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41화
“어라, 여기 사람이 있네.”
흥미진진하게 이르커스를 염탐하고 있는데 난간 아래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어도 나 들으라고 낸 소리였다.
이르커스에게 온 정신이 팔려 있던 데다 기척이 전혀 안 느껴져서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난간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연회장 코앞에서 기습적으로 마법 갈길 뻔했네.
“심지어 그 사람이 대현자님이네. 안녕하세요?”
나는 난간 아래쪽을 향해 몸을 숙였다.
날이 어두워져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빛나는 금발만 보고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제는 타고난 농사꾼이었다. 본인 얼굴은 그저 그래도 자식 외모 농사는 참 잘 지었으니까.
“라단타 뭐시기잖아.”
“하하. 라단타 아그니엘 로베인입니다. 뭐시기가 아니고.”
“아무튼, 라 어쩌고인 건 똑같지. 너희는 이름이 너무 길어. 세 글자 정도로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니까.”
연회장 안에서 인파에 둘러싸여 있어야 할 사람이 연회장 밖 정원에 서서 테라스에 있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탑주가 내 위치를 라단타에게 알려 줬을 것이다. 저놈은 내게 공식적인 만남을 청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목적으로 여기까지 행차하신 걸 테고.
“할 말 있니? 나 지금 염탐하느라 바쁜데. 용건 없으면 가서 네 동생의 복귀나 마저 축하해 주고 그래라. 그래야 좋은 형이지.”
“생각보다 유쾌하신 분이네요.”
“그런 말 많이 들어.”
“잠깐 담소를 나눌 수 있을까요? 제가 그간 대현자님을 정말 뵙고 싶었거든요.”
“공식적으로 오면 될걸.”
“저도 엮인 게 많아서. 이렇게 찾아뵙는 걸 용서하세요.”
날 포섭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만나 뵙고 싶었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혀가 제법 간교했다. 뵙고 싶은 게 아니라, 시야에서 치워 버리고 싶은 거겠지. 아주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내뱉는다.
라단타는 이르커스처럼 화려한 미남은 아니었지만, 고운 선을 가진 미인이었다. 반짝거리는 금발을 제외하면 이복형제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다른 외양이었다. 두 사람 다 아마 모계 유전자가 빛을 발한 덕에 아버지와 달리 눈에 띄는 외모로 태어난 걸 테지.
테라스 난간에서 정원 쪽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르커스가 뭘 하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 마도구를 도로 들었다.
이르커스는 내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금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무튼, 하면 잘하는 놈이라니까.
나는 나이 많은 귀족들에게 붙잡혀 미미하게 웃고 있는 이르커스를 확인하곤 들고 있던 마도구를 다시 아래로 내렸다.
순간 이르커스가 내 쪽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만, 봤다고 한들 귀족들한테 붙잡혀 있으니 한동안 테라스 쪽으로는 나오지도 못할 터였다.
저 귀족들이 놔주면 영식들이 붙잡고, 영식들이 놔주면 영애들이 붙잡고…… 연회 주인공답게 한참 시달리고 나면 시간이 다 가 있을 것이다.
“나도 너 한번 보고 싶기는 했어.”
“대현자님께서 저를요? 영광이네요.”
테라스 난간에 발을 걸쳤다가 정원 쪽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쪽팔리게 살짝 비틀거렸다. 역시, 몇십 년씩 잠만 처자지 말고 운동 좀 꼬박꼬박할걸.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걷어 내고 몇 발자국 앞에 서 있는 라단타와 마주했다.
생글생글 웃는 낯이 허술해 보이기는 했지만, 겉보기와 달리 얼굴만 반반한 풋내기는 아니었다. 내 눈과 머리 색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라곤 하나 없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황태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네가 어떤 놈인지 궁금했거든. 목적을 위해서 사람 죽이는 놈이야 실컷 봐 왔지만, 넌 내가 아는 이 세계의 유일한 악역이라서.”
“악역이요?”
“그런 게 있어.”
4세기 만에 드디어 내가 아는 소설 등장인물을 (그래 봤자 두 명이긴 했지만) 다 만났다. 저놈이 <이르커스의 서> 1권에 나온 악역이라는 걸 알면서도 은근히 반가웠다.
나는 대놓고 ‘우와! 정말 당황스럽다’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라단타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주변에 기척이 더 있는지 살폈지만, 호위를 별도로 달고 오진 않은 건지 뒤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어야 할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라단타는 체내에 보유하고 있는 마나 양이 형편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마법사가 될 재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르커스처럼 대단한 마법사는 못 될지언정 인기척을 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걸 봐서는 그럭저럭 몸을 움직이는 데 능숙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황실에서 영재 교육을 받은 황자라면 검 정도는 평균 이상으로 다룰 줄 알겠지.
하지만 어디로 보나 라단타는 이르커스보다 약했다. 마법뿐만 아니라 몸싸움에서도 질 게 뻔해 보였다.
육탄전에 자신감을 가질 형편도 안 되는 놈이 날 만나러 오면서 호위 하나 안 붙이고 온 건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자기한테 낙뢰라도 치면 어쩌려고 그러지?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절로 짝다리를 짚은 삐딱한 자세로 라단타를 바라보게 됐다.
라단타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법을 써서 로베인 제국을 차지하고 이르커스를 황제로 앉히면 될 텐데, 내가 물리적으로 나서지 않으니 의아했을 것이다.
대현자씩이나 돼서 왜 저렇게 온건하게 나오는지 혼란스러웠을 테다.
무력으로 엎어 버리면 간단할 텐데, 내가 입궁 이후에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으니까. 공격이 와야 반격을 하는데, 서로 탐색전만 벌이고 있으니 답답했겠지.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가 호위 없이 단둘이 만나더라도 자기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소문보다 제법 인간적이고, 얌전하며, 인륜을 아는 대현자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원래 사람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 마련이니까.
“너, 나 마탑한테 팔아넘기려고 한다며.”
“…….”
“왜 대답이 없니? 앉아. 난 서서 얘기할 생각 없으니까. 늙으면 관절이 아프다고.”
“……정말 생각 외라서 할 말 없게 만드시네요.”
할 말 있어서 불러내 놓고 할 말이 없다고 하면 어떡하냐.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정원 벤치에 앉은 라단타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히 이르커스랑 다른 점이 눈에 잘 들어왔다.
외모뿐만 아니라 태도나 분위기 자체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놈이 곱게 자란 도련님 같다면 이르커스는…… 얼떨결에 맹수 손에 자란 늑대 소년 같다고 할까.
“여기가 밀회나 즐길 만한 정원이 아니라 공식 석상이었으면 나도 돌려서 말했을 거다. 적어도 네가 뒤에 호위 하나만 붙이고 왔어도 그럴듯하게 예의 차리는 척은 했겠지.”
거짓말이다. 누가 있어도 딱히 예의는 안 차렸을 거다.
그런 귀찮은 짓을 내가 왜 하겠는가? 어차피 이르커스가 황제가 되고 나면 난 죽을 거기 때문에, 리타이어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적당히 대충 살고 있었다.
게다가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나한테 체면 차리라고 꼽 주는 건 솔직히 좀 꼴불견이다.
내가 겉모습은 창창한 20대지만 안에는 웬만한 드래곤보다 나이 많은 노인네가 들어 있는데, 노인 공경이 뭔지 안다면 예의는 내가 아니라 상대가 차려야 하는 게 맞다. 어딜 감히……. 나, 너희 선조 목도 쳤어.
“누가 엿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앙헬이 도청하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마법사는 은밀 행동에 취약하니까.”
“마탑주는 호위로 안 쳐 주는 거군요.”
“그래. 앙헬은 약해 빠졌잖아. 내가 새끼손가락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아무리 내가 대현자라고 해도 100살 넘은 마탑주를 새끼손가락으로 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못해도 오른손 하나는 다 써야 수식 그리기가 편하지.
하지만 라단타는 내 허세를 어느 정도 믿는 눈치였다. 이래서 이름값이 다라니까.
“그래서 용건이 뭐야. 빨리 말해라. 나 바빠.”
“대현자님께서 조용히 남쪽 숲으로 돌아가 주신다면 이르커스를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황제가 되기 전에도, 황제가 된 이후에도.”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예카리나가 내세에서 껄껄 웃으면서 ‘쟤 뭐래?’라고 되물을 소리였다.
“죽지 않는 사람이 적인 건 저도 이번이 처음이라서요. 기왕이면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습니다.”
“넌 이르커스가 살기 위해서 황제가 되려는 것 같니?”
“물론 아니겠죠. 생존이 목적이었으면 그냥 대현자님과 함께 남쪽 숲에서 칩거하며 지내도 됐을 테니까.”
“잘 알면서 뭔…… 협상을 그리 허접하게 하고 있어. 야, 너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니?”
“네?”
“물로 보냐고. 야, 나 대현자야.”
이르커스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말이 정말 웃겼다.
뭐야? 건드릴 수는 있어? 너, 나만큼 강해? 네가 뭔데? 내심 되묻고 싶었지만, 라단타라는 놈도 자존심이 있을 테니 대현자다운 인내심으로 꾹꾹 눌러 참았다.
“야, 말 들어 주는 것도 지겹다. 나는 솔직히 네가 나한테 갑자기 고백이라도 할 줄 알았어. 사람 멘탈 깨는 데 원래 그만한 게 없잖아.”
“네?”
“전교 2등이 1등 멘탈 깨려고 고백하는 전개 몰라? 내가 고등학생 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구구절절 추억팔이를 하는 동안, 라단타는 환한 미소와 함께 ‘지금이라도 고백할까요?’라고 되물어 왔다. 이르커스랑 다르게 놀리는 맛이 영 없는 놈이었다. 마탑주 앙헬보다도 한참 어린놈이 뭐 저렇게 능글거리는지…….
“제 말이 시간 끌기처럼 느껴지셨다니 유감입니다. 어느 정도는 진담이었는데요.”
“웃기지 마.”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라단타가 날 찾아온 목적은 무슨 협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를 데리고 나와 시간을 끌기 위해 불러낸 것이다.
알면서도 무슨 소리를 하려나 궁금해서 따라 나오긴 했지만, 너무 허접해서 좀 빡쳤다. 무슨 간교한 수나 함정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시간 끌기였다니.
차라리 여기서 누가 튀어나와 나를 기습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불로불사라는 걸 알고 있는 라단타 입장에서는 굳이 물리적으로 날 공격하지 않을 테지만, 이런 식으로 발목이 붙잡혀 시간을 낭비했다는 게 속이 쓰렸다.
“너 지금 일부러 나 불러낸 거잖아. 불로불사인 나를 공격하는 건 의미가 없으니, 내 관심을 끄는 동안 이르커스한테 갉작대려고.”
“이야, 안 속으시네요.”
“뱀 같은 놈일세, 이거.”
라단타가 내 말에 눈을 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저랑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시겠어요? 저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영 없을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