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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48화 (48/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48화

“이르는 참 운도 좋죠.”

라단타는 제 조부인 베첼 공작과 마주 앉아, 퍽 우아한 모양새로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준비된 고급 다과에는 라단타도 공작도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마음 놓고 디저트를 즐기기에 상황이 썩 좋게 흘러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죽어서 나온다는 남쪽 숲에서 자기를 끔찍이 아껴 주는 대현자를 만나고. 이래서 사람의 운명은 타고난다는 소리가 있는 건가 봐요.”

“라디, 대현자가 뒤를 봐주고 있다고 해도 황제가 되는 건 너일 거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

“불안해하는 게 아니에요. 부러워하는 거죠. 모든 걸 다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제 주위에 대현자 같은 사람은 없더군요.”

“…….”

“조부님을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조부님이 절 아끼시는 것도 제가 결국 황제가 될 재목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이르는…… 다른 건 다 없어도 자기를 아껴 주는 사람 하나는 확실히 얻은 것이고.”

라단타는 진심으로 이르커스가 부러웠다. 어려서부터 이르커스는 라단타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모친이 마녀인 탓에 타고난 마나 양이 뛰어난 건 말할 것도 없고, 추레하게 다녀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면면 역시 라단타의 신경을 긁어 놓기 일쑤였다.

다른 형제들보다 이르커스를 먼저 없애려고 기를 썼던 것도 그래서였다.

기반이 약해 죽이기 쉬울 것 같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라단타는 온갖 수를 써 이르커스를 죽이고자 노력했다. 속에서 기묘하게 피어오르는 열등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살인 모략에 쏟은 노력으로 제왕학을 조금 더 공부했더라면 라단타는 타고난 성질머리를 교육으로 누르고 성군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르커스는 다른 두 형제가 라단타의 손 아래에서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잘만 버텼다. 쥐새끼도 저 정도로 도망을 잘 다니지는 못할 터였다. 무슨 독을 써도 그 순간 피를 토할지언정 죽지는 않았다. 황궁 정원에 돋은 잡초보다 질긴 생명력이었다.

그래서 도망가게 뒀다. 라단타는 이르커스가 황궁을 빠져나가 남쪽 숲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을 느꼈다. 나무 정령들에게 발목이 잡혀 그곳에서 죽어 버릴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이르커스 로베인은 죽지 않았다. 자기를 보호해 주고 더 강하게 키워 줄 스승을 구해 황궁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했다.

라단타 입장에서 이르커스는 몇 번을 내리쳐도 뿌리가 뽑히지 않아 다시 자라는 질긴 나무 같은 존재였다.

“멜킨 경은 3황자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습니까?”

“아니, 아직은 우리 쪽에 발을 걸치고 있어. 위험한 도박을 할 만큼 배짱 있는 인간이 못 되니까.”

“박쥐 노릇을 하고 있겠군요. 우리에게 정보를 주는 만큼 저쪽에도 우리 정보를 팔아넘길 것이고.”

“그래도 멜킨 소백작이 3황자의 약혼녀가 되었으니, 아직 우리 손에서 놓아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니.”

“고작 소문 하나 틀어막겠다고 약혼을 그리 서두르는 걸 보니 찔리는 구석이 많은가 봅니다.”

라단타는 거만한 태도와 달리, 앳된 생김새를 가진 대현자를 떠올렸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이르커스의 외모와 비교하면 수수한 생김이었지만, 누가 봐도 꽤 곱상하다는 말이 나올 법한 면면이었다.

400살이 넘었다곤 하나 인간은 결국 시각적인 자극에 약한 동물이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녀 얼굴을 자주 노출하지 않는 대현자일지라도 노인이 아닌 청년의 외양을 가지고 있으니 불씨만 조금 지펴 준다면 이르커스와 대현자가 부적절한 관계라는 추문을 퍼트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승 이전에 연인이라면 더 재밌을 텐데요.”

“3황자는 확실히 대현자를 사모하더군. 아랫것들이 거의 다 알 정도로 말이야.”

어려운 일이 아닌 만큼 치명적으로 작용할 확률도 적은 사안에 대현자가 직접 나서서 약혼을 서둘렀다는 건 확실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대현자도 과하게 이르커스를 아끼죠. 이르커스를 죽이면 대현자가 저를 죽여 버릴 거라고 하더군요.”

“그런 말을 면전에 대고 하더냐? 상당히 무례한 자야.”

“저도 대현자에게 퍽 무례하게 굴었으니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라단타는 앙헬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마도구를 떠올렸다.

관 형태의 마도구는 관에 들어가는 순간, 마법 계약 여러 개가 자동으로 실행되게끔 설계돼 있었다. 아무리 대현자라도 마법으로 맺은 계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터였다.

여러 장치를 설치하다 보니 부피를 줄일 수 없어서 누가 봐도 ‘나 함정이오’ 상태로 완성되기는 했으나, 대현자를 그 관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무력하게 만든 뒤 몇 세기 정도 봉인해 버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현자를 묶어 둘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마땅한 유인책도 없고, 이간질을 한다고 넘어갈 위인도 아니니.”

문제가 있다면 대현자를 그 마도구에 들어가게끔 유인하거나 제압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마탑주 앙헬을 어떻게 쥐어짜 봐도 이게 한계였다.

“음,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듯한데.”

식은 찻잔을 손으로 감싸 쥔 베첼 공작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카만을 패로 쓰는 건 어떻겠느냐? 마침 시기 좋게 내전이 터졌고, 알아보니 내전을 일으킨 주동자가 대현자와 꽤 가깝게 지냈던 모양이던데.”

“고작 몇 년 같이 지낸 인간을 대현자가 쉽게 도와줄까요?”

“밑져야 본전이지.”

베첼 공작은 자신이 젊은 시절 카만에 방문했던 때를 떠올렸다.

카만의 왕족들은 어린놈이고 늙은 놈이고 구분 없이 참 싸가지가 없었다. 상업이 발달한 왕국답게 화려하기는 했지만, 속 빈 강정 같은 동네였다.

외교 사절을 대동한 저녁 만찬 자리에서 술에 거나하게 취해, 세계정세에 대해 떠들던 카만의 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이후 왕위를 계승한 왕자가 선왕보다는 멀쩡한 인간이기는 했으나, 결국 도긴개긴이었다. 물을 완전히 갈아 주지 않으면 썩은 물은 순환해 봐야 썩은 물이기 때문이다.

‘대현자도 카만의 왕족은 감히 죽일 수 없지.’

술에 취해 비밀에 부쳐야 할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떠들던 카만의 왕은, 제국의 사절로 와 있던 젊은 베첼 공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린 마법 계약으로 그 대현자도 꼼짝 못 하게 묶어 버렸거든.’

????????????

“……고작 마도구 하나로 날 봉인하려고 한다고?”

한가롭게 비밀 통로로 나와 황궁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한네만이 내 뒤를 헐레벌떡 쫓아왔다. 땀에 젖은 꼴을 보니 추적 마법도 안 쓰고 나를 한참 찾아 헤맨 모양이었다.

뭐 엄청난 보고라도 있나 싶었는데 별 내용이 없었다. 앙헬이 뭔가를 개발하고 있고, 그게 봉인 목적의 마도구라는 걸 알아낸 건 사실 꽤 됐으니까.

“넌 고작 그런 거 말하려고 날 이렇게 힘들게 찾아다닌 거야?”

“고작 그런 거라뇨……. 그 마도구에 대현자님을 밀어 넣기만 하면 봉인당하신다니까요? 아무리 대현자님이 대단한 마법사여도 그렇게 봉인당하면 자력으로는 풀려날 수가 없어요.”

“나도 그건 알아. 내 말은, 나를 어떻게 밀어 넣을 거냐는 거다. 내가 순순히 그 관 멋있네요? 하고 내 발로 기어 들어가진 않을 거잖아.”

앙헬이 개발했다는 마도구는 사실 내게 별다른 위협을 주지 못했다.

죽이질 못하니 봉인하겠다는 사고의 흐름은 나름 괜찮았는데, 봉인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개발만 하면 내가 개발하느라 수고했다며 제 발로 들어가 줄 줄 알았나.

“그거 말인데요. 혹시…… 카만 쪽이랑 마법 계약 맺으신 적 있으세요?”

한네만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내 귀에 대고 마법 계약을 들먹였다.

카만 왕족이랑 맺은 계약? 당연히 있지.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네만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자기 이마를 쳤다.

“그 계약 내용을 왜인지 모르겠는데, 1황자가 알고 있어요.”

대단한 기밀은 아니지만, 카만 왕국도 아니고 로베인 제국의 1황자가 왕국이랑 내가 맺은 계약을 어떻게 아는지는 좀 궁금했다.

정보력 꽤 좋은데? 아마 라단타가 기를 쓰고 알아냈다기보다는…… 카만 쪽에서 알아서 입을 털었을 것 같았다. 그 자식들, 머리가 가벼워서 그런지 입도 싸더라고.

“그게 뭐?”

“어우, 답답해. 마법 계약을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모르시죠?”

“어겨 본 적이 있어야 알지. 그것도 계약마다 다르잖아.”

“그건 맞지만, 마법 계약이 합의 없이 파기되거나 위반했을 때 돌아오는 반동은 대부분 극단적이에요. 예를 들어 누굴 죽이지 않기로 약조한 계약이면 보통 위반 시에는 계약 당사자가 죽어 버린다고요.”

“난 안 죽어서 상관없을걸.”

“아니죠, 오히려 그러니까 더 상관있어요. 불멸자를 죽일 순 없으니까, 그 대신 그에 상응하는 제약이 걸릴 거라고요. 이를테면 마법 능력 완전 상실이라거나.”

“설마. 그 정도일까?”

“설마가 사람 잡아요. 마탑에서도 정신 못 차리고 마법 계약 위반했다가 개 박살 난 놈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고요.”

마법 계약 이거, 생각보다 아주 위험한 거였네?

나는 입맛을 다셨다. 시험 삼아 카만 왕족 한 번 죽여 보고 나중에 이르커스한테 페널티 이런 거더라, 하고 설명 좀 해 주려고 했는데 웬만하면 그냥 계약 내용을 지키는 게 이로워 보였다.

“넌 그런 거 참 잘 안다.”

“그야 용병이니까요. 마법 계약 하루 이틀 맺어 보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1황자 쪽은 사병을 동원해서 비밀리에 카만 왕족을 지원해 줄 셈이에요.”

“나중에 외교 자리에서 목 좀 빳빳하게 세우고 다닐 수 있겠네.”

“그것도 그거지만 에델라이드를 생포해서 대현자님이 카만 쪽에 개입하게끔 만들 생각이래요.”

에델라이드를…… 생포하는 데 내가 왜 개입을 하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네만을 바라봤다. 한네만은 이제 아예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그래도 5년간 동고동락했으니 구하러 가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인간도 아니고, 처음부터 에델라이드를 돕지 않겠다고 답장까지 보낸 상태였다. 이르커스를 여기에 두고 내가 카만에 갈 이유가 없었다.

“난 에델라이드가 죽든 말든 돕지 않을 거야.”

“……정말요?”

“그래, 사람은 누구나 죽어. 에델라이드는 자기가 벌인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그 대가로 죽을 수밖에 없어. 그런 문제에 내가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지.”

“그래도 알고 지낸 시간이 있는데…….”

“5년은 내게 찰나란다.”

마법 계약 위반 페널티가 내 예상보다 꽤 치명적이고, 라단타가 나를 위해 카만 왕국까지 동원해 가며 함정을 파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해 들었는데 굳이 내가 에델라이드를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부나방처럼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게 습관이라곤 하지만, 나는 손해가 더 큰 일을 굳이 찾아서 해내는 편이 아니었다.

괜히 나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한네만의 눈을 손으로 콕 찔러 버릴까 하다가, 고생해서 알아 온 게 퍽 기특해서 가지고 다니던 마도구 중에 적당히 값이 나가 보이는 걸 한네만에게 쥐여 줬다.

“너 그거 경매 내놓으면 죽는다.”

“…….”

“이놈이나 저놈이나 절대 안 내놓겠다는 말은 안 하네.”

갑자기 몇만 갤런 단위로 거래되는 마도구가 손바닥 위로 떨어지니 한네만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커졌다.

역시 이런 건 알맞게 제값을 바로 치러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도 열심히 감시자 역할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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