면면이었다.
“늦었네, 유안.”
“너, 이 미친…… 마탑주를 쐈다며.”
“벌써 들었어? 나름 극비인데.”
그야 이 사실이 새어 나가면 마탑이랑 로베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강이 생기니까 극비 사항이긴 하겠지.
하지만, 사람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영영 비밀에 부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마탄이 장전된 총이었으니, 앙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맞았더라면 틀림없이 즉사했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랬어?”
마탑주가 먹인 합성 약물 건도 참아 줬던 이르커스가 나 없다고 바로 앙헬을 쏴 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르커스를 만나러 오기 전에 족쳤던 한네만의 말을 들어 보니, 이르커스는 내가 다쳤다는 소리를 듣고도 제법 정상인처럼 행동하다가 갑자기 마탑주를 쏴 버렸다고 했다.
뭐, 보나 마나 이건 앙헬 탓일 것이다. 우리 착한 이르커스가 앙헬의 말도 안 되는 도발에 넘어가서 공격한 거겠지. 설마 나 없다고 애가 눈이 돌아서 아무나 치고 다니진 않았을 것 아닌가. 내내 정상인처럼 굴었다고 했으니, 이르커스는 정당방위일 게 분명했다.
“앙헬이 너한테 나댔니?”
“아니.”
“그럼 대체 왜?”
“당신 봉인하겠다고 돌아다니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게 다야?”
“다른 이유가 필요해?”
이르커스가 보던 서류를 책상 구석으로 밀었다. 그러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운 건데도 이르커스는 그사이에 더 자란 것 같았다. 애들은 정말 무시무시한 속도로 크는구나.
“한 번에 못 죽인 게 유감일 뿐이야.”
그리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격도 더러워졌다.
나는 내 제자의 사춘기 때문에 고혈압이 올 것 같았다. 우리 애가 이럴 리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