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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56화 (56/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56화

    이렇게 검에 찔리면 죽어도 수십 번은 더 죽어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체내에 축적해 뒀던 마나를 거의 다 잃은 데다가 마법 사용 제약은 도대체 몇 년이나 갈 건지 풀리지 않았고, 카만 왕족들에게 공격당한 상처는 아물지 않는 상태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숨은 붙어 있다는 소리다.

    넝마가 된 몸을 질질 끌고 지하 통로를 지나 왕궁 밖으로 나갔다. 카만의 왕은 죽었다. 이로써 내전은 왕궁 잠입과 왕족 시해에 모두 성공한 에델라이드의 승리였다.

    “테리즈…… 걔한테 돈이라도 잔뜩 받아 내야겠어.”

    테리즈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내가 내전에 끼어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에델라이드는 수많은 반동분자가 그랬듯이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지거나 내전 중 공격 마법에 휘말려 죽었어야 했다.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 나의 개입으로 결과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마법을 써서 왕궁 밖으로 탈출했던 에이사가 가장 먼저 달려 나와 나를 부축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평소라면 진작 나았어야 할 복부의 검상이 회복되지 않았다.

    헤누스교의 신관들이나 상위 마법사들의 치료 마법이 필요했다. 이런 검상은 일반 의원들에게 보여 줘 봤자 치료할 수 없을 터였다.

    “유안…….”

    “나, 그…… 고통 줄여 주는 마법 좀…… 걸어 줘 봐.”

    빌어먹을 몸뚱이. 회복되면 뭘 하나. 아픈 건 똑같은데.

    긴장이 풀리자 다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 꼴로 로베인 제국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르커스가 내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왕은 죽었다. 마법 사용 제약 때문에…… 생포할 수는 없었어.”

    “…….”

    “날 에델한테 데려다주렴. 바로 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따지자면 피를 그렇게 흘렸는데도 잘 버틴 거였다.

    처음으로 목이 잘렸던 경험 이후로 최고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마법 실력이 미진했을 때야 어디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이만큼 나이를 먹은 뒤에 이 정도로 다쳐 본 건 또 처음이었다.

    기절하는 와중에도 나는 이르커스를 생각했다. 돌아가면 이르커스를 어떻게 달랠지부터 고민해 봐야 했다.

    멀쩡하고 빠르게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빠르게’만 지키고 ‘멀쩡하게’는 못 지키게 생겼으니 참으로 큰일이다.

    ????????????

    에델라이드는 제 팔 하나를 잃었을 때보다 참담한 기분으로 기절한 유안을 바라보았다.

    제가 골라 보내 준 사람 중에 배신자가 섞여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에이사가 아니었다면 유안은 왕국군 잔당에게 생포당했을지도 모른다.

    “이걸 어쩌지.”

    게다가 대현자는 평소 그렇게 자신하던 회복력이 무색하게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에델라이드 역시 유안이 불멸자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에이사가 낑낑거리며 끌고 온 유안의 상태를 보고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어도 골백번은 더 죽었어야 했다.

    에델라이드의 생존만 보장해 주고, 내전의 승패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며 싸가지 없게 말하던 대현자가 몸이 이렇게 되도록 힘을 써 줬다는 게 고마운 한편으로 당황스러웠다. 에델라이드 입장에서는, 유안을 이 상태로 제국에 돌려보내선 안 됐다.

    “대현자에게 너무 큰 빚을 졌어.”

    “하지만, 이대로 대현자를 저희가 데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유안을 이 상태 그대로 제국에 돌려보내면 이르커스가 날 죽이러 직접 찾아오겠지.”

    외교 문제보다 그게 더 두려웠다. 에델라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은 괴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건강한 신체를 타고난 에델라이드조차 이르커스와 붙으면 싸움 자체가 안 됐다. 마법만 잘 써도 사기인데, 이르커스는 나이에 비해 검도 잘 다뤘다.

    그 혼자 힘으로 약해진 나이트 펠로우 하나 궤멸시키는 건 문제도 아닐 것이다. 나이트 펠로우만 박살 내면 다행인데, 유안 손에 자란 이르커스는 대현자인 유안보다 인간성이 더 결핍된 놈이었다. 유안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냥 카만을 세계 지도에서 밀어 버리려고 할지도 몰랐다.

    “나라를 생각해서라도 대현자를 먼저 치료한다.”

    “진 빚을 생각해서가 아니라요?”

    “그것도 그거고. 대현자를 오래 붙들고 있으면 높은 확률로 그놈이 기어코 찾아올 거란 말이지. 그전에 몸보신시켜서 돌려보내야 해.”

    “그럼 그냥 계속 접선 중인 1황자 쪽에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저희도 몰랐다고 하고 처리해 버리는 거죠.”

    에델라이드는 순진한 얼굴로 토사구팽을 논하는 제 심복을 바라보았다.

    아주 비열한 방법이었지만,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고 나면 종종 써먹은 군사나 병법들은 이렇게 버려지곤 했다.

    에델라이드도 아마 상대가 유안이 아니었다면 토끼를 잡은 사냥개를 버리듯이 큰 공적을 세운 이를 등한시 했을 것이다. 그래야 후에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어디에서 얼마만큼의 공적을 냈는지 따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었다. 내전 후, 혼란한 카만의 기반을 닦기 위해선 심복의 말처럼 모르는 척 위인들의 신변을 다른 곳으로 팔아넘기는 게 이로웠다.

    “그랬다간 카만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져.”

    하지만 에델라이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유안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을 만큼 머리가 굴러갔다.

    이익을 차치하고서라도 조모인 테리즈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카만까지 행차한 유안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대현자가 다 회복할 때까지 우리 쪽에서 대현자를 돌본다. 이후엔 대현자가 하겠다는 대로 놔둬.”

    “괜찮을까요?”

    “져야 할 싸움에서 이겼으니 괜찮아야지. 왕궁부터 수습한다. 우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

    에델라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패배를 가정했을 때는 몸은 좀 아파도 머리는 아프지 않았는데, 승리가 확정되니 몸이 괜찮아지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라를 어떻게 개혁하고 이끌어 가야 할지 앞일이 막막했다.

    “새 시대가 열릴 거야.”

    하지만 그 막막함 속에서 가슴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기대가 있었다.

    절대로 바꿀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체제는 붕괴할 것이고, 세상은 에델라이드와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천천히 바뀌어 나갈 터였다.

    “어쨌든, 대현자는 우리의 은인이다.”

    그렇게 변화한 카만은, 나라의 은인인 대현자를 잊지 않을 것이다.

    ????????????

    “에델이 내전에서 승리했다던데.”

    이르커스는 바짝 쫄아 있는 한네만을 곁눈질했다. 최근 한네만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눈에 띄게 수척해진 상태였다. 이르커스의 호위 기사로 일하는 로버트가 잘 먹고 잘 자서 살이 붙은 것에 비하면 한네만은 아주 피골이 상접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네 동생으로부터의 전언은 더 이상 없나 봐.”

    “…….”

    한네만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했다. 눈치 없는 트리스탄이 그런 한네만의 마음도 모르고 이르커스를 향해 ‘독촉한다고 연락이 오겠소?’라고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기다리다 보면 대현자가 돌아오겠지.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까지 하고 갔으니.”

    “계속 소식이 없으면 유안이 뭐라고 하든 내가 직접 카만으로 가 보는 수밖에 없겠지.”

    “황자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그러니까 그냥 알고 있는 거 다 말해, 한네만.”

    한네만은 새삼 트리스탄이나 로버트와 달리, 이르커스의 눈치가 좋다는 걸 깨달았다. 그간 붉은 매 용병단에서 바보들만 상대하다 보니 잊고 있었다. 자신이 그다지 거짓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현자는 지금 나이트 펠로우 쪽에서 보호 중에 있습니다.”

    “보호?”

    “마법 계약을 위반한 대가로 마법 사용에 제약이 걸린 데다, 왕족들에게 공격당한 상처는 신관 치료로도 낫지 않는다더군요.”

    “…….”

    “복부에 검상이 깊어, 회복 후에 제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에델라이드가 전언을 남긴 게 사흘 전입니다.”

    한네만은 침묵을 지키는 이르커스의 곱상한 얼굴을 곁눈질로 살폈다.

    차라리 길길이 날뛰며 왜 그걸 이제 말하느냐고 따지는 편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르커스는 그저 고요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그래?’ 하고 반문했을 뿐이었다.

    “다들 내가 카만에 직접 가는 건 반대한다, 이거지…….”

    이르커스는 제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에킨도르 멜킨과의 계승권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해 달라고 말하던 멜킨 소백작을 떠올렸다.

    멜킨 소백작은 확실히 일 처리 능력이 좋았다. 사밀라와 쥬리아는 어렵지 않게 소백작이 적어 준 추천장을 들고, 사용인으로 위장해 황궁 안에 잠입했다.

    이르커스는 입궁한 마녀들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본관과 떨어진 별채 쪽에 마녀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럼 다른 사람이라도 보내야겠어.”

    유안이 얼굴을 알고 있는 사밀라와 쥬리아라면 유안 역시 별다른 의심 없이 그 둘을 따라 제국으로 돌아올 터였다.

    그리고 마녀가 둘이나 붙으면 호시탐탐 유안의 신변을 노리는 마탑주 앙헬로부터 마법 사용이 불가능해진 유안을 지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르커스는 테이블 위로 손을 짚었다. 흰 장갑을 낀 손이 퍽 고상하고 깨끗하게 보였다. 그 안에 든 건 시커먼 마음과 손속임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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