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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43화 (43/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43화

    ‘그 인간, 80년 전에 내가 황제 돼 주겠다고 할 때는 말리더니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마법 계약까지 걸어 가며 자살을 꿈꾸네? 참 독하다.’

    ‘그건 쥬리아, 네가 황제 되면 정복 전쟁하면서 세계를 멸망시킬 거라고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세계 멸망이 뭐 어때서. 어차피 유안은 내가 세계를 멸망시키기 전에 죽을 텐데.’

    ‘……그래서 마법 계약을 파기할 방법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사밀라와 쥬리아는 쌍둥이 자매였다. 둘 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마녀였고, 황제가 되어 달라는 유안의 부탁을 여러 번 거절한 적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쥬리아 쪽은 유안이 거절한 것이었지만. 족보를 굳이 따져 보자면 이르커스에게는 먼 친척 어른이나 다름없었다.

    두 마녀는 쌍둥이인데 차림새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불편한 드레스를 고집하며 진주 목걸이를 잔뜩 걸고 있는 사밀라와 산발에 거적때기를 걸치고 있는 쥬리아는 얼굴을 제외하면 닮은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자매 사이는 꽤 친밀한지, 눈앞에 이르커스를 두고도 자기들만의 대화에 빠져 이르커스의 존재를 자꾸 잊어버렸다.

    ‘아. 맞다, 맞다. 마법 계약 파기 얘기하고 있었지.’

    ‘평범한 마법사면 몰라도 유안이 걸어 놓은 마법 계약이면 웬만해선 파기할 수 없어. 반동이 어마어마할걸.’

    ‘죽여 달라는 게 조건이었으니까…… 그대로 계약 상대한테 반사되지, 보통?’

    ‘맞아. 파기하는 순간 네가 죽을 거야. 엄청나게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 죽게 되겠지.’

    ‘아니면, 역으로 너도 영생을 살게 되거나. 유안처럼 말이야.’

    마녀들을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르커스는 입을 굳게 다문 채로 마녀들의 거처를 나왔다.

    이르커스에게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쥬리아와 다르게, 사밀라는 이르커스에게 언제든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작은 수정구를 내밀었다.

    ‘너, 유안을 사랑하지?’

    사밀라는 마치 저주를 거는 마녀처럼 발끝을 들어 올려 이르커스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마녀가 아니라 사람을 홀리는 바다 괴물의 목소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달콤한 어투였다.

    ‘이 핏줄을 타고난 애들은 너나 나처럼 꼭 누군가를 비참하게 사랑한단 말이야……. 그게 우리의 비극적인 운명인가 봐.’

    비참하게 사랑한다는 말이 이르커스의 가슴에 박혔다.

    사밀라의 말이 맞았다. 대현자 유안을 사랑하는 일은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고, 간신히 문이 열렸다고 생각하면 다시 닫히는 것을 반복하는 고행과 같았다.

    “어머,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춤이 아직 서툴거든요…… 부끄럽지만.”

    이르커스의 손을 붙잡고 반 바퀴를 돌던 멜킨 소백작이 뭉툭한 구두 굽으로 이르커스의 발등을 밟았다. 자신과 춤에 집중하라는 고의가 담긴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이르커스는 그냥 모르는 척했다.

    마녀들은 유안과 이르커스의 마법 계약을 자신들이 파기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계약 당사자인 이르커스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할 수 없고, 유안은 이르커스가 바라는 대로 계약을 없던 일로 해 줄 리 없다. 그러니 이르커스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쥬리아와 사밀라처럼 강력한 마녀들뿐이었다.

    쥬리아는 그 정도의 마법 계약 파기를 도왔다간 자기도 반동에 휩쓸릴 거라면서 돕고 싶지 않아 했지만, 사밀라의 설득에 못 이겨 결국 이르커스가 황제가 된 이후에 마법 계약을 파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계약 파기의 여파로 그 자리에서 죽거나, 영원히 살거나.

    어느 쪽도 긍정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유안이 이르커스에게 실망하고 화를 내는 미래는 정해져 있으므로.

    입안의 혀처럼 굴어 유안의 환심을 잔뜩 사 놨더라도, 이르커스가 유안과 마찬가지로 불멸자가 되는 순간 유안은 절망할 것이다. 한유안은 영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르커스는 유안을 제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르커스뿐만 아니라 예카리나의 그 어떤 후손도 유안을 죽일 수는 없었다.

    대현자 유안은 이르커스를 거둔 순간부터 이르커스의 사람이었다. 이르커스가 믿을 수 있고, 따를 수 있으며……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유일’이라는 수식은 해독할 수 없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욕심과 광기는 로베인 황가의 숙명이다. 비참한 사랑을 하는 게 마녀의 운명이라면 대대로 로베인 제국의 황제들은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하는 광인들이었다. 그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언제나 최악의 결말을 만들었고, 이르커스 역시 그 혈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황자님과 춤출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드레스 자락을 고아하게 쥔 멜킨 소백작이 이르커스를 향해 몸을 숙였다.

    반짝거리며 이르커스를 바라봤던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실망이 드러났다. 고의로 발을 두 번이나 밟았음에도 이르커스는 그녀가 바라는 관심의 10분의 1조차 주지 않았다.

    이르커스의 신경은 눈앞에서 함께 담소를 나누고 춤을 추는 이들이 아니라 온통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유안이 가진 마나를 감지해 보려고 해도, 연회장을 활보하고 있는 마탑주 때문에 유안의 위치를 추적하는 건 쉽지 않았다.

    “드디어 제 자리가 났군요.”

    이르커스의 시선을 느낀 건지 앙헬이 곧바로 이르커스를 향해 다가왔다. 처음 대면한 사이면서도 그는 이미 이르커스를 여러 번 본 사람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까 전부터 황자님께 인사 한번 드리려고 한참 기다리고 있었죠. 마탑주 앙헬입니다.”

    앙헬은 라단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일 만큼 젊었지만,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이라는 것쯤은 유안에게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늠하듯 재 보는 시선이 앙헬과 이르커스 사이에 오고 갔다. 이르커스는 최소한의 예의만 갖춰 앙헬의 인사를 받아 줬을 뿐, 억지로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거나 다른 귀족들에게 했던 것처럼 입에 발린 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대기 중에 모여 있던 마나가 천천히 모여들었다. 두 사람 모두 일부러 마나를 끌어모으려는 의도가 없음에도 그랬다. 본능적인 경계심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만일 이르커스의 호위를 위해 따라온 게 로버트와 트리스탄이 아닌 한네만이었다면, 한네만은 오고 가는 마나의 흐름에 질려 연회장을 뛰쳐나갔을 터였다. 저 미친놈들이 사람 많은 곳에서 공격 마법을 쓸 생각을 한다며 신경질을 부렸을지도 몰랐다.

    “정말 훌륭한 마법사의 재목이군요.”

    “스승을 잘 뒀으니까요.”

    “하하, 대현자님이 왜 황자님을 제자로 들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앙헬이 서슴없이 이르커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앙헬의 시선은 이르커스가 끼고 있는 반지 형태의 마도구에 고정돼 있었다. 이르커스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온 앙헬의 손을 탁 소리가 나도록 쳐 냈다.

    정작 손이 쳐 내진 앙헬은 당황하지 않는데, 그 주변에 있던 다른 귀족들과 마법사들이 숨을 삼켰다. 로버트와 트리스탄이 드물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앙헬을 경계했다. 이르커스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앙헬이 먼저 물러서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앙헬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전설적인 유물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달뜬 얼굴로 이르커스의 손을 가리켰다.

    “이거 정말 걸작인데요. 대현자님이 만들어 주신 건가요?”

    “…….”

    “아차,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대현자님이 만든 마도구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또 오랜만이라서.”

    그제야 이르커스로부터 한발 물러선 앙헬이 주위를 둘러보곤 쾌활하게 웃었다. 다른 분들을 당황하게 만들어서 죄송하다는 격의 없는 사과는 덤이었다.

    이르커스는 불쾌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로 앙헬의 웃는 얼굴을 살폈다.

    “그렇게 의심하는 얼굴로 안 보셔도 됩니다. 마탑은 로베인 제국의 황위 싸움에는 일절 관심 없으니.”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을 들어 잔에 따라 내미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이 와인을 거절할 구실도 없었고.

    이르커스는 앙헬이 건넨 와인 잔을 받아 들었다. 이 안에 독이 들었더라도 웬만한 극독이 아니고서야 이르커스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터였다.

    자기가 먼저 마셔 보겠다는 로버트를 물리고 이르커스는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예상과 달리, 독도 무엇도 없는 평범한 와인이었다.

    앙헬은 그런 이르커스를 보며 히죽 웃었다. 너무 환하게 웃어 오히려 꺼림칙해 보일 지경이었다.

    대놓고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독살을 계획할 만큼 라단타와 앙헬은 바보가 아니다. 이르커스는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채 앙헬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연회장에서 공개적으로 나눌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앙헬의 푸른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과하게 반짝거렸다. 왜 유안이 앙헬을 두고 소름 끼치는 사이비 새끼라고 혀를 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마탑주께서는…… 예의를 다시 배우는 게 좋겠습니다.”

    이르커스는 일단 참았다.

    유안의 손에 자라면서 무례한 상대를 마주치면 낙뢰를 꽂는 대신 검을 휘두르는 훌륭한 인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일단은 참았다.

    유안이 인내심을 가지고 황궁 정치에 뛰어든 이상, 적어도 연회장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다 보는 와중에 마탑주를 두들겨 팰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트리스탄과 로버트도 이르커스가 함부로 나서지 않자, 평소처럼 껄렁거리는 대신 조용히 이르커스의 뒤에서 앙헬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르커스와 달리 안 참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야! 어딜 내 제자한테 수작질이야? 당장 떨어져. 사이비 옮는다.”

    바로 대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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