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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46화 (46/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46화

“약혼을 서두르자는 말씀입니까?”

에킨도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쪽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기분일 테지.

나는 씁쓸한 입맛을 뒤로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뤄 봤자 좋을 것도 없잖니.”

“황실 쪽으로 청혼서를 보내 두도록 하겠습니다.”

“질질 끌지 않고 결정이 나니 좋구나.”

에킨도르 멜킨의 장점은 이거였다. 박쥐 새끼 주제에 어디에 어떻게 붙어야 할지 기가 막히게 파악하는 것.

여동생에게 소백작 자리를 빼앗겼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이놈이 후계자가 됐어도 멜킨 백작가는 잘 굴러갔을 것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는데…….”

“어떤 것?”

“1황자 쪽에서 그…… 3황자님이 대현자님을 연모한다는 이야기를 꼭 사실처럼 떠들어 대는 중입니다.”

그거 사실인데?

거짓말은 아니다. 남들 귀에 들어가서 좋을 내용이 아닐 뿐, 이르커스가 날 연모하는 건 아무튼 진짜였다.

하지만, 여기서 에킨도르에게 그거 진짜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는 그 말을 믿니?”

“……역시 아니지요?”

“웃기는 소리지. 너라면 너보다 한 400살 많은 인간을 연모할 수 있겠어?”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연상이군요.”

에킨도르가 내 하찮은 변명에 넘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넘긴 건 좋은데 어쩐지 기분이 살짝 더러웠다. 뭐야, 수긍이 왜 이렇게 빨라.

“아무튼 라단타, 그놈이 이르커스의 명예에 흠집을 내기 전에 빨리 약혼자를 만들어 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청혼서가 오면 이쪽도 바로 준비를 진행하지.”

“알겠습니다.”

“네 입장이 좀 곤란하게 됐구나. 이중 첩자 노릇을 계속하려면 라단타 쪽에 변명을 잘해 둬야겠어.”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베첼 공작에게 이미 수를 써 뒀으니까요.”

“그래.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베첼 공작에게 수를 써 뒀다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에킨도르를 보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베첼 공작에는 아마 멜킨 소백작을 이르커스의 약혼녀로 붙여 염탐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떠들었을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권력이 기울어도 발을 뺄 방편은 다 마련해 두었겠지.

“아, 그리고 마탑주 말입니다.”

“앙헬?”

“예. 연회 이후로 방에 틀어박혀서 마도구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더군요.”

이건 한네만에게서도 들은 정보다.

한네만은 무서워 죽겠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내가 시키는 대로 앙헬의 뒤꽁무니를 착실하게 쫓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방 안으로 들어가거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는 걸 해낼 만큼의 배짱은 없었지만 마탑에서 도망쳤을 만큼 재주 있는 마법사답게 이제껏 안 걸리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개발 중인 마도구가 뭔지는 알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베첼 공작의 말을 들어 보면 생긴 게 꼭 관 형태라고 하던데요. 용도가 뭔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1황자님은 알고 계시겠지만…….”

“관?”

“예. 사람 파묻을 때 쓰는 관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들어갈 관을 짜는 건 아닐 거고. 나나 이르커스를 파묻을 요량으로 개발 중인 게 틀림없으니 조금 더 유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그 마도구에 대해서 좀 알아봐 줄 수 있겠어?”

“마탑주님 방에는 도통 접근하기가 어려워서 제가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약혼식 비용은 이쪽에서 전부 부담하지.”

“…….”

“이르커스가 황제가 되면 소백작 자리는 경에게 돌아갈 수도 있잖아?”

사람이라는 건 참 간사하다. 위험하다는 걸 머리로 알면서도 눈앞의 이득에 목을 매고 만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리석은 자도 아니고, 머리가 너무 잘 돌아가는 탓에 손익 계산을 퍽 잘하는 에킨도르 역시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자였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한네만이랑 에킨도르를 들들 볶으면 둘 중 하나는 정답을 가지고 돌아오겠지. 역시, 사람은 깨처럼 좀 볶아 줘야 한다.

????????????

에델라이드로부터 편지가 왔다.

테리즈나 에델라이드처럼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안부를 묻는 편지를 잘 보내지 않는다. 섬세한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경험상 대개 그랬다.

편지가 온 것까지는 대충 이해해 보려고 해도 그 내용이 너무 이상했다. 에델라이드가 나와 이르커스의 안부를 살뜰하게 묻고 있었으니까. 혹시 미친 걸까?

나는 몇 번이나 에델라이드의 필체를 살펴보았다. 누가 에델라이드를 사칭하여 적은 편지인 게 틀림없었다.

“암호인가?”

“뭐 안부 좀 물을 수 있지, 유난은.”

“에델이? 트리스탄,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에델은 나나 이르를 걱정해 주지 않아.”

에델라이드가 걱정하는 건 자기 조모인 테리즈뿐이다.

여전히 정정한 편이지만, 나이를 꽤 먹은 테리즈는 필멸자이니만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애초에 에델라이드가 나를 따라 로베인 제국으로 오지 않은 이유도 테리즈 때문이었는데.

“암호네.”

내 옆에서 에델라이드의 편지를 슬쩍 살펴본 이르커스가 내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역시 암호구나. 에델라이드가 살가운 투로 황궁 생활은 즐겁게 보내고 있냐고 묻는 건 비밀 암호가 아닌 이상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이게 암호라는 확신이 들고 나자 풀이는 생각보다 쉬웠다. 평범한 안부 편지처럼 보이기 위해 기를 쓴 건 이르커스에게 오는 우편물이 대개 황궁 검수를 거치고 나서야 전달되기 때문일 터였다.

“오……. 에델이 미쳤나 봐.”

“뭐라는데?”

“반란을 일으키겠대.”

“미쳤네.”

이런 점까지 테리즈랑 닮을 필요가 있나?

나는 다시 한번 테리즈가 혹시 출아법으로 에델라이드를 낳은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할머니랑 손녀가 이렇게 판에 찍어 낸 것처럼 똑같을 수가 있어.

“시일까지 정해 놨는데.”

“행동력 하나는 자기 할머니보다 대단하네.”

편두통이 몰려왔다. 로베인 제국의 계승 싸움은 제대로 된 시작조차 안 했는데, 가만히 있던 카만 왕국은 왜 또 뒤집어지기 일보 직전이란 말인가. 역시, 그냥 인류가 멸망하게 뒀어야 했다.

편지 말미에는 ‘언제나 유안과 이르커스의 건강을 기원하며’라는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형식적인 내용이었지만, 이것도 해독해 보자면 이런 뜻이었다. ‘대현자의 도움 필요’.

인간들은 왜 전쟁이나 혁명만 일으키려고 하면 나를 찾을까? 테리즈나 에델라이드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굳이 내게 득이 될 것 하나 없는 카만 왕국 내전에 숟가락을 얹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르커스의 황위 승계 하나를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바쁘단 말이다.

“도와줄 거야?”

“아니?”

“지금까지 대현자를 지켜본 결과, 대현자는 아마 도와줄 것 같은데.”

“닥쳐, 트리스탄.”

“당신이 원한다면 도우러 가도 상관없어. 혼자 가지만 않으면…….”

나는 전혀 에델라이드의 반란을 도와줄 생각이 없는데, 트리스탄과 이르커스는 내가 당연히 에델라이드를 도와주리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정에 휘둘려서 쉽게 쉽게 도와주는 인간이었으면 테리즈 때 진작 반란을 도왔겠지.

“카만 문제에 관여할 생각 없어. 테리즈와 에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미 난 캐러벨을 떠난 사람이고.”

마법 계약 때문에 왕족 목을 대신 쳐 줄 수도 없는 대현자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왕궁 쪽으로 공격 마법 퍼붓는 것도 제약이 걸려서 불가능할 텐데.

나는 에델라이드에게 답장을 적기 위해 깃펜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실패할 반란이었다. 에델라이드의 움직임은 너무 성급했고, 왕국 수도인 캐러벨에서부터 내전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나이트 펠로우 역시 크게 피해를 입을 터였다. 손해만 볼 게 뻔한 싸움이니, 에델라이드도 그 자존심에 나한테 도와달라고 SOS를 친 것일 테지.

하지만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면 시작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왕족들이 아무리 깝쳐도 그냥 ‘저 새끼들 내가 언제 꼭 죽여 버린다’라고 생각하며 모르는 척 살았더라면 에델라이드는 테리즈처럼 세를 불려 가며 호의호식하고 잘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건 테리즈와 에델라이드가 놀랍도록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테다.

테리즈가 하지 못했던 결단을 에델라이드는 해냈다. 대단히 여길 만한 실행력이었지만, 조금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히 테리즈도 말렸을 텐데.

“이르를 아직 황제로 만들지도 못했으니 다른 일에 관여할 여력은 없어. 트리스탄, 너는 자국의 일이니 돌아가서 에델라이드를 도울 생각이 있다면 다녀와도 되고.”

“일없소. 내전에 끼면 남은 눈 하나도 잃어 먹을걸. 모르는 척해야지.”

“비겁한 인간 같으니.”

“현명한 거라고 하쇼.”

트리스탄도 에델라이드를 도우러 가지 않는다면 에델라이드가 카만 왕국에서 반란을 일으키든 말든 우리 쪽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에델라이드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는 편지를 암호로 변환해서 쓰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르커스가 어쩐지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탓에 그게 좀 힘들었지.

이르커스와 흥분제 일이 있고 난 뒤로 나는 웬만하면 이르커스를 피해 다녔다. 남쪽 숲의 아틀리에나 캐러벨에서 둘만 지내던 거처와는 달리, 황궁은 정말 넓어 마음만 먹으면 이르커스를 피해 다니기란 어렵지 않았다.

특히나 황궁 비밀 통로를 거의 다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이만큼 도망쳐 다니기 좋은 동네가 또 없었다.

에델라이드에게 편지가 왔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오늘도 유령처럼 황궁을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방으로 돌아가면 이르커스랑 마주칠 확률이 높으니까.

키스당했을 때도 피해 다녀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는데, 그…… 흥분제 사건이 있고 난 뒤로는 결심 정도가 아니라 신념이 돼서 이르커스랑 마주치지 않도록 용을 썼다. 트리스탄이 혀를 차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냐고 나를 타박할 정도였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트리스탄 일행과 함께 있어서 단둘이 남은 게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안.”

“…….”

“우리,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트리스탄이 ‘분위기 왜 이래요?’라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로버트의 목덜미를 잡아채 방에서 도망쳤다. 저 비겁자. 에델라이드를 안 도와준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나는 등을 타고 생전 안 흐르던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을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당황해서 말리면 망하는 거다.

상대는 아직 어린 내 제자다. 내가 업어 키웠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래 봐야 이세계 트립당한 내 쪽이 더 우위에 있다, 이 말이다.

“이르.”

“응.”

“너, 약혼할 거야.”

“…….”

“멜킨 소백작이랑.”

차가운 시선이 내게 와 닿았다. 마치 ‘그 말 말고는 더 할 말 없어?’라고 묻는 것 같은 면면이었다.

이상할 정도의 위압감 때문에 나도 모르게 좀 쫄았다. 대현자 체면이 있으니 내색은 안 했지만, 이르커스의 무표정한 얼굴은 묘하게 싸늘한 구석이 있었다. 날 볼 때면 의식적으로 다감한 낯을 하고 있었다는 게 티가 났다.

“당신은…… 정말 잔인하구나.”

한참의 침묵 뒤에 이르커스가 말한 건 그게 다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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