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50화
“뭐 하러 왔어?”
환영 인사 한번 참 싸가지 없게 한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게 검을 겨누는 남자의 팔을 가볍게 쳐 냈다. 미리 방검 마법을 걸어 둔 덕분에 검날이 손에 닿아도 베이지 않았다.
“네 할머니가 너 살려 달라고 나한테 부탁했거든.”
에델라이드 펄번의 꼴은 솔직히 말해서 처참했다.
건강함을 뽐내던 길고 풍성한 머리칼은 엉망으로 잘려 있었다. 아마도 전투 중에 쥐어뜯겼거나 혹여 머리채를 잡혔을 때를 대비해 스스로 자른 게 분명했다.
게다가 팔은 또…… 저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테리즈가 왜 기어이 내게 에델라이드의 목숨을 부탁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캐러벨 한가운데에서 식료품점으로 위장하고 있던 나이트 펠로우의 거처는 이미 전소된 지 오래였고, 에델라이드가 꾸린 반란군은 수도에서 떨어진 외곽 도시로 도망쳐 군대를 다듬는 중이었다.
말이 군대지 한눈에 봐도 다들 오합지졸이었다. 돈 받고 고용된 용병이 절반이고, 그 외 참여자들은 에델라이드와 눈에 띄는 몇 명을 제외하면 검사도 마법사도 아니었으니까.
“넌 참 용기가 가상하다. 가망 없을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실행을 하고.”
“속 긁을 거면 꺼져.”
“비난하는 거 아니야. 그냥, 테리즈랑 네가 참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부분에서 다른 게 신기해서 그러지.”
에델라이드의 새파란 눈이 나를 형형하게 노려보았다. 도와주러 와서 본전도 못 건지고 가게 생겼네.
나는 팔 한쪽이 날아간 에델라이드의 상체를 짧게 훑어보곤 치료 마법을 걸어 주었다. 이미 잘려 나간 팔은 복구할 수 없지만, 고통은 좀 덜할 것이다.
“가망이 없다고 손 놓고 있는 건 태만이야.”
“사람은 적당히 태만하게 살아야 장수하는 법이고.”
“그래서 너는 영생을 살게 됐나?”
“…….”
“비참하게 죽더라도 카만을 바꿀 수 있다면 난 그걸로 만족해.”
차라리 에델라이드가 테리즈처럼 포기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이해하기 편했을 것이다. 그간 내가 봐 왔던 인간 군상과 별로 다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에델라이드는…… 타협이 되지 않는 위인이었다.
가끔 이런 인간들이 드물게도 세상에 나타난다. 목숨을 걸고 드래곤과 싸워 마을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사랑이나 신념 때문에 타오르는 불길에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자들. 극히 드물지만, 영웅의 숙명을 타고난 인간들.
“전력에서 밀려서 여기까지 쫓겨난 주제에 말은 잘하지.”
“속 긁어 놓을 거면 꺼지라고 했지.”
“나 없이는 못 이길 텐데?”
“너 없이도 나는…….”
“죽겠지. 테리즈는 울 거고.”
“…….”
“내전에서 승리한다고 한들 네가 바라는 미래는 실현되지는 않을 거다. 세상은 원래 그러니까.”
반란이 혁명이 되어 제도가 폐지되고,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되더라도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았다.
신분제가 철폐되면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계급을 나눴다. 암묵적으로 차등을 두고 서로를 괄시하는 건 인간의 타고난 습성이었다.
“하지만 너 같은 애들은 곧잘 영웅이 되거든.”
나도 참, 사람 보는 안목 하나는 탁월하다니까. 이르커스 홈 스쿨링 할 때 나무 정령이랑만 놀게 두면 정서 교육에 안 좋을 것 같아서 억지로 붙여 줬던 어린애가 이런 영웅적 성향을 타고난 인간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나, 황궁에 애 두고 와서 바빠.”
“어련하시겠어.”
이르커스가 로베인 제국의 황제가 되고, 에델라이드가 카만의 군주나 지도자가 된다면 두 국가 사이의 외교는 큰 문제 없을 것이다. 나라는 교집합이 생긴 거나 다름없으니 억지로라도 잘 지내겠지.
이건 미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다. 나는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이르커스의 얼굴을 억지로 지워 내며, 에델라이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뭐야?”
“항상 왕족 놈들 목을 치고 싶기는 했어.”
“카만 사람이 아니라 완전 한국 사람이네, 너.”
“한국이 어디야?”
“그런 게 있어. 그래도 그렇지, 반란이 일으키고 싶다고 그냥 막 일으킬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반란에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로는 돈.
이거 없이는 반란을 할 수 없다. 종종 돈 없이 반란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대부분 말미가 좋지 않았다. 어쨌든 사람은 승리하게 되면 보상을 얻고 싶어 하기 마련이고, 그런 심리를 조금이나마 채워 줄 수 있는 게 바로 재화였다.
두 번째로는 무력.
이거 없이도 반란은 못 일으킨다. 말로 안 돼서 집단 패싸움을 일으키는 거니만큼 검사든 마법사든 힘 좀 쓴다 하는 놈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테리즈도 에델라이드가 이 ‘무력’ 부분에서 엄청나게 밀리니까 나보고 도와달라며 쫓아온 것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
그건 바로 명분이다. 무슨 싸움을 하든 명분이 제일 중요하다. 이유 없이 일단 주먹부터 날리고 보면 선빵 필승의 논리에 따라 싸움에서 이길 확률은 커져도 그 뒤에 꼭 문제가 생긴다. 내가 남한테 주먹 갈길 때 가만히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놈 중 하나가 ‘너 쟤 이유 없이 때렸더라? 그 이유로 나한테 좀 맞자’ 하고 역습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계기야 많지. 일단, 세금을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올린 거랑 캐러벨 내 땅값 떨어진다면서 집 없는 어린애들 다 수용소로 끌고 간 거.”
“그게 다야?”
“귀족들이 고아원 있던 곳에 클럽 하우스 세우고 거기서 도박하고 인간 경매하는 거, 왕이 다른 나라에 알음알음 카만 국영지 팔아 치우는 거, 후궁 선별이랍시고 싫다는 어린 여자애들 궁으로 납치해 가는 거…….”
“개 많네.”
그 뒤에도 에델라이드는 평온하게 카만 왕족들의 비리와 부정부패, 범법 행위들을 줄줄 읊었다.
이 정도면 대륙의 주 종교인 엘리오스교 신관들이 뛰어와서 왕족들을 데리고 대륙 끄트머리에 있다는 교화소에 집어넣어도 모자랄 판인데, 신전 쪽에도 얼마나 로비를 잘했는지 카만의 귀족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신관들이 무죄 판결을 내려 준단다.
어디든 썩어 빠진 나라는 하는 짓이 그 나물에 그 밥이구나. 저 난리를 치고도 아직 왕권이 건재하다는 게 놀라웠다. 테리즈 때부터 반란을 꿈꾸던 반동분자들은 많았는데, 실제로 실천에 옮긴 건 에델라이드인 모양이었다.
“처음엔 반란을 지원해 주겠다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어.”
“지금은 딱히 많아 보이지 않는데.”
“남들 보기에도 가망이 없으니까. 다들 지원하러 오려다 말거나, 이탈해 버렸지.”
에델라이드가 잘려 나간 자기 오른팔을 가리켰다.
캐러벨에서 왕실 기사단이랑 전투를 치르다 공격 마법에 잘못 휩쓸려서 팔이 날아갔다고 했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에델라이드가 이렇게 다친 뒤로 반란군의 기세는 절반으로 뚝 꺾여 버렸다.
“대현자가 도와주게 됐다는 걸 알리면 기세는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
“알리면 안 된다니까? 나 너 도와주는 거 비밀이라고.”
“제국 놈들은 거의 다 알고 있다면서?”
“일단 대외적으로는 비밀 맞아. 공공연한 비밀. 소리 없는 아우성. 뭐 그런 거지.”
로베인 제국 3황자…… 의 보호자인 내가 카만 왕국의 내전에 간섭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면 아무래도 곤란하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부분이라, 라단타 쪽도 다 알고 있으면서 이 지점에 대해서는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전세를 뒤집는 건 어렵지 않지만, 너무 대놓고 공격 마법을 쓰면 ‘저거 대현자 아냐?’라는 의심을 살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은밀하게 도와주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테리즈가 나한테 부탁한 건 승리가 아니라 네 목숨이야, 에델.”
“내 호위만 하고 싸워 주지는 않겠다는 뜻이야?”
“비밀스럽게 도와주는 거니까,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나서기는 어렵지. 하지만 네가 만약 죽을 것 같으면 내가 널 제국으로 망명시켜 줄 수는 있어.”
“그럴 필요 없어.”
“테리즈가 그걸 원하는데도?”
“……할머니가 내 인생을 멋대로 정할 수는 없는 거잖아.”
내가 테리즈도 아닌데 억장이 무너졌다. 아이고, 손녀 키워 봐야 다 소용이 없네. 내심 이르커스와 에델라이드가 겹쳐 보이기도 했다.
내가 원한다고 이르커스가 원한다는 보장이 없고, 테리즈가 바라더라도 에델라이드는 바라지 않을 수 있다. 당연한 일인데도 이 가능성을 보호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잊어버리곤 한다.
“내가 바라는 건 내 생존이 아니라, 변화야.”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발만 담갔다가 도망치려고 했는데, 에델라이드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모르쇠로 일관하기도 어렵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가 그렇게 클까? 한네만은 내가 죽지 않는 것 때문에 마법 사용에 제약이 걸리거나 다른 피해를 입을 거라고 경고했지만, 사실 그 경고가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이미 온갖 저주에 다 걸려 본 몸이었다. 마도구 개발하다가 잘못 건드려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5년 정도 잠들어 본 적도 있었고, 드워프들이랑 의견 차이로 좀 싸웠다가 웬 주술에 잘못 걸려서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려 본 적도 있었다.
아무렴 400년 넘는 세월 동안 순탄하기만 했을까. 마법 사용에 제약 걸려 본 일도 한 100살 조금 넘었을 때쯤 기간과 효력만 좀 다를 뿐이지 30년 단위로 당해 봤다. 200살 넘고서는 그런 일 없었지만.
아직 안 어겨 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한네만이 유난을 떤 것처럼 마법 계약 좀 어긴다고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뭣보다 문제 생겨도 어차피 안 죽는데 상관없지 않나?
나는 안전 불감증에 걸린 현대인처럼 내 마음속에서 답이 정해진 결론을 내리고 에델라이드를 돌아봤다.
“그럼 그냥 대가리부터 잡아 족치자.”
“뭐라는 거야.”
“시간 없으니까 왕궁으로 바로 진입해서 왕부터 치자고.”
“너 공개적으로는 나 못 도와준다며.”
“그러니까, 비밀스럽게 쳐들어가야지.”
마법사는 은밀 행동에 취약하다. 마법을 쓰면 마나의 흐름이 바뀌는 것 때문에 엄청 티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사와 달리 정보 길드에 속한 인간들은 은밀 행동이 본업이다.
“잠입할 만한 길만 알아 와. 때리는 건 내가 때릴게.”
은밀 행동이 본업인 인간들이 길을 좀 마련해 놓으면, 내가 들어가서 벌집 들쑤시는 것처럼 휘젓고 나오면 된다. 마법사 한 놈 데려다 놓고 ‘이놈이 그랬어요’ 한 다음에 나는 쏙 빠지면 그만이지.
“진짜 남의 일이라고 속 편하게 말한다. 그게 말처럼 쉽게 될 것 같아?”
“못 하겠니?”
“…….”
“그럼 나이트 펠로우도 그냥 그 정도였던 거지.”
“……길 알아 오면 어쩔 거야.”
“어쩌긴. 네 이름 역사 교과서에 실리는 거지.”
내전 조별 과제…… 한번 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