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54화
서른 살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하면 마법사가 된다는 말이 있다. 30년만 솔로로 살면 마법사로 전직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하지만 현대 대한민국보다 각박한 이 이펜하임 대륙에서는 서른 살까지 수절하며 살아도 마법사가 못 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당연한 일이다. 연애랑 마법은 원래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까.
마나 좀 운용할 줄 알고, 좋은 스승만 만나면 개나 소나 마법사가 될 수 있지만 그게 참 어려웠다. 교과서 위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부하면 서울대 갈 수 있다는 걸 다들 알면서도 웬만하면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나는 따지자면 운이 나빠서 운이 좋았던 케이스였다.
모순적인 소리지만, 다윈 그 미친놈이 하늘에서 떨어진 이세계인을 자기 배우자인 예카리나에게 선물로 넘기지 않았더라면 마법을 배울 기회가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마법 좀 못 배웠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현대 문명 속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크다 이세계로 떨어진 내게 마법마저 없었더라면 세상살이가 네 배 정도 퍽퍽했을 것이다.
“이게 참…… 내가 의식해서 안 쓰는 거랑 제약 걸려서 못 쓰는 건 느낌부터가 다르네.”
“제약이요?”
“어어, 신경 쓰지 마. 마법 못 써도 저런 애들 제압하는 건 식은 스튜 먹기다.”
거의 기절 상태인 노먼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오자, 노먼의 비명을 듣고 쫓아온 왕실 기사단이 나를 먼저 맞이해 줬다.
그래도 다들 월급을 날로 먹고 있진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용주가 죽을 위기에 처하니까 달려 나와 주잖아. 얼마나 친절한 고용인들이란 말인가.
페널티 때문에 공격 마법을 쓸 수 없는 처지라, 나는 옆구리에 노먼을 낀 채 사슴뿔을 칼처럼 휘둘렀다. 마법에 비해 체술이나 검술에는 정말로 재능이 없지만, 다치거나 죽는 걸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게 내 가장 큰 강점이었다.
지금은 방검 마법을 몸에 두르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검에 찔리고 베일 때마다 아프긴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검용 마도구 좀 더 개발해 둘걸. 방심하면서 살면 이렇게 몸이 고생을 하게 된다.
그래도 왕자인 노먼이 인질로 잡혀 있는 탓에 기사들은 내게 적극적으로 덤벼들지 못했다. 노먼이라는 방패가 없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쪽수에 밀려서 꽤 고생깨나 했을 터였다.
“감히…….”
“감히는 무슨 감히야. 너희야말로 감히 내 앞길 막지 말고 알아서들 비켜라. 갑옷 입었다고 내가 너희 못 찌를 줄 알아?”
사실 강화 마법을 못 쓰는 상태라 못 찌르긴 했다.
유감스럽지만 검도 아니고 그냥 장식용 사슴뿔로는 갑옷을 뚫을 수 없다. 하지만 원래 이런 건 기 싸움에서 이기는 놈이 승리하는 법이다.
나는 노먼을 질질 끌며 겁을 집어먹은 기사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뒤에 서 있던 에이사 외 2인이 이 틈을 타 미리 알아 둔 비밀 통로로 몸을 날렸다.
다치거나 죽을 위험이 큰 다른 애들을 데리고 싸우는 것보다 혼자서 기사들을 뚫고 지나가는 게 나로서도 쉬운 일이었다.
나는 내가 다가올 때마다 점점 물러서는 기사들을 향해 휘적휘적 사슴뿔을 휘둘렀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내게 불리했다. 기껏 눈 색과 머리 색을 바꿔 가며 정체를 숨겼는데, 칼 맞아도 안 죽는다는 게 들켜 대현자라는 신분이 노출되면 곤란하니까.
“우리, 그냥 쉽게 좀 가자.”
내 간곡한 부탁을 들은 기사들은 도망치기는커녕 내게 더욱 열정적으로 덤벼들었다.
이런 충직한 기사들을 봤나.
나는 한숨을 쉬며 노먼을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기사들을 노먼을 방패 삼아 하나씩 상대하기 시작했다.
????????????
사람마다 별로라고 여기는 일은 각자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공략이 어려운 게임 난도를 짜증 난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자유도가 떨어지는 게임 환경에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별로라고 여기는 건 다 회차 플레이가 필수인 게임에서 튜토리얼 스킵 버튼이 없는 거였다. 맨날 똑같은 거 보게 만들어서 뭐 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임뿐만 아니라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였다. 오래 살다 보면 인간들이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무슨 개혁이라도 크게 일어나지 않는 이상 맨날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엇비슷한 대사를 듣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다 회차로 만들어 놨으면 스킵 버튼을 같이 넣어 줄 것이지, 게임의 작품성을 위해 그런 걸 넣지 않는 개발자들이 꼭 있다. 물론, 덕분에 어린 시절 게임에 대한 흥미를 빠르게 잃어버리고 공부만 하긴 했지만.
아무튼 이렇게 기사들을 쓰러트리고 왕을 찾아가는 일은 내게 반복되는 게임 튜토리얼 같았다.
인물만 달라질 뿐이지 전쟁은 언제나 결이 비슷했다. 왕을 죽이거나 포로로 사로잡으면 승리하는 게 규칙이고, 그 규칙을 위해서는 항상 잔챙이들과 지지부진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간 나의 전쟁 공략은 마법 쓰면 되는 베스트―이지 모드에 가까웠으나, 종종 이렇게 마법 사용에 제약이 걸리니 난도가 조금 높아졌다.
그래도 튜토리얼은 튜토리얼이라, 난도가 어떻든 내가 이걸 못 헤쳐 나가는 일은 없었다. 튜토리얼부터 게임 오버 되는 경우는 원래 드물지 않던가.
“괜찮아요?”
에이사가 희게 질린 얼굴로 엉망이 된 내 몰골을 바라봤다.
인간성이 슬슬 회복된 시점이라, 노먼과 기사들을 죽일 때 어쩔 수 없이 불쾌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몇십 년 전에 테리즈를 도와 일찍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느끼지 못했을 죄책감과 불쾌함이었다.
“몰골에 비해서는 멀쩡한 편이야. 금방 낫거든.”
“우와.”
“나, 아직 대현자 안 같지?”
“검은색이 없긴 한데…… 솔직히 말해도 돼요?”
“아니, 솔직히 말하지 마.”
아무리 나라도 쪽수 싸움에서 밀리면 모든 공격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애초에 공격 자체를 잘 안 피하긴 했다. 아픈 건 똑같지만, 오래 살면서 고통에도 익숙해져 웬만한 부상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까.
“평범한 사람 같진 않아요. 보통 사람들은…… 음, 아무리 용감해도 검이 다가오면 피하잖아요.”
“그렇지. 안 피하면 죽으니까.”
“그런데 유안은 그런 게 전혀 없어서, 솔직히 외관을 바꾼 것만으론 소용없는 것 같아요.”
에이사는 참 똘똘하다. 나는 흐뭇하게 에이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스승 누구니? 참 잘 배웠구나. 에이사가 어물어물 자기 스승님 성함을 말해 줬지만, 어차피 들은들 아는 이름도 아니었다.
나는 저승사자처럼 핏물을 뒤집어쓴 채 쓰러진 기사에게서 갈취한 검을 질질 끌고 왕을 찾아 나섰다.
기사들을 제압하는 데 내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는지 왕은 이미 도주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숨바꼭질까지 시키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는 마법 사용 제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노먼이 내게 역으로 달려들어 이를 세웠을 때 피하지 않았던 건 노먼이 날 물어봤자 금방 낫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만의 왕족, 노먼이 내게 입힌 상해는 다른 상처와 달리 쉽게 아물지 않았다. 카만 왕족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내용에 대한 페널티가 훅 들어온 것이다.
덕분에 심각한 수준의 검상은 다 나아 감에도 어깨에 난 잇자국은 그대로였다. 제국으로 돌아갈 때 아주 꽁꽁 싸매고 가야 했다. 이르커스가 이걸 보면 또 정색할 테니까.
노먼이 내게 낫지 않는 상해를 입힐 수 있다면 다른 카만 왕족들도 내게 그만한 위해를 가할 수 있었다.
다치는 건 상관없는데, 회복이 안 돼도 죽을 수 없는 몸이라 고통은 계속된다는 게 큰 문제였다. 치아가 아니라 검으로 잘못 공격이라도 당했다간 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치료 마법도 못 쓰는 나약한 상태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마도구 좀 더 챙겨 올걸. 마도구는 역시 다다익선이라니까. 에이사, 너 추적 마법 쓸 줄 알아?”
“네. 할 줄 알아요. 추적 범위가 넓진 않지만…….”
“그럼 좀 써 봐. 이동 마법은?”
“혼자서 이동하는 건 쓸 수 있는데…….”
“내가 못 가면 소용없지. 추적만 하자.”
역시 이르커스처럼 아무나 다 천재는 아니구나.
에이사가 추적 마법을 사용해 왕의 위치를 알아내는 동안, 나는 다른 두 사람을 시켜 궁내에서 일하는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라고 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인명 피해는 최소한도로 줄여 두는 게 나았다. 그 사람들 목숨이랑 내 자그마한 양심을 위해서.
“찾았어요!”
“어디야?”
“지하 통로 쪽에 있어요. 도망치는 중인가 봐요.”
“얘네가 원래 툭하면 자기 살겠다고 자리 버리고 도망치는 걸로 몇 세기 전부터 이름이 드높았어.”
임진왜란 시절 선조도 울고 갈 도망 실력이었다. 조상부터 후손까지 이 정도면 도주 재능을 타고난 거다. 세대가 바뀌면 뭐가 달라질 법도 한데, 이놈들도 참 근성 있게 그대로였다.
에이사와 나는 곧바로 지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법을 못 쓰니 몸이 고생이었다.
계약 위반 페널티가 오래가 봐야 얼마나 가겠나 싶어 저지른 일인데 슬슬 후회가 밀려왔다. 한네만 말 좀 새겨들을걸. 하지만 나로서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게 다 테리즈 펄번 탓이다.
나는 멋지게 남 탓을 하며 지하에 당도했다.
웬만하면 왕궁에서 상황을 지켜볼 법도 한데, 곧바로 내뺀 걸 보니 다른 건 몰라도 상황 판단력 하나만큼은 좋았다. 비열하지만 자기 목숨 보전은 참 잘했다.
“대현자.”
게다가 나름대로 외관을 바꿔 놓은 상태였음에도 왕자랑 달리, 카만의 왕은 나를 곧바로 알아봤다.
비리 정치의 수괴라도 왕은 왕이다 이거지. 나는 좀 머쓱해졌다. 어떡해? 외교 문제 제대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내전을 꼭 성공시키고 에델라이드를 카만의 수장으로 앉혀 박살 난 외교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