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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51화 (51/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51화

작전이 없는 게 작전이다.

전쟁을 대하는 내 방식은 보통 이렇다. 구구절절 준비해서 계획적으로 쳐들어가면 더 좋은 성과를 낼지도 모르지만, 전쟁 상황에서 계획 세운 대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음먹은 대로 전쟁을 이끌어 나가는 건 하늘에 세 개 걸려 있는 달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왕궁 내에 배신자가 왜 이렇게 많아?”

“원래 수발드는 사람들은 상전 목 치고 싶어 하는 게 기본이니까.”

보통 마음대로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지금처럼 예상외로 빠르게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래서 꼼꼼한 작전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거다. 전쟁은 돈 많고, 힘세고, 임기응변 잘하는 놈이 무조건 이긴다.

카만 왕족 놈들은 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온 걸까? 얼마나 개판으로 살았기에 며칠 만에 왕궁 지도가 바로 나오지?

보통 왕족이나 황족들이 기거하는 궁은 건설 완료 후 설계자를 죽여 버린다. 이 세계의 건축 학도들은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다. 황궁에 취업해도 다 짓고 나면 죽은 목숨이니까. 뭘 잘못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비밀 유지 때문에 돈 받아서 나가다가 뒤통수 맞고 죽는 것이다.

건설 완료 후, 설계자를 잽싸게 죽여 버리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왕궁의 구조나 성내 지리에 대해서 알아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사용인이나 귀족이 아닐 경우, 평민에게 왕궁이 개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에델라이드는…… 아무리 현 나이트 펠로우의 수장직을 맡고 있다지만 순식간에 왕궁 설계도를 손에 넣은 채 득의양양한 얼굴로 내게 돌아왔다.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사흘 만에 돌아온 게 놀랄 일이었다.

말을 들어 보니 왕궁 안에서 일하는 놈 중에 반동분자가 엄청나게 많단다. 나는 이럴 때마다 <이르커스의 서>를 한국인이 썼다는 게 와닿았다. 그렇지. 상전 목 존나 치고 싶지. 심지어 카만 왕족들은 좋은 상전도 아니었다. 봉급을 많이 주면 뭘 하나, 사람을 도구처럼 쓰는데.

예부터 공무원 중에 나라님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들었다. 지독하게 착취하는 윗대가리에게 어떻게든 엿 한 번 먹여 보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고 모여, 에델라이드 손에 이 설계도가 떨어진 거였다.

“여기 통로 보이지? 사용인들 전용 출입 통로.”

“어.”

“귀족들 드나드는 곳이랑 구분하려고 외진 곳에 따로 만들어 뒀는데, 감시가 삼엄하지 않대.”

“거길 감시 안 하면 대체 어딜 감시하는데?”

“사용인들이 자기들한테 덤빌 거라고 생각 안 하나 보더라고.”

이래서 왕족들이란…….

세계사 공부 조금만 해 봤으면 보통 모든 내전은 하층민들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텐데.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진 탓에 다들 심각하리만큼 방심하고 있었다.

“너 이런 개 허접들한테 밀리고 있었던 거야?”

“개 허접이라니. 규모가 다르잖아.”

“규모가 크면 뭐 해. 대가리가 아주 사방에 적을 두고 있구만.”

“그만큼 지지자도 많아. 이미 뒈진 놈이지만 아처볼드 같은 새끼들은 얼마나 왕족들을 섬겼는데.”

졸부나 귀족들이 왕족 편을 들고 있으니 이만큼 밀렸다는 게 에델라이드의 변명이었다.

하기야, 평민 100명이 계급제 철폐해 달라고 앞 구르기 뒤 구르기를 해도 귀족 하나가 ‘반란이다! 쟤네 다 죽여!’라고 하면 속절없이 죽는 게 이 세상의 논리였다.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거 말고 상대할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사용인으로 위장해서 잠입하는 게 제일 안전할 거야. 나는 팔이 하나 없으니 너무 눈에 띄어서 안 되고, 다른 애를 붙여 줄게.”

“기왕이면 마법사 하나 끼워 줘. 걔한테 업적 떠넘겨야 하니까.”

“업적이 아니라, 책임을 떠넘기는 거겠지.”

“그거나 이거나. 실한 놈으로 부탁해. 대단한 마법은 안 쓸 거지만, 적어도 대현자 대역할 만한 놈이 해야지. 안 그러면 자존심 상한다고.”

“어련하시겠어.”

에델라이드가 혀를 차며 왕궁 설계도를 도로 치웠다.

왕궁은 황궁보다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황궁 구조에 비해 복잡성이 떨어졌다. 황궁 비밀 통로 어디에 있는지도 거의 다 외우는데, 이 정도야 세계사 연도 외우던 암기력으로 한 번에 기억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작전은 없지, 당신.”

“걱정 마. 안 되면 냅다 마법 쓰고 탈출할게.”

“정말 대책 없다.”

“대책이 없긴 왜 없어? 내가 대현자인데.”

나 자신이 가장 큰 대책이다.

“영생 저주만 믿고 너무 방심하지 말라고.”

“방심은 내가 아니고 카만 왕족들이 한 거고.”

나는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 에델라이드를 모른 척하며 로브를 더 깊숙이 뒤집어썼다.

잠입을 위해서는 마도구의 도움을 좀 빌려야 했다. 검은 머리랑 검은 눈은 언제 어디서든 참 도움이 안 된다.

????????????

테리즈가 왕궁 잠입을 위해 내게 붙여 준 인원은 총 세 명이었다. 단출해도 너무 단출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쪽이 편했다.

“에이사예요.”

실한 놈으로 붙여 달라고 했던 마법사도 잘 구해 온 것 같았다.

이르커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그래도 나이에 비해 마법사로서의 자질이 있어 보이는 어린 여자애가 나를 따라왔으니까. 들어 보니 황궁에서 마탑주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을 한네만의 여동생이라고 했다.

에이사는 신입 사용인 역할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다른 둘도 에이사만큼 어려 보였다. 왕궁에 새로 들어온 사용인 역할을 해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이 중에서 그나마 20대로 보이는 건 나 하나였다.

괜히 어린 시절의 이르커스가 생각나서 애들한테 제법 친절하게 굴게 됐다. 에이사는 내가 꽤 마음에 드는지, 노골적으로 긴장한 티를 내는 다른 둘과 달리 내 옆에 꼭 붙어서 이것저것 말을 붙였다. 한네만은 잘 지내는지부터 이르커스는 어떤 사람인지 등을 물어봤다.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이르커스가 하렘을 차린다면 에이사가 그 안의 한 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자면 이르커스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 보이니까.

그 생각이 들고 나니 에이사한테 멋진 업적을 세워 줘야겠다는 결론이 섰다.

우리 이르커스랑 잘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멋진 신분을 쥐여 줘야지. 수준이 서로 맞아야, 하렘에서도 어디서나 당당하게 걸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 아닌가.

“대현자님은 들었던 거랑 좀 다르신 것 같아요.”

“뭘 들었는데?”

“오빠도 그렇고 길드장님도 그렇고…… 웬만하면 대현자님이랑 엮여서 좋을 것 없다고 그랬거든요.”

“어어, 틀린 말은 아니다.”

“틀린 말 같은데. 전 대현자님이 정말 좋으신 분 같아요.”

미래의 N번째 며느리에게 인정받는 시아버지가 된 기분이었다.

눈을 빛내며 내게 달라붙어 오는 에이사를 자연스럽게 떼어 내고 마도구를 써서 머리와 눈 색을 바꿨다.

궁 안에서까지 같이 온 인원들이 나를 ‘대현자’라고 불러선 안 될 노릇이므로 나는 세 사람에게 나를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고 지시했다.

유안이라는 이름이 흔한 편은 아니지만, 대현자라는 호칭은 알아도 내 본명까지 구구절절 외우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치 도스도옙스키의 본명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도옙스키인 걸 웬만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처럼.

로브를 벗고, 왕궁 사용인들이 입는 복장을 차려입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정말 앳됐다. 나이 400살이 넘었는데 열아홉 살 때랑 크게 달라진 게 없었으니까.

보타이를 맨 게 도대체 얼마 만이더라.

마도구의 영향으로 검은 머리는 갈색으로 변하고, 검은 눈 역시 파란색이 됐으니 이 정도면 대현자라는 의심은 받지 않을 터였다.

나는 옷을 갈아입은 후부터 내게 더욱 스스럼없이 들러붙어 오는 에이사와 눈에 띄게 긴장한 나머지 둘을 데리고 입궁 준비를 마쳤다.

“에델라이드가 포섭해 둔 하녀장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시네이드요.”

“좋아. 잠입해서 일은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 우린 월급 없으니까.”

내 말에 에이사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나머지 둘도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는데, 얘네 듣기에는 웃기려고 한 소리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긴장한 게 티가 나는 것보다 이렇게 풀린 분위기인 편이 나았으므로, 나는 나보다 한참 어린 애들 셋을 데리고 사용인 출입구 쪽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

“이름이 뭐지?”

앞서 말했지만, 정말 계획과 작전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보통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입궁해서 하루도 안 지났는데 왕자랑 마주치냐.

일개 신입 사용인이 연차도 안 쌓였는데 왕자랑 대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터였다. 그런데, 내가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하녀장 시네이드를 만나기도 전에 왕자 놈에게 붙잡힌 것이다.

“유안…… 입니다.”

몇 번째 왕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왕자는 꽤 번드르르한 외관이었다.

내가 옛날에 카만의 왕을 후천적 탈모로 만들었음에도 머리숱 역시 풍성했다. 이쪽도 부계 유전자보다 모계 유전자가 힘을 낸 모양이었다.

“대현자와 이름이 같군.”

게다가 이놈은 도스도옙스키의 본명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도옙스키라는 걸 외우고 다니는 독특한 놈이었다. 내가 아무리 대책 없이 살아도 입궁하자마자 걸릴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이 자식 입에서 ‘너 대현자지?’라는 말이 나오면 잠입이고 뭐고 그냥 번개부터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왕자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띤 채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신입이라고 했었지. 하녀장에게 널 내 쪽으로 보내 달라고 해야겠어. 몇 살이니?”

400살 넘었다, 인마.

나는 속으로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 게 초면에 반말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스물하나라고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이놈은 아주 순진하게도 내 거짓말을 믿는 눈치였다. 어리석은 놈. 나는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뻘이거늘.

같이 입궁한 에이사가 복도 끝에서 나와 왕자를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둘은 그래도 눈치 있게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나는 에이사를 향해 빨리 하녀장에게 가 보라는 수신호를 보냈지만, 에이사는 아무래도 내 수신호를 못 알아먹은 것 같았다.

“그럼, 나중에 보자.”

왕자가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내가 정말 평범한 스물한 살이었더라면 이 접촉의 의미를 몰랐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나이를 처먹을 대로 처먹어서 이게 일종의 어필이라는 것을 곧바로 눈치채고 말았다.

하……. 역시 어느 세계에서나 먹히는 얼굴로 태어나면 곤란하다니까.

나는 왕 전에 왕자 먼저 죽여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내게 허겁지겁 뛰어오는 에이사를 향해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어어, 걱정하지 마. 죽을 놈은 내가 아니라 저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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