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현자는 죽고 싶어-47화 (47/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47화

멜킨 백작가에서 발 빠르게 보낸 청혼서가 황실에 도착했다. 이에 질세라 여러 가문 역시 뒤이어 청혼서를 보내왔다.

궁내에 떠돌던 추문은 이르커스에게 도착한 수많은 청혼서 덕에 빠르게 묻혔다. 에킨도르 멜킨이 다른 귀족들에게 ‘대현자는 어려 보이지만 400살이 넘었다’라는 걸 다시 한번 인지시킨 덕분이기도 했다.

약혼 이후는 몰라도 청혼서를 보낸 직후만큼은 이르커스를 남색가로 생각하는 이들이 없었다. 정확히는 있어도 티를 안 내는 거겠지.

이르커스에게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꼬리표처럼 붙어 버리면 혼처 하나가 날아가는 거나 다름없으니, 다들 언제 그렇게 촉새처럼 떠들었냐는 양 입을 다물었다. 참 가증스러운 일이었다.

“따로 만나 보지 않아도 정말 괜찮겠어?”

“연회장에서 춤까지 췄어. 날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데.”

“너를? 멜킨 소백작 눈은 마탑 꼭대기에 달렸나 보지. 너만큼 좋은 신랑감도 없을 텐데. 황자인 데다가 어리지, 잘생겼지, 거기다 마법도 검술도 천재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당신도 날 받아 주진 않잖아.”

“나랑 소백작은 다르잖아.”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온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소백작이 실제로 이르커스를 마음에 들어 하든 말든, 에킨도르 멜킨과 내 사이에서 대화와 협상이 마무리되었으니 약혼은 무사히 진행될 터였다.

다른 귀족들이 안 될 걸 알면서도 너나없이 이르커스에게 자기네 영애를 소개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탓에 에킨도르 멜킨은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이르커스와 에리스 멜킨의 약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예카리나는 어떤 사람이었어?”

이르커스는 약혼이 확정된 이후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내게 보이던 스스럼 없는 태도를 바로잡았다.

외부에서 보기에 흠 잡힐 일을 더는 안 하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궁내에 떠도는 추문을 덮기 위해서 빠르게 약혼을 해야 했던 게 마음에 안 들었을 테지. 덕분에 태도가 고쳐진 건 다행이었지만.

하지만, 이렇게 단둘이 남아 청혼서를 뒤적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예전처럼 편안하게 말을 걸어왔다. 공적인 자리에선 함부로 시선조차 주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사적인 자리로 돌아오면 아무렇지 않게 내게 서운한 티를 내거나 사사로운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예카리나는 왜?”

“그냥…… 선조에 대한 궁금증.”

“금방 사랑에 빠지는 마녀였지.”

“그게 다야?”

“좋은 사람이었어. 예카리나가 아니었으면 나는 일찍이 죽었을 거야. 뭐…… 예카리나 때문에 영생을 살게 된 건 조금 원망하지만.”

기억은 휘발성이다. 세월이 흘러도 또렷한 기억은 많지 않다. 사람의 뇌는 한정된 용량만 수용하고, 오래 산다는 건 그 용량을 넘어서는 기억을 수납하기 위해 이전 기억을 삭제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예카리나와의 수많은 추억이나 대화도 그 과정에서 많이 소실되었다. 그래도 아직 예카리나가 환히 웃던 얼굴이나 죽기 직전에 날 바라보며 웃었던 건 기억한다. 잊어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인물이었으므로.

“당신이 예카리나에게 거둬지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궁금해.”

“별걸 다 궁금해한다.”

“본인 얘기를 잘 안 해 주잖아.”

그야, 못하니까 안 하지.

이르커스가 아무리 날 좋아하고 따른다고 해도, 내가 다른 세계에서 수능 전날 트럭에 치여 이 세계에 떨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말한다고 한들 믿지 않을 게 뻔했고.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다. 뭐라고 그래? 넌 사실 <이르커스의 서>라는 17권짜리 고전 정통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란다……. 내가 들어도 미친 소리였다.

“기억이 안 나. 너무 오래전이잖니.”

“…….”

“시간이 지나면 뭐든 금방 잊어버리게 되거든. 400살에도 이 지경인데, 천 살쯤 되면 더 심하겠지.”

그때까지 살면 그냥 미쳐 버릴 게 틀림없다. 그냥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 나라를 세워서 예카리나의 후손 중 아무나 하나 뽑아 왕으로 앉힌 뒤, 날 죽여 달라고 싹싹 빌고 있을 거다.

“가끔 기억나는 일들이 생기면……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말해 줘.”

고급 종이에 유려한 필체로 적힌 청혼서들이 이르커스의 손에서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이미 상대는 내정돼 있으므로 모두 의미 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당신의 지난 시간을 난 평생 알 수 없다는 게 불공평한 것 같아서.”

“나도 열두 살 전의 너는 모르는걸.”

“그 이후의 나는 전부 알잖아.”

죽기 직전에는 진실을 좀 말해 줄까? 사실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란다, 하고 농담처럼 말하곤 죽어 버리는 거지.

그럼 이르커스는 내 말이 진짜인지 농담인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늙어 죽을 것이다. 이르커스가 내 과거를 모르듯이 나도 이르커스의 미래를 알 수 없겠지. 그럼 조금은 공평해질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이 나면, 전부 얘기해 줄게.”

내 죽음도, 늙어 가는 이르커스도 아직은 너무 먼 미래였다.

????????????

이르커스와 멜킨 소백작, 에리스 멜킨의 약혼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준비 기간이 워낙 짧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새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카만 왕국에서 정말로 내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도착했고, 한네만을 통해 앙헬이 드디어 자기 방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한가롭게 이르커스의 예물이나 살펴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델라이드가 일으킨 반란은 에델라이드가 편지로 고지한 일정보다 무려 한 달이나 일찍 시작되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계획이 뭔가 틀어진 모양이었다.

또, 앙헬이 개발하고 있던 관 형태의 마도구는 정확히 어떤 용도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한네만과 에킨도르가 모아 온 정보를 추측해 보면 일종의 봉인용 마도구인 모양인데,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려는 건지 감이 잘 안 잡혔다. 관 파 놓고 누가 빠져 주길 기다리려는 건가? 아무튼 여기나 저기나 난리였다.

“나랑 춤을 추겠다고?”

“응.”

“미쳤어? 빨리 피로연으로 돌아가라.”

“응. 나 미쳤어. 보는 눈 없어. 근처에 결계도 쳤거든.”

“얘가 정말…… 황궁 안에서 마법 팍팍 쓰지 말랬지. 여기, 마법사가 몇 명인데…….”

“잔소리 그만하고. 전에 약속 안 지켰잖아. 나랑 한 번은 춤춰 주겠다는 약속.”

미친……. 그걸 지금까지 기억한다고?

아무리 간소하게 치러진 약혼이라고 해도 피로연만큼은 성대하게 열렸다. 일단은 제국 3황자와 소백작의 결합이니까.

멜킨 백작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입장하는 에리스는 정말 하늘에서 내린 천사 같았다. 이르커스의 손을 잡을 때 살짝 떨떠름해 보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두 사람은 어디에 내놔도 입이 떡 벌어지는 선남선녀였다. 형식적인 약혼일지라도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 꼴을 가까이서 보고 싶지 않기도 하거니와, 신성한 약혼식장에 세상 사람들이 불길하게 여기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달고 한 자리 차지하기가 좀 뭐해서 황궁 정원에 나와 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르커스가 피로연 중간에 나를 따라 정원으로 나와 버렸으니까.

심지어 그냥 나오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정확히 찾아내서 주변에 결계까지 쳐 놓고 쫓아온 거였다. 마법 실력이 일취월장했노라고 칭찬을 해 줘야 할지, 아니면 사사로운 일에 마법 낭비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넌 정말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나한텐 전혀 사소하지 않은데.”

나는 한숨을 쉬며 이르커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러 문제로 복잡했던 머리가 이르커스를 앞에 두고 있으니 강제로 맑아졌다.

깊은 생각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르커스가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새 또 자란 건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손도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피로연을 위해 갈아입은 상아색 정장이 이르커스의 빛나는 금발과 정말 잘 어울렸다. 지금 차림새에 흠이 딱 하나 있다면 내가 준 반지 형태의 마도구를 아직도 손에 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약혼반지를 껴야지, 왜 그걸 끼고 있어.”

“당신이 준 거니까.”

비싼 돈 들여서 맞춘 약혼반지는 손에 끼지도 않고, 중앙에 흑요석 하나 덩그러니 박힌 걸 제외하면 별다른 디자인도 없는 밋밋한 반지만 끼고 있는 꼴이 어이없었다. 약혼자를 버리고, 정원으로 나와 자기 스승이랑 밀회를 즐기고 있는 꼴이라니.

“이르.”

“응.”

“나 너무 좋아하지 마.”

“그런 말을 무슨 황궁 정원에서 해.”

“그럼 어디서 할까. 네 방?”

“그냥 하지 마. 당신은 그 입을 좀 다물어야 해.”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음이 샜다.

이르커스의 다른 팔이 능숙하게 내 허리를 감아 안았다. 춤을 추기 위한 접촉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긴장해서, 등허리가 꼿꼿하게 세워졌다. 이런 식으로 거북목을 치료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는 이르커스가 눈치채지 못하게 호흡을 천천히 골라 가며 멀리서 들려오는 피로연 음악 소리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안.”

“왜.”

“당신, 나를 좋아하지?”

너무 놀라서 바로 이르커스의 발을 퍽 밟고 말았다. 아플 법도 한데 이르커스는 내 당황하는 얼굴을 보고 웃기만 할 뿐이었다.

“미쳤다더니, 정말 돌아 버렸구나.”

“아니야?”

“…….”

“아니면 말고.”

순진하지만 선하고, 나이에 비해 의젓했던 열두 살의 이르커스가 좀 그리워졌다.

5년밖에 안 지났는데 인간이 어떻게 이런 능구렁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애 인간성을 좀 버리긴 했지만, 이런 태도를 가르친 적은 없으므로 이건 필시 다른 스승인 트리스탄의 잘못이 분명했다.

가만히 있다가 욕을 처먹어서 귀가 간지러울 트리스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당장 이르커스의 질문에 부정도 긍정도 하기가 어려워, 그냥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당연하지만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한다. 나는 예카리나도 좋아했고, 그래도 나랑 연배가 조금 비슷했던 블랙 드래곤도 좋아했다. 길버트도 좋아하고, 조금 짜증 나기는 하지만 데인도 좋다.

하지만 이르커스를 향한 ‘좋다’는 그 무게가 조금 달랐다.

그건 아마 이르커스가 다른 존재들과 달리, 처음부터 나를 향해 노골적인 애정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인물이 이르커스뿐이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고.

“대답 안 해 주네.”

“황당하니까 그렇지.”

“언젠가 한 번쯤은 대답해 줘.”

“죽기 전에 대답해 주마.”

“그건 싫어.”

희미하게 들리던 춤곡이 끝났다.

나는 이제 떨어지라며 이르커스를 밀어냈다. 하지만 훌쩍 자라 버린 제자는 내 저항에도 꿈쩍 않고, 나를 안은 채 조금 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