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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42화 (42/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42화

    황궁 놈들은 참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를 않는다.

    나는 내게 웃으며 ‘죽을래? 아니면 노예 될래?’ 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던 대륙 통용어로 선택지를 제시하던 다윈이 떠올라 기분이 정말 나빠졌다. 지금이라도 이 자식 목을 다윈 목 대신 칠까?

    라단타가 또라이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정말 또라이여서 김이 빠졌다.

    만약 내 예상과 다르게 바른 생활을 일삼고 겉과 속이 투명한 청렴결백 청년이었다면 나는 진짜 당황했을 것이다. 황궁에서 이런 인간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는 거냐고 명계에 있을 예카리나한테 편지라도 적었을 거다.

    황실 핏줄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이 정도면 광증이 유전병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아니면 또라이만 황제가 될 수 있다는 판타지 세계의 법칙이라도 존재하는 거거나. 성군은 없고 ‘성군인 척하는 놈’과 ‘성군인 척도 못 하는 놈’만 있으니 정말 세상이 말세였다.

    “네가 이르커스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니?”

    “전 못 죽이죠. 그만한 마검사를 제가 어떻게 상대하겠습니까?”

    일대일로 붙으면 라단타는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이르커스 손에 죽을 것이다. 마법을 쓸 필요도 없겠지. 검 하나만으로 충분할 테니까.

    하지만 라단타가 아니라 마탑주 앙헬이 상대라면 이야기가 좀 달랐다.

    앙헬은 마도구나 비약 연구가 특기인 터라 공격 마법에 능숙하진 않지만, 마탑주답게 그 외 온갖 특수 마법에 능통했다. 수식 계산도 잘해서 온갖 마법을 다 섞어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게다가 앙헬이 개발한 마도구나 비약은 마법이 아니라서 마나 운용이 쉽게 감지되지 않았다.

    특히나 이렇게 사람이 잔뜩 모여 있는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앙헬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마도구를 들고 뭘 할지는 대현자인 나라도 감지가 어려웠다. 난 사람이지 탐지기가 아니니까.

    웬만한 독은 내가 준 마도구도 있고, 독에 내성이 있는 이르커스에게 통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라단타와 앙헬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려는 건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앙헬은 몰라도 라단타와 나는 오늘 처음으로 직접 대면한 사이였다. 라단타에 대한 잡다한 정보는 알고 있어도 이놈의 전략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 단번에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걸 할 수 있었으면 난 지금 대현자가 아니라 궁예가 됐겠지.

    “네가 이르커스를 죽이면, 난 널 죽일 거야.”

    “스승이 부모나 형제보다 낫네요. 원수도 갚아 준다고 하고.”

    “농담 같니? 넌 절대 로베인 제국의 황제가 되지 못할 거다.”

    “…….”

    “절대로.”

    내가 뱉은 말은 꼭 저주나 예언처럼 들렸다. 생글생글 웃고 있던 라단타의 표정이 슬쩍 무너진 것도 그 이유일 터였다. 대현자쯤 되면 혹시 예언이라도 할 수 있나,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을 테니까.

    “당신이 계속 남쪽 숲에나 처박혀 살았으면 좋았을걸.”

    “본색이 드러나니 한결 낫구나. 웃는 낯이 꼴 보기 싫었거든.”

    “애초에 당신 같은 괴물이 제국의 황위 싸움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다 가진 놈들이 항상 불공평을 논한다. 이펜하임 대륙이나 지구촌이나 참 다를 게 없다. 한국 작가가 쓴 판타지 소설이니 별수 없겠지만, 저 말을 들으니 짜증이 훅 올라왔다.

    불공평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그럼 외척 세력 등에 업고 다른 형제자매 한 명씩 알뜰살뜰 죽인 놈이 할 말인가. 몇 년 만에 돌아온 남동생 조지겠다고 마탑주까지 끌어들인 건 공평이냐?

    라단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 번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상냥한 어조와 부드러운 말씨 사이에 분노를 숨기는 법을 아는 이였다. 영리하지만 선하진 않다는 점에서 정말 판타지 소설 악역다웠고.

    나는 혀를 차며 느리게 손을 뻗어 라단타의 목울대를 툭 건드렸다.

    “죽고 싶다고 안달 난 건 나랑 닮았네.”

    “…….”

    “나보다 먼저 죽지 않게 처신 잘하렴.”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연회장 쪽으로 향했다.

    라단타와 앙헬이 정확히 어떤 걸 모의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르커스는 나처럼 죽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무리 강해도 심장에 칼이 꽂히거나 화마에 휩싸이기라도 하면 죽는다.

    내가 어떻게 금이야 옥이야 키운 제자인데……. 그런 식으로 죽는 걸 눈앞에서 두고 볼 수 없었다.

    ????????????

    “함께 춤춰 주시겠어요?”

    이번이 딱 열세 번째 춤 신청이었다.

    이르커스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고 예의를 갖춰 상대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유안이 바라는 건 이르커스의 안정적인 미래였다. 이르커스는 유안이 어떤 미래를 설계하고자 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현자인 자신이 죽은 뒤에도 황권이 위협 받지 않는 미래.

    원래라면 낙뢰부터 쳤을 상황에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참는 것도, 신경을 갉작거리는 마탑주 일행을 무시해 버리지 않고 감시를 붙인 것도 전부 이르커스를 위한 일이었다.

    유안이 이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도움을 받고 있는 당사자 이르커스가 그 계획에 재를 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르커스는 유안이 바란다면 그 누구도 해치지 않고 숨죽여 지낼 자신이 있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간간이 미소나 지어 주고, 힘은 있지만 생각은 없어 보이는 허수아비처럼 서서 권력을 탐하는 세력가와 성대한 약혼식을 올릴 생각도 있었다.

    유안이 가장 바라는 ‘죽음’만을 제외하면 이르커스는 유안이 바라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래야 그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자신의 곁에 있어 줄 것이었으므로.

    건조한 나무 향내가 아니라 화려한 꽃향기가 이르커스의 코끝을 자극했다. 고급 향유를 발라 반질거리는 얼굴 위로 생기 넘치는 아름다움과 기품이 흘렀다. 멜킨 소백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이르커스를 향해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리스 멜킨에게는 다른 귀족 영애들과 다른 자신감이 있었다. 그녀가 장남인 에킨도르를 밀어내고 백작가의 후계자가 된 덕도 있을 테지만, 이미 에킨도르를 통해 이르커스와 자신이 약혼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서로 좋아하지 않더라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한다면 이르커스는 멜킨 소백작, 에리스 멜킨을 밀어낼 수 없었다.

    이르커스는 제 뒤에서 입을 떡 벌린 채로 에리스 멜킨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로버트와 아무 생각 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는 트리스탄을 확인했다.

    한 번이라도 유안과 춤을 추고 싶다는 이르커스의 바람은 애초에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고 내뱉은 소리였다.

    유안은 이르커스가 바라는 건 대개 못 이기는 척 다 들어줬지만, 추문이 퍼진 상황에서 이르커스와 춤을 춰 줄 만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르커스는 묘한 공허함을 채울 수가 없었다.

    각설탕 조각에 개미가 꼬이듯, 사람들은 고작 호위 둘을 달고 홀로 서 있는 이르커스에게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르커스가 제법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르커스의 주위를 겉돌기만 하던 이들이 하나둘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하더니, 종래에는 너나없이 달라붙어 오기 시작했다.

    이르커스가 내비치는 위압감이나 거부감과 별개로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선 덕이었다.

    “황자님은 정말 아름다우세요.”

    뺨을 붉히며 이르커스와 왈츠를 추고 있는 멜킨 소백작이 꼭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긴 속눈썹을 내리떴다. 눈 밑으로 속눈썹이 만든 긴 그림자가 졌다. 이르커스는 마찬가지로 예의를 차려 상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짧게 늘어놓았다.

    테라스 난간에 앉아 있던 유안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로 이르커스는 저를 환영하는 이 연회에 아예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한유안은 이르커스 로베인을 좋아한다.

    지금이야 스승으로서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더 큰 모양이지만, 이르커스는 유안이 제게 종종 이성적으로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안이 자신을 밀어내고 강경하게 선을 그으면 그을수록 그 직감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유안은 이르커스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누구든 조금만 이르커스와 유안의 관계를 지켜본다면 유안이 얼마나 이르커스를 아끼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르커스는 종종 유안이 자신을 어여삐 여기는 것이 제가 ‘예카리나의 후손’이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을 죽여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어서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이르커스는 항상 유안 곁에 있으면서도 유안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한유안은 이래선 안 된다며 이르커스를 밀어내기만 했다.

    ‘대현자와의 마법 계약을 파기하고 싶다고?’

    ‘그래. 당신이라면 방법을 알 것 같아서.’

    ‘어떤 계약을 맺었는데?’

    ‘나를 황제로 만들어 주는 대가로 대현자를 죽여 주기로 했어.’

    아처볼드의 목을 잘라 간 대가로 받은 ‘강력한 마녀에 대한 정보’는 이르커스가 기대했던 만큼 즉각적인 도움을 주진 못했다. 노화가 더딘 마녀는 테리즈만큼 나이를 먹고서도 이르커스에게 춤 신청을 하는 귀족 영애들처럼 젊어 보였다.

    ‘쥬리아! 유안이랑 계약했다는 어린애가 왔어.’

    ‘유안?’

    ‘그래, 우리 후손인가 봐. 웬일로 남자애더라! 유안이 깜찍한 마법 계약을 걸어 뒀네.’

    ‘유안이 엄청 좋아했겠네. 마녀들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치를 떨었잖아.’

    ‘얘는. 유안이 하는 불평을 곧이곧대로 믿어? 유안은 마녀를 좋아해. 예카리나를 좋아하니까, 우리를 좋아할 수밖에 없지.’

    이르커스는 황궁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녀들을 만났다.

    그리고 두 마녀는 모두 대현자 유안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둘 다 예카리나의 후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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