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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45화 (45/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45화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대개 성적인 뉘앙스를 함께 품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르커스가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언젠가는 이런 위기에 처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그 시기가 비록 지금은 아니었지만.

    “이르, 정신 좀 차려 봐.”

    “난 제정신이야.”

    “웃기지 마.”

    제정신은 무슨.

    앙헬은 과연 마법 능력 말고 이상한 거 개발하다 마탑주 자리를 먹은 놈답게 아주 기가 막힌 흥분제를 개발해 낸 모양이었다. 같은 마법사로서는 대단하다는 소리가 나올 일이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는 쌍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게 몸을 바짝 붙이고 열 오른 몸을 맞대 오는 이르커스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게 최악이었다. 심지어 나도 따라 미약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이 위기를 겪지 않으려면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죽을 시기를 놓쳐서 이런 비극을 체험하고 있다.

    “나…… 못 참겠어.”

    “알겠어, 알겠으니까. 도와줄 테니까, 진정하고 놔 봐.”

    “싫어……. 놓으면 갈 거잖아.”

    트리스탄이 날 버려두고 방 밖으로 도주한 탓에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나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 400년의 세월아! 내게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해 줘!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결국 모두 같았다. 그냥…… 손으로 한 번 빼 주자.

    손으로 하는 것 정도는 성교육의 일환이라며 스스로 납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죽어도 안 된다. 못 죽지만 아무튼 안 된다.

    놔달라는 내 말을 듣고도 이르커스는 찰거머리처럼 열 오른 몸을 내게 찰싹 붙이고 있었다.

    땀에 젖은 금발을 손으로 쓸어 넘겨 주자, 익숙하게 손바닥에 고개를 기대는 꼴이 퍽 가여웠다.

    내가 남쪽 숲에서 살짝 방임하며 키웠을 때도 한번 아팠던 적이 없는 녀석인데, 내성이 없는 흥분제에 잘못 걸려 호되게 앓는 모양이었다.

    라단타가 줄기차게 보내고 있을 암살자는 트리스탄이 알아서 처리해 줄 거라고 굳게 믿고 방 안에 결계를 쳤다.

    지금부터 할 일을 누가 듣거나 보게 되면 정말 죽음밖에는 답이 없었다. 근데, 나는 못 죽잖아. 그러니까 그냥 답이 없었다. 들키면 끝장이었다.

    “내가 어쩌다 널 잘못 거둬서…….”

    그냥 인류 멸망을 지켜보거나 천 년 정도 불로불사로 살아서 대대대현자 같은 게 됐어야 됐는데. 죽겠다는 욕심이 너무 커졌던 탓에 이르커스의 인생을 망치고 말았다.

    이르커스의 17권짜리 인생 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1권만 본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분명 이런 상황에 어울려 주는 상대가 400살 넘은 대현자는 아니었을 테다.

    정신없이 달라붙어 오는 이르커스의 이마를 손으로 꾸욱 눌러 밀어내고, 상체만 반쯤 일으켜 침대 헤드 쪽으로 더듬더듬 물러섰다. 나보다 키도 손도 커져 버린 제자를 제압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나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이르커스는 ‘기다려’를 학습한 개처럼 아주 좁은 틈을 사이에 두고 내 팔만 붙잡은 채로 물러났다.

    덕분에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간신히 자세를 고쳐 앉을 수 있었다.

    “네가 이 일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그냥 순전히 의료 행위야. 알겠니?”

    “…….”

    “왜 또 대답이 없어.”

    “……키스해도 돼?”

    “안 돼.”

    휘말리면 진짜 큰일 나는 거다. 나는 속으로 대한민국에 두고 온 다른 신들을 찾았다.

    헤누스나 엘리오스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원래 안 믿지만, 오늘 잠깐 믿어 드릴 테니 저한테 이 상황을 이겨 낼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

    ????????????

    치아 건강을 신경 안 써도 되니 절로 이가 갈렸다. 마탑, 박살 내야지. 기필코 마탑을 박살 내고 라단타 놈의 머리에도 불을 지를 것이다.

    “그…… 어제, 했소?”

    “하긴 뭘 해, 미친놈아.”

    트리스탄이 밤사이 퀭해진 나와 숨을 색색 고르며 잘 자고 있는 이르커스를 의심스럽게 번갈아 봤다.

    내가 짐승 새끼를 사람 새끼인 줄 알고 잘못 거둬서 여러 의미로 위험해질 뻔했던 건 사실이지만, 트리스탄이 의심하는 일은 다행스럽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러 번 내가 역으로 제압당해서 크나큰 위기를 겪었던 건 사실이다. 이 자식, 왜 이렇게 힘이 좋아? 열두 살 때는 내가 막 안고 다녔는데 이제는 내가 업혀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르커스가 날 조심스럽게 대하는 경향이 있고, 아직은 마법 쪽에서 내가 훨씬 우위를 차지한 입장이기에 계획했던 대로…… 뭐, 대충 손으로 해결을 볼 수는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르커스가 얼굴을 자꾸 들이미는 탓에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놨던 키스도 억지로 한 번은 하게 됐지만, 그건 그냥 의료 행위니까 노 카운트로 쳤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그냥 이르커스의 어젯밤 기억이 휘발돼 사라져 버리는 것뿐이었다.

    “밤손님은 몇 명이나 찾아왔니?”

    “총 네 명. 다 숙련된 암살자들이긴 했소만, 크게 대단한 자는 없었소. 하나같이 다 자결해 버리는 건 좀 끔찍하더군.”

    “훈련 한번 더럽게 잘됐네. 뭘 믿고 그렇게 충성하는 거람.”

    저런 놈들만 쓰니, 형제 둘 목을 쓱싹 쳐 버리는 건 어렵지 않았겠지.

    시체는 잘 치워 놨다는 트리스탄에게 고생했다는 의미에서 가진 마도구 중에 아무거나 하나 꺼내 건넸다.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것 같았는데 도움이 될 때가 있긴 하구나.

    “뭘 이런 걸, 다.”

    “경매에 넘기지 마. 네가 써라.”

    “…….”

    “어쭈, 대답 안 하지.”

    트리스탄은 걸쩍지근한 얼굴로 내가 내민 마도구를 받아 들더니 마지막으로 정말 안 했냐고 처맞을 질문을 한 번 더 내뱉었다.

    나는 결국 트리스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안 했어! 안 했다고!

    고비는 넘겼지만, 여러모로 상황이 나빠진 건 사실이다. 자꾸만 속에서 나의 비인간적 본능이 그냥 다 죽이고 황좌 뺏는 전개로 가자고 간악하게 속삭여 댔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으나,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앙헬 말대로 나도 참 인간다워졌다. 인간 때문에 인간성을 상실하고, 인간 때문에 도로 인간성을 되찾는다는 게 참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전 같으면 몇 명 죽는 것쯤은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지금은 괜히 마음을 쓰게 됐다. 이르커스가 혹시나 또 나한테서 잘못된 걸 배울까 봐.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는 얘기가 왜 나오는지 이해가 갔다.

    “소문을 피할 수는 없을 거야. 마법을 그렇게 써 댔으니, 굳이 마탑 쪽 인사가 아니어도 내가 이 방에서 밤을 보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꽤 될 거다.”

    “미소년 좋아한다는 추문에 살이 제대로 붙겠구만.”

    “나를 향한 미친 소리는 괜찮지만, 나랑 이르커스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실컷 떠들고 다니겠지.”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않소?”

    “죽을래? 우린 아주 건전한 사제 관계라고.”

    “웃기는 소리 마쇼. 어떤 제자가 스승을 그런 눈으로 봐?”

    “나도 모르는 척하느라 힘드니까, 1절만 해.”

    눈치라곤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트리스탄까지 이렇게 잘 알아채고 나를 놀려 먹으려고 드는 걸 보니 다 틀렸다.

    남색가에 스승을 연모한다는 소리가 돌기 전에 이르커스에게 빨리 약혼자를 붙여 주는 게 이로웠다. 멜킨 소백작이든 그 외 다른 귀족 영애든, 하루빨리 계승 싸움에 도움이 될 만한 조력자를 구해 이르커스 옆에 앉혀야지, 원.

    “에킨도르 멜킨이랑 다시 만나 봐야겠어. 약혼 얘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야겠네.”

    “…….”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사람을 쓰레기 쳐다보듯이…….”

    “아니, 그냥 대현자 당신도 참 독하다 싶어서.”

    트리스탄이 나를 기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하나 남은 트리스탄의 눈을 손으로 찔러 버렸다.

    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나를 향해 빌어먹을 대현자라며 구수한 욕설을 쏟아 내는 트리스탄을 뒤로하고, 이르커스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베개에 오른쪽 뺨을 파묻고 잠든 이르커스는 이 순간만큼은 꼭 천사 같았다. 선이 굵어졌어도 여전히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정말 끝내주는 미남으로 자라겠지. 하렘을 차렸어도 두세 번은 더 차릴 만한 판타지 소설 주인공의 앞날에 내가 개입한 탓에 요상한 꼬리표가 붙을까 봐 자꾸 신경이 쓰였다.

    “트리스탄.”

    “왜 부르쇼.”

    “내가 없어지면 네가 이르커스를 잘 돌봐 줘야 해.”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많은 것을 대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내가 죽더라도 이르커스에게 한번 낙인이 찍히면 그걸 지워 내긴 어려울 테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 그쪽은 이르에게 약혼자가 생겨도 아무렇지 않소?”

    “아무렇지 않을 리가.”

    “…….”

    “하지만, 아무렇지 않아야 하지. 나라도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 하니까.”

    트리스탄의 시선이 잠시 잠들어 있는 이르커스에게 가 닿았다 떨어졌다.

    나는 혹시 이르커스가 일어났나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이르커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냥…… 빨리 죽고 싶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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