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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53화 (53/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53화

“노먼이래요.”

에이사가 중얼거렸다.

나는 돌연 왕자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는 에이사를 향해 왜 그러냐고 되물었다. 내 되물음에 화들짝 놀란 에이사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왜 왕자 이름을 혼자 복기하고 있지?

에이사 눈에 왕자 놈 얼굴이 반반해 보였다면 그건 그것대로 참 별로였다. 에이사! 걔 말고 이르커스라고 진짜 개 잘생긴 황자가 하나 있어. 기다려 봐. 내가 딱 소개해 줄 테니까.

날 간택한 왕자의 존함은 노먼 어쩌고저쩌고 카르만이었다.

카르만은 카만 왕족의 성씨니까 그래도 기억이 나는데, 저 중간에 들어가는 이름은 몇 번을 들어도 입에 붙질 않는다.

뭐, 굳이 이놈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조만간 내 손으로 조질 놈의 이름으로 뇌용량을 허비하기에 내 두뇌는 자릿세가 비쌌다.

“대현자님은…….”

“유안이라니까.”

“앗. 죄송해요. 유안은…… 왜 그렇게 잡일을 잘하는 거예요?”

그건 내가 4세기 전에 황궁에서 황비의 애완 인간 역할을 수행하면서 노예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이란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진실을 속으로 삼키며 그냥 웃기만 했다.

대현자는 못 하는 게 없다고 소곤거리자 에이사의 시선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경심이 담겼다. 어린애가 날 이렇게 존경해 주는 건 고맙긴 한데, 그게 마법적인 부분이 아니라 왕궁 사용인으로서의 업무 처리 능력 때문이라는 게 좀 어이가 없긴 했다.

이런 잡일은 사실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에 가장 처음 했던 게 잡일인데 당연히 못 할 리가 없다.

원래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한 아르바이트가 인생 아르바이트가 된다는 소리도 있지 않던가. 대학 입시 공부 다음으로 내게 익숙한 일이 이거였다.

나 때문에 머리 아파하던 하녀장 시네이드의 시선도 내가 일하는 걸 보자 180도 달라졌다. 만약 반란 실패하면 여기 남아서 사용인으로 일하면 안 되냐고 제안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유안.”

보는 눈이 많아, 나를 이름으로 부른 시네이드가 복도 끝에 서서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입궁하고 일주일간은 신입 사용인 교육 기간이랍시고 노먼 왕자와의 일대일 대면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제 결전의 날이 코앞으로 찾아오고 만 모양이었다.

“별관으로 가라.”

시네이드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나는 그런 시네이드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용인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노먼 왕자는 지금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날 기다리고 있겠지? 어디서 웬 곱상하고 어린 남자애가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래서 인간들이 눈뜬 채로 코가 베이는 거다. 난 겉모습만 20대지, 안에 들어 있는 건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대현자였다. 순진하게 ‘왕자님, 이러시면 안 돼요!’ 하고 저항할 어린 사용인을 원하는 거라면 노먼은 사람을 잘못 골라도 단단히 잘못 골랐다.

나는 오늘 노먼의 시중을 들어 주는 김에 마법 계약을 쿨하게 파기해 버릴 생각이었다.

설령 마법 좀 못 쓰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카만 왕가 대는 못 잇게 해 줄 것이다. 카만 왕족들과의 오랜 악연을 이제는 끝낼 때가 됐다.

????????????

세상에는 갱생 불가능한 변태 새끼가 너무 많다. 이래서 얼굴 좀 반반하다고 사람을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 겉보기랑 다르게 속이 썩어 문드러진 인간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물론, 겉도 속도 썩은 것보단 겉이라도 반반한 게 낫기는 했다. 적어도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고통에 신음하는 얼굴이 번지르르하게라도 생겼으면 더 이상 계승되지 못할 유전자를 아까워할 수라도 있으니까.

“너, 너어……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고? 뭐 대사가 이렇게 하나같이 창의성이 떨어지냐.”

당연히 무사하지. 왕족 하나 고자로 만들었다고 내가 무사하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노먼은 내가 자기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호위 기사를 싹 물렸다.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라는 위험 분자를 가까이 두고도 멋도 모르는 채 혼자 남는 게 참 기가 찼다. 겉모습에 현혹돼서 방심하니까 사람이 허무하게 죽는 거다.

내게 가까이 다가와 ‘무섭게 하지 않을게’라는 말을 스윗 하게 지껄일 때부터 내 눈은 열정적으로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아 헤맸다. 내 열정적인 탐색 중, 바로 눈에 들어온 게 벽 한구석을 장식한 사슴뿔 장식이었다.

박제된 사슴의 원한도 갚아 줄 겸, 나는 내 어깨에 자연스레 팔을 두르려는 노먼을 밀치고 사슴뿔 장식에 정신이 팔린 순진한 사용인 행세를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노먼은 저 뿔이 자기를 공격하는 데 쓰일 거라곤 생각도 못 한 눈치였다. 기꺼이 만져 봐도 좋다는 허락이 곧바로 떨어졌으니까.

나는 노먼이 내게 사슴뿔 장식을 만져 봐도 좋다고 허락해 주자마자, 손으로 벽에 달린 뿔을 우두둑 꺾었다. 마법을 쓰지 않고 맨손으로 장식용 사슴뿔을 꺾으니 내 손에도 자연스럽게 상처가 났다. 살짝 쓰라리긴 했지만 못 견딜 만큼 아픈 수준은 아니었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노먼은 질겁했다.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불러들인 사용인이 저 죽이겠다고 벽에 달린 사슴뿔 꺾는데 안 놀라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노먼이 채 비명을 지르기 전에 사슴뿔의 날카로운 부분을 겨눴다. 이놈도 일단은 카만의 왕족이기 때문에 휘두르는 순간, 과거 카만 왕족 놈들과 맺어 놓은 마법 계약이 내게 제약을 걸 터였다.

사슴뿔을 내려놓고 대화로 해결하자는 노먼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화로운 대화 대신 폭력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마법 계약을 함부로 어기지 말라는 한네만의 경고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미 테리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에델라이드를 도와주러 온 순간부터 마법 계약을 어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뭐…… 죽기야 하겠는가? 죽으면 차라리 고마운 일이다. 이르커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죽을 수 있다면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 정도는 이천 번도 받아 줄 수 있었다.

“너, 아직도 내가 평범한 사용인으로 보여?”

“미친…… 미친 새끼 아냐…….”

“미친 건 너고.”

사슴뿔로 노먼의 소중한 그곳을 퍽 찔렀다. 아처볼드를 고자로 만들지 못했으니, 이놈이라도 제 기능 못 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역시 변태는 죽어! 나는 박제된 사슴의 원한까지 한 손에 담아 노먼을 (정확히 말하자면 노먼의 거기를) 쓰러트렸다.

어쨌든 함락시키긴 했으니 노먼이 바라던 방향이 아닐 뿐, 방에 온 목적은 다 이룬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곧 닥쳐올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를 대비한 채로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문제가 생길지 몰라, 한 손에는 여전히 부러진 사슴뿔을 창처럼 쥐고 있었다.

“내 이름도 알면서 색 좀 바꾼다고 못 알아보면 쓰니?”

“……대현자?”

어차피 죽일 놈이니 죽기 전에 진실을 좀 알려 줄 생각이었다.

어디서 봤는데, 제때 지혈하지 못하면 내가 공격한 노먼의 소중한 그곳도 급소기 때문에 과다 출혈로 죽을 위험이 있다고 그랬다.

나는 점점 낯빛이 안 좋아지는 노먼을 보며 상쾌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래, 나 대현자야.”

“하지만 대현자는…… 우리를 공격할 수 없는데…….”

“어어, 그것도 맞아. 너 역사 공부 열심히 했구나.”

하지만 원래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 거고 계약은 깨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간 너무 세계정세에 무심한 채로 살아온 탓에 얼떨결에 계약을 지키고 있었을 뿐, 나는 준법 시민일 필요가 없는 치외 법권적 존재였다.

노먼이 비명을 지르거나 사람을 부르기 전에 침묵 마법을 걸어 두려고 했지만, 한네만이 경고했던 대로 페널티가 부메랑처럼 돌아왔는지 마법 발동이 되지 않았다. 아직 내 주변과 체내에 마나가 그대로 있음에도 그랬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페널티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400년 동안 마법이 있는 채로 살아와서 그렇지, 나는 원래 마법 없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법 사용에 제약이 좀 걸려도 노먼 같은 개 허접을 제압하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침묵 마법을 걸지 못한 대가로 별관이 떠나가라 노먼의 비명이 울렸다. 나는 고막을 울리는 날카로운 비명에 인상을 찡그리며 노먼의 어깨에 사슴뿔을 푹 찔러 넣었다.

주저앉은 노먼이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죄다 내게 집어 던졌지만, 몇 개쯤 맞아 줘도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 위험하다는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도 결국 나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짜증스러웠던 탓이다.

“비명 그만 지르고 너희 아버지 좀 뵈러 가자.”

귓가가 징징 울렸다. 마법 사용에 제약이 걸린 것 말고 내게 또 어떤 페널티가 생겼는지 꼼꼼하게 확인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피를 줄줄 흘리는 노먼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이 방에서 나가면 에이사를 비롯해 나와 같이 잠입한 다른 둘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왕자인 노먼을 인질로 잡아 카만의 왕을 알현해 보기로 했다.

물론 그 왕은 아마도 나를 별로 안 만나고 싶어 할 테지만…… 내전을 빨리 마무리해야 하니 나로서는 별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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