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55화
“선조와 맺은 마법 계약을 어겼군.”
“계약은 원래 어기라고 있는 거잖아.”
“……카만의 일에 대현자가 왜 관여하는 거지?”
“나도 사정이 있어. 원래 관여 안 할 생각이었는데, 너희가 운이 나빴지.”
황궁에서 여우 같은 제자가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야 했다.
일단 왕을 잡아다 에델라이드한테 데려다주면 뭐가 돼도 될 것이다. 내 공적은 에이사한테 돌아갈 것이고, 카만은 대충 평화를 되찾겠지.
에델라이드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는 내 관심 밖의 일이었다. 뭐, 적어도 카만 놈들의 비리 정치가 싫어서 목숨 걸고 반란 일으킨 정도면 얘네보단 잘할 것이다. 못하면 말고.
“카만을 공격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진짜 대사 스킵 버튼이 있어야 하는데. 인간들 창의력 떨어져서 매번 감히니 후회니 하는 거 아주 지긋지긋해.”
작게 중얼거렸는데 지하 통로가 좁아서 내 중얼거림이 모두에게 들린 모양이었다. 스킵 버튼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전부 열 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어이없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왜 빡쳐 하는 거람.
나는 에이사를 내 뒤로 보내고 검을 틀어잡았다. 나의 검 실력은 이르커스나 트리스탄에 비하면 아주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나, 마법 사용이 불가능한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웬만한 기사들보단 내가 나을 거다.
“그만 말하고 덤벼라. 나 바빠.”
한국인은 빨리빨리. 나는 예고 한번 해 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호위 기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오랜만에 혹사당한 손목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영생 살게 해 줄 거면 근 손실도 없애 줬어야 한다. 나의 손목 관절이 세월을 호소하는 동안, 왕의 호위 기사들도 내 비겁한 검술에 당해 고통을 호소했다.
역시 온건한 방법으로 황제 자리를 승계 받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나라 하나 손에 쥐여 주는 건 정말 귀찮고 힘든 일이다.
“마법을 안 쓰는군.”
“왕궁 날릴 일 있니? 너희 정도는 마법 안 써도 이겨.”
허세였다. 그냥 이기기는 무슨. 아주 여기저기 베이고 찔린 다음에나 이기겠지.
고통조차 못 느끼는 몸이라면 그걸 ‘그냥’이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내 감각 체계는 정상이었다. 아픈 건 고스란히 다 느낀다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진작 쇼크 때문에 죽거나 기절했을 테다.
“마법 계약 위반 때문에 제약이 걸린 건 아니고?”
이래서 예리한 왕족들이 싫다니까.
눈을 가늘게 좁혀 뜬 채 나를 바라보는 카만의 왕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죽어 흙으로 돌아갔을 놈이지만, 자세히 보니 카만의 전쟁을 도와주려면 계약을 맺으라고 구구절절 난리 치던 선조와 아주 생김새가 똑같았다. 유전학의 신비는 정말 놀랍다니까.
내 마법 때문에 머리털이 다 불탔던 놈보다 현왕이 조금 더 날카롭게 생기기는 했다. 대를 이으면서 모친 쪽은 항시 미인이었을 테니, 모계 유전자가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놈들의 대를 끊어 버릴 생각이었으므로, 내 어깨를 찌르는 검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은 채 씩 웃었다.
“제약에 걸렸으면 어쩌려고?”
“아무리 대현자라도 마법을 못 쓰면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지. 죽일 수 없다 해도 죽는 게 낫다 생각할 만큼의 고통을 주는 건 어렵지 않다.”
“날 생포할 수는 있어?”
에이사가 내 뒤에 붙어 나름대로 보조 마법을 잘 걸어 주고 있었다. 치료 마법은 못 쓰는 모양이지만, 검에 찔렸는데도 고통이 좀 덜 느껴졌다.
속으로 에이사를 꼭 로베인 제국으로 스카우트해야겠다는 생각을 한창 하는 동안, 현왕이 직접 검을 빼 드는 게 보였다.
나이도 좀 있어 보이는 왕이 뭐 직접 나서고 그런담.
저 검에 찔리면 노먼에게 물렸던 것처럼 쉽게 회복하지 못할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어코 카만과 척을 지겠다니 유감이군.”
“나야말로 유감이다. 야, 악법도 법이고 이빨 빠진 호랑이도 호랑이야.”
이빨 몇 개 없다고 호랑이가 인간을 못 죽일 리 없다. 앞발도 있고 뒷발도 있는데 왜 인간에게 순순히 당해 주겠는가? 그러니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표현은 순전히 인간 중심적인 표현이었다. 이건 호랑이 의견도 들어 봤어야 했다.
호위 기사들 뒤에서 멋지게 검만 빼 들고 서 있던 현왕이 내 도발에 말려들어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직 내가 쓰러트리지 못한 호위 기사 두 명이 같이 달라붙어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전부 쳐 내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이래서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내 전문 분야는 비열한 공격과 기습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둘 다 발휘하지 못한다.
나는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검을 피하며 숨을 골랐다. 마법 쓸 줄 안다고 그간 육체 활동을 게을리했던 업보가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유안!”
게다가 정신 사납게도 뒤에 있던 에이사가 나를 불렀다.
검에 좀 찔렸다고 날 애타게 부를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아 고개를 돌리니, 내가 민간인 대피시키라고 보내 놨던 놈 중 한 명이 언제 돌아왔는지 이 혼란한 난전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날 도와주려고 머리를 들이미는 게 아니라 날 공격하기 위해서 끼어들었다는 거다. 에델라이드가 붙여 준 놈이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라단타 쪽에 매수된 인물이었던 모양이었다.
등에 검이 박혔다. 기껏 옆구리 찔리는 걸 피했더니, 등이 대신 찔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전을 치르는 와중 반란군 사이에서도 배신이 일어나는 게 웃겼다. 인간은 진짜 변하질 않는구나. 아주 지긋지긋했다.
이게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다른 놈들의 검도 내 몸을 찌르고 들어왔다. 통 아저씨도 나보다 검에 많이 찔리진 못했을 거다.
속에서 울컥 피가 솟았다. 에이사가 고통을 줄여 주는 마법을 걸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기절했을 것이다. 그럼 허세를 부린 게 머쓱하리만큼 대현자 자존심에 안 맞게 카만 개 허접들에게 생포를 당했겠지.
그도 아니면 라단타 쪽으로 곱게 옮겨져서 앙헬의 실험 재료로 팔려 나갔을 수도 있다. 앙헬이 라단타를 돕고 있는 이유가 날 어떻게 해 보기 위해서니까.
나는 계속해서 역류하는 피를 울컥 뱉어 내곤 페널티 때문에 운용되지 않는 마나를 억지로 끌어모았다.
제약 때문에 뭐가 안 된다는 소리를 하는 건 근성 없는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내가 누구던가. 나는 수많은 천재를 제치고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러 가며 좋은 성적을 받아 내던 한유안이다. 말도 안 통하는 이세계에 떨어져서 노예 생활부터 시작했지만, 결국엔 대현자 칭호까지 얻은 게 바로 나였다.
그런데 고작 계약 페널티 따위가 날 완전히 묶어 두겠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에이사, 넌 빠져나가. 이동 마법 쓸 줄 알지?”
숨이 턱 막혔다. 등과 복부에 검이 무려 네 개나 찔린 상태였으니, 호흡이 잘되는 것도 이상했다.
마법사인 에이사는 내가 마나를 한계까지 끌어모으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망설이면 너도 여기서 죽어.”
“유안은요?”
“나? 난 죽으면 고맙지.”
그 말을 하는데 괜히 이르커스의 상처 받은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잡념을 지우기 위해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사가 이 지하 통로를 빠져나가는 순간, 내가 끌어모은 마나가 폭발할 예정이었다. 통로가 좁으니 한두 명 도망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라는 말이 있듯, 마법을 못 쓴다면 마나라도 끌어와 터트리겠다.
나는 에이사의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나를 생포하기 위해 검날을 비트는 놈들을 내 몸에 꽂힌 검을 붙잡아 고정한 채로 대형 마나 폭발을 일으켰다.
????????????
한네만은 지금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에이사로부터의 전언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안이 결국 마법 계약을 어겨, 마법 사용에 제약이 걸릴 거라는 것 정도는 한네만도 충분히 예측한 일이었다.
그런데 제약이 걸린 상태에서 몸에 무리가 갈 게 확실한 데도 마나를 한계까지 끌어모아 폭발을 일으킨다는 발상은…… 한네만처럼 자기 목숨 소중한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물귀신처럼 남의 발목 붙든 채로 같이 폭발에 휩쓸리는 걸 선택하는 인간은 드물었다. 부모의 원수를 처리하는 일이라도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미치겠네.”
다행히 유안과 함께 잠입했던 에이사는 오빠인 한네만에게 연락을 계속 취할 수 있을 만큼 양호한 상태인 모양이었지만, 한네만은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이 사실을 이르커스에게 알려 줘야 할지 함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유안은 죽지 않는다. 자기가 일으킨 마나 폭발에 휘말렸다고 해도 유안 자신은 불멸자이기 때문에 생존할 것이다. 유안이 끌어안고 있는 영생 저주는 그런 거였으니까.
멀쩡하게 돌아올 게 뻔한 유안에 대해 ‘그 사람, 자기가 엄청 다칠 거 알면서도 마나 폭발을 일으켰다던데요?’라며 이르커스에게 일러바치는 건 한네만으로서도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요즘처럼 이르커스가 퍽 정상인처럼 살고 있을 때는 더 그랬다.
다시 말하지만 한네만이 느끼기에 이르커스는 유안이 없어야 좀 정상적으로 굴었다. 유안이 없어야 이상한 짓을 덜 했고, 유안이 없어야 다른 사람을 냉대하지 않았다.
이런 이르커스에게 유안 얘기를 굳이 꺼내는 건 아무리 이르커스가 부탁한 일이라고 해도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처럼 느껴졌다.
“왕은 죽었어?”
한네만은 결국,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약혼자인 멜킨 소백작과 만남을 가지고, 황자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으며 정치적 기반을 잘 다지고 있는 이르커스에게 눈이 돌 빌미를 줘선 안 됐다. 한네만은 이렇게 개고생하는 이상, 황궁 마법사 자리를 꿰차야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게다가 카만 왕은 유안이 일으킨 폭발에 휩쓸려 사망했을 테다. 근거리에서 일어난 마나 폭발에서 평범한 사람이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니까.
한네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조만간 유안이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에이사, 너도 당분간 숨어 지내.”
한네만은 제 여동생에게 운신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연락을 끊었다. 동생의 신변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하는 일들을 전부 내팽개치고 카만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탑주 앙헬은 한네만의 존재를 눈치채 놓고도 쥐새끼처럼 자기를 감시하고 있는 한네만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여기 함정 있어요’라고 광고라도 하듯, 에킨도르 멜킨과 한네만에게 대현자를 묶어 둘 마도구 개발 건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네만은 불길하게 뛰는 제 심장 위로 오른손을 얹었다. 마법사는 미래를 예언할 수 없지만, 이 순간이 폭풍 전야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