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44화
내 부모님은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외동아들인 내가 좋은 성적을 받아 오는 건 기뻐했지만, 그렇다고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며 압박을 준 적은 없었다. 뭐, 내가 공부하라고 잔소리하기 전에 이미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놈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다른 부모님들은 애들 책가방을 들고 학교까지 쫓아온다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에도 나는 알아서 척척 스스로 어린이답게 혼자서 등교했다. 학원도 내가 다니고 싶다고 말을 꺼내서 다니기 시작했고, 엄마 아빠도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이 없었다.
내가 9월 모의고사 만점을 받아 왔을 때도 엄마는 이번 주말은 외식하자며 기뻐하는 한편으로 자주 밤새워 공부하는 내 건강을 걱정했다. 종종 별것도 아닌 문제로 말싸움을 하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단란한 가정이었다.
언젠가 나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생기게 된다면 우리 부모님처럼 아이를 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자기가 자란 가정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 애가 공부를 못하면 좀 당황스럽기는 하겠지만, 크게 간섭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 엄마도 내 성적에 왈가왈부 안 했는데, 내가 그럴 리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럴 리가 있었다.
나는 내 부모님보다 훨씬 서투르고 덜떨어진 양육자였다. 내가 만약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얻었다면,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엎어지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며 애를 업고 응급실로 뛰어갈 극성 학부모가 됐을 게 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연회장에 난입하지 않았을 테니까.
새삼스럽게 이 세상의 모든 부모와 부모 노릇을 하는 사람이 존경스러워졌다. 다들 어떻게 피보호자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냐.
“유안…….”
“타이밍 조졌네.”
라단타의 허접스러운 도발에 넘어가 이르커스의 신변을 확인하겠답시고 연회장 안쪽을 마도구로 살펴보자마자 이르커스 앞에 선 앙헬을 본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르커스가 무기 없이도 가뿐하게 제압할 수 있는 라단타와 다르게, 앙헬은 여러모로 까다로운 상대였다.
순수한 마법 능력으로 보자면 이르커스가 훨씬 위지만, 앙헬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 뱀 같은 놈이니까. 아니지, 이런 말을 하면 뱀한테 미안해진다. 그냥 사이비 사기꾼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내 등장과 함께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사람들은 전부 황제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평소라면 이게 무슨 소란이냐고 호통이라도 쳤어야 할 황제가 잠잠했다.
솔직히 황제도 나한테 더 이상 시비 걸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괜히 뭐라고 했다가 몇 배로 시달리게 될지 모르는데 조용히 있고 싶겠지. 그 자존심에 사람들 앞에서 가오 잡는다고 나를 타박하지 않다니, 역시 사람은 좀 시달리면서 학습해야 뭘 깨닫는다.
앙헬이 무슨 개수작을 부렸나 싶어 이르커스의 어깨를 쥐고 찬찬히 확인해 봤지만, 마법이나 독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온 건지, 아니면 애초부터 이 자리에서 사고를 칠 생각은 없었던 건지 앙헬이 이르커스에게 건넨 와인에도 약물이 들어간 흔적이 없었다.
“제자를 너무 과보호하시는 것 아닙니까?”
앙헬이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재수 없게 내게 과보호를 운운했다.
이 새끼는 내가 세상으로부터 이르커스를 지켜 주는 게 아니라 이르커스로부터 세상을 지켜 주고 있다는 걸 알 만한 놈이면서 이렇게 꼭 빈정거렸다. 나이를 먹더니 능글거리는 기술만 늘어 아주 매를 벌었다.
“네가 워낙 수상한 놈이어야지.”
“마탑주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습니다만.”
“나도 대현자라는 명확한 신분은 있다.”
우글우글 모여드는 구경꾼들이 신경 쓰였다.
안 그래도 궁내에 나와 이르커스의 사이를 추측하는 추문이 쫙 퍼졌는데, 거기에 기름을 들이부은 꼴이었다.
평범한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게 맞지만, 나와 이르커스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말하는 입이 많아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3황자 뒤에는 내가 있다는 걸 마탑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차피 온갖 추문에 휩싸일 거라면 연회에 참석한 모든 귀족에게 공식적으로 ‘3황자 건드리면 대현자한테 죽는다?’라고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좀 노골적으로 들리긴 할 테지만, 이만큼 확실한 경고도 없을 테니까.
“네가 무슨 개수작을 부려도 나는 죽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유서 깊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탑을 무너트리는 건 퍽 까다로운 일이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유능한 마법사들이 떼로 덤벼도 날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들은 예카리나의 후손도, 황제가 될 재목도 아니었다.
앙헬도 마음만 먹으면 내가 마탑 하나 대륙에서 지워 버리는 것쯤이야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누워서 떡 먹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앙헬은 내 경고에도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기만 했다.
“대현자님, 제법 인간다워지셨군요.”
정말 사람 기분 잡치게 만드는 데엔 도가 튼 놈이다.
????????????
아처볼드 때부터 생각했지만, 이 판타지 세계는 약물을 너무 오남용한다.
트리스탄이 새벽 두 시가 가까워져 가는 야심한 시각에 겁도 없이 내 방문을 두드렸을 때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것 정도는 짐작했다. 이르커스도 아니고 트리스탄이 찾아왔다는 건 정말 큰 문제가 생겼다는 징조나 다름없었다.
“애 상태가 좀 이상한데.”
“어떻게 이상해? 독이야?”
“…….”
“왜 대답이 없어?”
“직접 보는 게 낫겠소만. 말로 설명하기 좀 그래서.”
이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냥 큰일도 아니고 많이 큰일이 났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독에 중독되거나 암살자가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건 이르커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르커스가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니 트리스탄이 이를 어쩌나 싶어 나를 찾아온 것일 터였다.
이르커스가 혼자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뭐인지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편두통이 왔다. 내가 준 반지 형태의 마도구가 인식하지 못하고, 트리스탄이 자기 입으로 말하기 꺼리는 상황이라면 대충 어떤 약을 썼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쩐지 앙헬 새끼가 과보호니 뭐니 입을 야무지게 털더라.
라단타 입장에서도 궁내에 퍼진 추문을 조금 더 구체화해서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나쁜 전략은 아니다. 아무리 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이어도 뒤에 따라붙는 꼬리표가 별로면 사람들은 그거 하나 가지고 물고 뜯고 즐기며 수군거리기 마련이니까. 육탄전으로 안 되니까 명예에 흠집이라도 크게 내려는 거겠지.
앙헬이 이르커스에게 건넨 와인에 분명히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는데, 무슨 수를 쓴 건지 이르커스는 잔뜩 열이 오른 상태였다.
“이건 치료 마법으로 해결할 수 없소?”
“그냥 평범한 독이나 미약이면 애초에 내가 준 마도구가 튕겨 냈을걸.”
“그냥 독이 아니면 뭔데?”
“마법으로 합성한 흥분제지, 뭐긴 뭐야. 눈치 없는 놈아.”
차라리 맹독이 낫다. 독은 감지도 쉽고, 치료 마법으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으니까.
시차를 두고 소량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은 이 판타지 세계에 널리고 널렸다. 잡초나 다름없는 라크리움도 고문용 약물이 되는 이 세계에서 맹독은 그렇게 구하기 어려운 소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르커스가 복용한 건 독이 아니라 흥분제였다. 치료 마법을 써 봤지만 아픈 게 아니라 발정이 난 거니 내 마나만 소모되고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열이 살짝 내려가는 듯싶다가도 해결되지 못한 흥분 때문에 도로 달뜨는 게 보였다.
“추잡한 방식을 쓰네. 나도 이런 흥분제는 처음 본다. 마탑주가 직접 제조했을 거야.”
“어쩔 거요. 의원을 부를까?”
“아니, 어차피 황궁 주치의도 다 라단타랑 한통속일 텐데. 이상한 소문 낼 거 아니면 우리 선에서 해결하는 게 맞지.”
한네만이 올린 앙헬의 일거수일투족 보고에는 약물 제작이나 마도구 개발 같은 일은 기재돼 있지 않았다. 앙헬이 한네만의 감시를 이미 눈치챘거나, 그도 아니면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자기가 개발한 흥분제를 들고 입궁했다는 뜻이다.
전자면 차라리 다행이고, 후자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독도 아니고 흥분제를 챙겨? 뭐에 쓰려고 가져온 건지는 몰라도 아주 또라이 같았다. 대체 누구 먹이려고 가지고 온 거야?
그나마 이르커스가 체면치레를 위해 한 모금만 마셨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앙헬이 채워 준 와인을 전부 마셨으면 지금쯤 고열로 의식을 잃거나 심할 경우 장기가 상했을 수도 있었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정공법으로 황위 계승을 하려고 했을까. 그냥 이세계 고등학생 깽판물을 400년 만에 실현해 버릴까? 마탑 박살 내고 황궁도 조져 버린 다음, 이르커스를 황좌에 앉히고 몇 년 섭정하다 죽여 달라고 해도 문제없는 거잖아.
하지만 후회해 봐도 이미 일어난 일이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트리스탄이 밀착 호위하며 오늘 잡은 밤손님만 두 명이었다. 이르커스가 약해진 오늘 밤부터 새벽까지는 암살자가 물밀듯 찾아올 게 분명했다. 붙잡히는 순간 재깍재깍 혀 깨물고 죽거나 칼로 자기 목을 그었다는 걸 봤을 때, 죄다 숙련된 암살자들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못 죽일 것 같다던 라단타의 말은 날 도발하려던 게 아니라 진심이었나 보다.
나는 라단타의 멀끔한 얼굴을 회상하며 그 자식의 머리털을 싹 불태워 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 정도는 죽이는 것도 아니니까 해도 되지 않나?
“흐, 으…… 유안…….”
하지만, 라단타 머리에 불 지르는 상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르커스가 더듬더듬 몸을 일으켜 내 팔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트리스탄이 나와 이르커스를 번갈아 보더니 내게 입 모양으로 ‘나는 나갈까?’라고 물어 왔다.
나를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데다가 얼마 전에 입술부터 들이밀어 키스까지 했던 제자다. 여기서 트리스탄을 내보내고 단둘이 남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내가 아직 이르커스보다 강하니까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응급조치 정도는 하게 될 수밖에 없겠지.
내 팔을 붙잡은 이르커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열로 끙끙 앓는 주제에 이런 악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정말 의문스러웠다
나는 침착하게 트리스탄에게 나가지 말라고 말하려 했지만, 저항할 새도 없이 침대 쪽으로 끌어당겨졌다.
“야, 잠깐…….”
“유안, 나 너무…… 힘들어.”
허우적거리며 침대에서 도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누운 내 위로 이르커스가 더듬더듬 올라탄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트리스탄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을 치는 게 보였다. 트리스탄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허겁지겁 방문을 닫고 탈출해 버렸다.
아니, 비겁하게 혼자 탈출하지 말라고……. 대현자 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