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52화
나는 퍽 잘생겼다.
이건 내가 스스로를 ‘수재’라고 칭하는 것만큼이나 객관적인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는 데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내가 나 보고 잘생겼다고 하는데 남이 어쩔 것인가.
이르커스처럼 화려하게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이르커스 같은 압도적 미남을 빼놓고 생각한다면 나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외양이다.
이펜하임 대륙 내에서 검은 눈과 머리 색을 불길하게 여김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예카리나에게 ‘너 귀엽다’라는 말을 들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어찌 되었든 우리 엄마는 최선을 다해 날 미남으로 낳아 주셨다. 엄마 최고.
오래 살면서 이놈 저놈에게 온갖 추파를 다 받아 본 결과, 통계적으로 나는 유행을 타지 않는 스테디한 미남이라고 할 수 있었다. 4세기 동안 미의 기준이 한두 번 변하는 와중에도 꾸준히 괜찮은 얼굴로 통했기 때문이다.
덕택에 검은색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에이사 같은 애들이나, 색 좀 바꾸니까 바로 관심을 보이는 카만의 왕자 같은 놈들에게 쉽게 호감을 샀다. 루키즘은 인류의 눈이 멀어 버리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쩌다 왕자와 마주치셨습니까?”
“그냥 운 나쁘게? 궁 안에 들어왔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던데.”
“질이 안 좋은 분입니다. 하룻밤 데리고 놀아도 문제없는 사용인들을 꼭 골라 가시거든요.”
그런 것 같더라. 나는 두통이 왔는지 관자놀이를 짚는 하녀장 시네이드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시네이드 입장에서는 위험을 감수하고 반란군을 도와주고 있는 건데, 반란군에서 보낸 대현자가 입궁과 동시에 왕자 눈에 들어 끌려가게 생겼으니 골치가 아플 만도 했다.
“직속으로 넣어 달라고 하시더군요.”
“나쁘지 않은데. 넣어도 돼.”
“무슨 생각이십니까?”
“왕자부터 인질로 잡을 생각.”
까짓 잘난 얼굴로 왕자의 눈에 들었다면 기꺼이 이 얼굴을 이용해 미인계를 발휘해 줄 생각이었다.
이르커스가 알면 난리가 날 테지만, 지금 이곳에 이르커스는 없다. 에델라이드 성격에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이르커스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도 않을 테고.
나는 선선한 얼굴로 하녀장을 향해 미소 지었다.
“뭘 망설여? 그냥 사지로 밀어 넣어. 지금까지 다른 사용인들한테도 그래 왔을 거 아냐.”
“…….”
“아, 이거 너 비난하는 거 아니다? 내가 보기보다 나이가 많아서 냉담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어.”
“……알겠습니다.”
반지르르한 얼굴을 가진 왕족들은 대개 미치광이다. 4세기 동안 꾸준히 겪어 본 결과, 이건 통계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었다. 그 왕자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테지.
나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하녀장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테리즈도 그렇고, 저 하녀장도 그렇고. 그간 비양심적인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 왔으면서 이렇게 지적당하면 기분 나빠 한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아직 인간성이 덜 돌아왔나…….”
돌아오다 말 거면 슬그머니 되찾은 인간성도 다시 말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불멸자 주제에 어중간한 윤리와 도덕이 내재 되는 건 사치였다. 내전 종식만 생각하기도 바쁜 머리로 다른 것들을 계속 신경 쓰게 되는 건 정말 비효율적인 일이니까.
자꾸만 이르커스의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르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정말 애 혼자 집에 두고 출장 나온 부모라도 된 것처럼, 알아서 잘할 이르커스가 자꾸만 걱정이 됐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빨리 돌아가서 토라진 제자를 어르고 달래 줘야 하는데. 세상이 나의 육아에 온갖 훼방을 놓고 있다.
????????????
한네만은 마탑을 탈출할 때, 한참 어린 여동생 에이사의 도움을 받았다. 만약 한네만이 다른 마법사들처럼 혼자 힘으로 마탑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진작 개죽음을 당하거나 알뜰살뜰 실험 재료로 전락했을 것이다.
한네만과 에이사는 따지자면 특별한 구석이 없는 마법사였다. 그저 그런 수준의 마법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둘 다 평균을 웃도는 마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대단한 수준이라고 떠벌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다른 마법사들에겐 없는 독특한 특성이 하나 있었다.
한네만과 에이사는 먼 거리에서도 마도구나 마법 없이 서로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쌍둥이끼리는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말처럼, 사이좋은 남매 사이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남매끼리 말 그대로 뭔가 통하는 게 있다는 건, 한네만이 마탑을 탈출할 때 알게 된 특성이었다.
두 사람이 가진 이 특성은 전서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마법 스승은 한네만과 에이사에게 이 사실을 어디에도 발설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한네만이 생각하기에 그 충고야말로 스승이 준 최고의 가르침이었다. 남매의 이런 소통 능력은 바깥으로 드러나면 악용되기 딱 좋았다.
하지만 이런 특성 덕분에 한네만은 한 번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다는 마탑에서 무사히 탈출했다. 마탑의 감시 없이 바깥에 있는 에이사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이 남매의 특이 체질을 알아채지 못했다. 두 사람이 일부러 말하지 않는 한, 남들에게 발견되지 않는 특성이므로 한네만과 에이사가 남몰래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걸 단번에 알아챈 사람은 이제껏 한 명도 없었다. 대현자 유안조차도 이 남매가 가진 특성을 못 알아봤으니까.
한네만 역시 붉은 매 용병단을 제외하면 어딘가에 이 사실을 발설한 적 없었다. 붉은 매 용병 단원 중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물론, 한네만은 가족과 다름없는 붉은 매 용병 단원이 제 특이 체질을 알게 된다고 해서 이를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가 있다면 로베인 제국의 3황자인 이르커스 로베인도 붉은 매 용병단 출신이라는 것이다.
한네만 남매의 비밀을 아는 극소수에 이르커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르커스는 사사로운 일에 한네만과 에이사를 이용할 생각이 넘쳐흘렀다.
“에이사가…… 대현자님이 좋답니다.”
“좋아하지 말라고 전해.”
“그래도 좋다는데요?”
“하아…….”
이르커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안은 쓸데없이 인기가 많았다. 솔직히 나이도 많고, 싸가지도 없는 데다 제법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임에도 왜 인기 있는지 이르커스로서도 납득이 안 가는 일이었다.
자기처럼 유안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이것은 전적으로 이르커스의 의견이다.) 사이도 아니면서 유안은 툭하면 주변에 사람이 꼬였다.
에이사가 한네만의 여동생만 아니었어도 이르커스는 어린 에이사를 향해 추악한 질투를 드러냈을 것이다. 황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르커스와 달리, 에이사는 지금 유안을 따라 카만 왕궁에 함께 잠입한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웬 왕자 하나가 대현자님께 접근했다네요. 하녀장이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대현자님에게 사적으로 관심이 있는 모양이에요.”
“사적으로?”
“뭐…… 그렇고 그런 의미로요. 아시잖아요. 귀족이나 왕족 중에 또라이들 많은 거. 아, 황자님이 또라이란 소리는 아니고요…….”
한네만은 이 사실을 말하면서도 이르커스의 눈치를 살폈다.
뒤에 서서 아무 생각 없이 이르커스를 향해 ‘에이사한테 대현자 뺏겼대요’라고 놀릴 준비를 하던 트리스탄도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괜히 찔렀다가 피 보는 수가 있었다.
긴장한 두 사람과 달리, 이르커스는 그래도 제법 초연한 얼굴이었다. 이르커스가 내뱉는 한숨의 길이가 더 길어졌다.
“됐어. 유안이 돌아오기 전에 이쪽 일이나 처리해 두는 게 낫겠지.”
“생각보다 정상적인 반응인데.”
“조용히 해, 트리스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아무리 형식적인 약혼이라고 해도, 약혼녀를 좀 신경 써 보는 건 어때?”
“별로. 그쪽도 날 썩 좋게 생각 안 하던걸.”
이르커스는 저와 약혼한 멜킨 소백작을 떠올렸다.
멜킨 소백작은 약혼 자체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지만, 이르커스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도 내비치지 않았다. 영리한 사람이었다. 만약 멜킨 소백작이 조금이라도 제게 질척였다면 이르커스는 남몰래 이 약혼을 끊어 낼 준비를 시작했을 터였다.
“그래도 부탁할 게 있으니, 한번 만나긴 해야겠지.”
카만 왕자의 눈에 띄었다는 유안의 이야기를 더 듣는 건 이르커스에게 하나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유안을 쫓아 카만으로 갈 생각이 아니라면 차라리 에리스 멜킨을 만나 원하는 바를 이뤄 두는 게 이로웠다.
“무슨 부탁을 하려고?”
“궁 안으로 사람 둘 정도 들이려고.”
“사람?”
“비공식적으로 데려올 사람들이 있어서.”
트리스탄과 한네만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르커스의 간소한 인간관계를 돌이켜 봤을 때, 두 사람이 아는 선에서 이르커스가 궁으로 들일 만한 사람은 몇 명 없었다. 그 얼마 없는 몇 명마저도 지금 카만 내전으로 인해 바쁜 상태였고.
“유안도 없는데 누굴 들이려고.”
“유안이 없으니까 불러들이는 거야.”
이르커스는 사밀라가 제게 쥐여 준 수정구를 떠올렸다.
변덕스럽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게 되면 병드는 마녀들을 궁 안에 묶어 두는 건 좀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 이르커스는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예언을 하지 못하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미래란 게 있다. 한유안은 카만 내전에서 무사히 돌아올 가능성이 전무했다. 어디 하나가 잘못되거나 에델라이드의 바람을 이뤄 준답시고 무리한 일을 저지를 게 뻔했다. 라단타와 앙헬 역시 유안이 카만 왕족을 공격해 약해진 상태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이때야말로 기회였다. 이르커스는 사밀라와 쥬리아를 불러들여 유안과의 마법 계약을 서둘러 파기할 생각이었다.
황제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유안은 이르커스가 왕관을 쓰자마자 곧바로 자기 목부터 들이댈 사람이었다. ‘황위’라는 조건이 갖춰지면 이르커스에게 어떤 유예도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카만의 왕자, 이름이 뭐야?”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제법 아무렇지 않은 척 방문을 열고 나서려던 이르커스는 결국 한네만을 돌아봤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네만은 그런 이르커스를 보며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르커스는 아직 미숙한 황자였다. 트리스탄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트리스탄이 생각하기에 이르커스는 유안과 떨어져 있어야 제법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오매불망 유안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는 이르커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트리스탄은 내심 유안이 조금 더 오래 카만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