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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49화 (49/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49화

    걸출한 인물 하나가 한 나라를 향해 덤벼드는 건 사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종종 정말 바위 깨기에 성공해서 역사서에 이름을 올리는 위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성공 확률 자체가 낮은 일이었다.

    현대 대한민국처럼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 도는 게 빠르기라도 하면 모를까, 이 세계는 전쟁이 터져도 소식이 도는 게 너무 늦었다. 지원군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소리다.

    에델라이드가 반란을 일으킨 곳은 카만의 수도 캐러벨일 텐데, 캐러벨에는 왕족들에게 호의적인 귀족이나 상인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왕족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이득을 보는 기득권층이 에델라이드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동조할 리가 없었다. 실제로 에델라이드와 같은 뜻을 품고 있는 이들은 소식이 닿지 않는 거리에 거주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고.

    한마디로 에델라이드는 나이트 펠로우의 사활을 걸고 적의 근거지에 냅다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인이 일으킨 반란이 실패하게 되면 자기가 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테리즈에게 물려받은 정보 길드 역시 문을 닫게 될 터였다. 문만 닫으면 다행이지,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목도 다 같이 날아갈 것이다.

    그만큼 어려운 싸움이었다. 몇십 년 전에 테리즈가 반란을 결심해 놓고 일으키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반란은 일종의 도박이다. 이기면 혁명이 되지만, 지면 모든 걸 잃는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윗대가리의 목을 치겠다고 덤벼드는 건 웬만큼 용기가 있지 않은 이상 어려운 일이다.

    “난 분명 도와주지 않겠다고 답장했어, 테리즈.”

    카만에서 내전이 터진 지 한 달이 좀 지나지 않아, 에델라이드는 곧바로 수세에 몰렸다.

    준비는 꽤 철저하게 한 모양이지만, 로베인 제국 쪽에서 1황자가 사병을 풀어 카만 왕족을 도와줄 것이라는 건 아무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에델라이드일지라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 테리즈가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를 만나러 로베인 제국까지 행차한 것이다. 이미 몇 번 테리즈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받았지만, 처음 한 번 답장한 걸 제외하곤 모두 반송했다.

    계속 도움을 주지 않겠노라 거절하는 것도 사실 좀 곤란했다. 전 같으면 나는 국가 문제에 관여 안 한다며 모르쇠로 일관할 수나 있을 텐데, 이르커스의 황위 계승에 손을 뻗은 다음이라 그런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난 이제 얼마 안 가 죽어.”

    “알아. 넌 나이가 많으니까.”

    “노인들은 종종 자기 살날이 얼마 남았는지 안다고들 하잖아. 사실 조금 더 일찍이 죽었어야 하지만, 빌어먹을 대현자 하나가 내 주치의 노릇을 5년이나 해 준 탓에 못 죽고 살아 있었지.”

    “감사하다고 해도 모자랄 판국에 내 탓을 하는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살아서 이 꼴을 봤겠니.”

    테리즈는 그새 더 늙어 있었다. 마법을 써서 제국으로 온 게 아니라, 마차로 이동했다고 들었으니 긴 여정에 지쳐 피로해 보이기도 했다.

    “에델이 나처럼 결심만 하고 실행은 하지 않기를 바랐어.”

    “애들은 원래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지.”

    “그 애가 나보다 먼저 죽을까 봐 요즘은 매일 밤이 두렵구나.”

    내가 테리즈 펄번을 이해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아끼는 인간이 나보다 먼저 죽을까 봐 밤이 두렵다는 소리가 마음에 와닿았다.

    더욱이 자기 핏줄을 끔찍이 아끼는 테리즈라면 내가 체감하는 것보다 더 큰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때로 사람은 자신의 죽음보다 타인의 죽음을 더 무서워하곤 하니까.

    희게 센 머리칼과 주름진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말괄량이처럼 빳빳하던 등도 굽어 있었다. 세월은 야속하게도 테리즈를 피해 가지 않았다. 필멸자들은 모두 이렇게 늙었다.

    “죽기 전 마지막 부탁이다, 유안.”

    “……도와줄 수 없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넌 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지. 이르커스는 도와주면서 내게는 손 한번 내밀어 주질 않았어. 그게 원망스러워서 한평생 네 탓을 하며 살았다.”

    “…….”

    “하지만 지금이라면 너도 날 이해하잖아.”

    만약 몇십 년 전 순순히 테리즈를 도와주었더라면 세상은 조금 바뀌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의 테리즈는 열의만 가진 젊은이였다. 반란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이 나이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에델을 도와줘.”

    오랜 세월을 살면서 나는 타인으로부터 ‘도와달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인간에게만 들은 것도 아니었다. 온갖 이종족이 시간이 흘러넘치는 내게 이것저것 부탁을 해 왔다. 영생 저주에 걸리기 전에도 예카리나로부터 자기 자녀들을 부탁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던가.

    이런 부탁을 들으면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차갑게 거절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 쉽게 싫다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에델라이드의 죽음은 냉정하게 말해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테리즈는 에델라이드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테리즈가 살아온 세월만큼 테리즈의 부탁을 거절해 온 매정한 대현자였고, 이건 테리즈가 죽기 전 하는 마지막 부탁이었다.

    “난 늘 네 부탁을 거절했어, 테리즈.”

    “유안.”

    “이르커스를 황제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바빠. 지금 널 만나는 것만으로 외교적인 마찰이 생길 수 있는 입장이고.”

    몸을 일으켜 맞은편에 앉아 있는 테리즈에게 다가섰다.

    확실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기운이 쇠한 게 느껴졌다. 이런 상태의 인간은 치료 마법도 소용이 없다. 노화는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곧 죽을 사람들은 내게 항상 곤란한 부탁만 할까.”

    이성적으로는 내 선택이 바보 같다는 걸 안다. 한 20년 전에 이런 부탁을 받았더라면 분명 ‘내가 왜?’라고 대꾸한 뒤, 남쪽 숲에 틀어박혀서 잠이나 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20년 전의 나와는 또 달랐다.

    40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이, 어떤 시기마다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해 보는 선택지를 골라잡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번 딱 한 번만이야. 내전에 깊이 관여하지 않을 거고, 에델라이드의 목숨 말고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을 거다.”

    “…….”

    “도와줄게.”

    테리즈는 내 말에 눈물을 보였다. 그 테리즈 펄번이 내 앞에서 울다니, 정말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

    “결국 카만으로 갈 거면서 왜 그렇게 질질 끌었소?”

    “닥쳐, 트리스탄.”

    “나보고 맨날 닥치라지. 서러워서 살겠나.”

    “그럼 뒈지든가…… 아니다. 나보다 먼저 뒈지면 죽는다.”

    남이 파 둔 함정에 맨몸으로 뛰어들려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어쩌다 마음이 이렇게 약해져서 이런 일을 도와주고 있지? 이게 다 이르커스를 거두면서 생긴 변화였다. 애 키운다고 너무 물렁물렁해졌다.

    나는 이죽거리는 트리스탄의 입에 다과를 집어 억지로 욱여넣었다.

    내가 결국 테리즈의 부탁에 못 이겨 에델라이드를 도우러 카만에 다녀오겠다고 말하자, 이르커스는 모호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혼자서 가는 건 반대야.”

    “얼마 안 걸릴 거야. 낙뢰 몇 번 치고 돌아오면 그만이니까.”

    “당신, 카만 왕족과 맺은 마법 계약이 있잖아.”

    고개가 절로 트리스탄 뒤에 앉아 있는 한네만을 향해 돌아갔다.

    아니, 저 새끼가 마도구 뇌물을 처받아 놓고 애한테 바로 고자질을 해? 한네만은 내가 자기를 노려보자, 트리스탄 뒤로 허겁지겁 몸을 구겨 숨었다.

    “왕족에게 위해를 가하지도 못하면서 왕궁에 낙뢰는 어떻게 치려고?”

    “그럼 그냥 에델이 어디 잡혀서 다치거나 죽지 않게 도와만 주고 올게.”

    “그럼 시간이 꽤 걸리겠지. 차라리 같이 가.”

    “이르. 여긴 남쪽 숲이 아니야. 떼쓸 상황이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니.”

    “당신은 내가 지금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리는 걸로 보여?”

    그야 라단타랑 신경전 해 가며 세력 구축하고, 황위 찬탈을 노려야 할 놈이 나 따라서 내전 일어난 카만에 얼굴을 비추러 가겠다는데 고집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공식적으로 돕는 게 아니니까 외교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황궁 쪽에도 한 달 정도 남쪽 숲에서 연구하고 온다고 말해 뒀고.”

    물론 대외적으로 그렇게 말해 뒀을 뿐, 내가 카만을 도우러 간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애초에 이러라고 라단타가 판을 깔아 주기까지 한 거 아닌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한 달 이상 걸릴 것 같으면 그냥 에델라이드 목숨만 건져서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그다음에 에델라이드는 카만 말고 다른 나라로 망명시키면 그만이지. 테리즈가 도와달라는 것도 에델라이드의 ‘승리’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머릿속으로 날짜 계산기를 팽팽 돌리는데, 이르커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 마음대로 해.”

    이 무슨 사춘기 청소년 같은 언사란 말인가. 엄마랑 싸우고 나서 방문 쾅 닫고 들어가며 ‘엄마 마음대로 해!’라고 소리치던 지난날의 내가 떠오르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평범한 청소년이 아닌 이르커스가 내뱉은 그 말은 조금 싸늘한 구석이 있었다.

    아주 예전에 죽어야겠다는 내 타령을 배경 음악처럼 듣던 시절에 이르커스가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 뭔가 상처 받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나를 포기할 생각은 없는 뉘앙스가 겹친다고 해야 할까.

    나는 이르커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안 풀어 주면 또 얼마나 이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지 몰랐다.

    이르커스의 팔을 붙잡기 위해서 손을 뻗는데, 내 손길을 가볍게 피한 이르커스가 역으로 내 손을 움켜잡았다.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난 너한테 돌아올 거야. 우리 사이엔 계약이 있으니까…….”

    “계약이 없으면?”

    금방 회복될 테지만, 잠깐 정도는 이르커스가 쥔 대로 붉은 손자국이 남을 게 분명했다.

    나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이르커스가 처음으로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자랐지? 금세 훌쩍 자란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매번 이렇게 가까이 마주할 때면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모든 게 새삼스러웠다.

    “계약이 없으면 돌아오지 않을 거야?”

    있는 계약을 굳이 없다고 가정하는 이유가 뭐냐고 되받아치고 싶었다. 이르커스의 자색 눈이 불온하게 일렁거리지 않았다면, 나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먼저 캐물었을 터였다.

    트리스탄 일행이 뒤에서 우리를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추문을 잠재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무리 방 안에 같은 편인 인간들만 모여 있다고 하더라도 말은 언제 어디서 어디로 샐지 몰랐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르커스에게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살짝 필요했다.

    “계약이 없어도 나는 너한테 돌아올 거야.”

    “…….”

    “내 우선순위는 언제나 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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