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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40화 (40/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40화

    “너, 상황에 맞게 춤 신청 잘하고 다녀야 한다. 내가 리스트 정리해 준 거 기억나지?”

    “꼭 그 사람들이랑 다 춰야 해?”

    “전부 출 필요는 없지만, 너한테 춤 신청하는 영애들한테 무안 주는 건 안 돼.”

    “곤란하네. 당신이랑은 그럼 언제 춤출 수 있어?”

    “기회 되면 추는 거지. 난 비공식 참여라니까? 나한테 괜히 신경 쓰느라 실수하면 안 된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진정해. 아까도 같은 말 했잖아.”

    “애써 키워 놨더니 머리 좀 커졌다고 잔소리도 안 들어 주고. 너한텐 잔소리 같겠지만,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르커스는 혼자서도 잘할 것이다. 물론 근처에서 지켜보긴 할 건데 내가 관여할 일 없이 알아서 척척 춤추고, 귀족들 비위 맞추고, 자기 어필도 잘 끝마치겠지.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한테 이르커스는 항상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은 존재였다.

    “무슨 일이 생겨도 감정에 휘둘리지 마. 넌 정상적인 방법으로…… 황제가 되어야 하니까.”

    그래야 날 죽이지.

    나는 이르커스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 줬다.

    사실 이르커스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귀족 영애들이 이르커스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여자 쪽에서 먼저 춤 신청을 해 오면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르커스도 알고 있었고.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이랑 손잡고 춤을 추거나, 입을 맞추거나…… 목적을 위해서 몸을 섞는 것도 괜찮아?”

    이르커스가 묘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순간적이었지만 위압감이 느껴졌다.

    “안 괜찮으면?”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 선을 넘고 만다. 추문에 휩싸이고, 서로를 상처 입힐 걸 알면서도.

    “안 괜찮다고 하면 네가 어쩔 건데.”

    “당신은…….”

    “난 네 보호자야.”

    그건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 같았다. 나는 이르커스의 보호자였다. 마법 스승이었고, 계약을 맺은 계약자기도 했다.

    이르커스가 아무리 나에 대한 애정과 호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나는 거기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르커스를 제대로 밀어내야 했다.

    그게 옳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아주 잘 안다. 머리로 아는 걸 마음으로 행하기가 어려운 것뿐이다.

    “희망이라도 주지 말지 그래.”

    “이르.”

    “안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밀어내는 거, 가혹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지?”

    이제는 내 손보다 훌쩍 커 버린 이르커스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몸을 비틀거나 마법을 쓰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시선이 마주친 순간 덫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입술이 맞닿은 건 순식간이었다.

    피할 새도 없었다. 당황해서 작게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혀가 파고들어 왔다. 당장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이르커스는 순순히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도 키스하는 법 같은 걸 가르쳐 준 적은 없는데.

    조금 성급하게 몰아붙이는 행태기는 해도 이르커스는 퍽 능숙하게 엉켜 들었다. 오히려 당황해서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 나였다.

    호흡을 갈취하는 것처럼 이를 세워 혀끝을 물고 빨아당기는 감각이 선연했다. 도망치기 위해 뒤로 걸음을 옮겼지만, 이르커스가 금세 따라붙어 다시 붙잡히길 반복했다.

    결국, 나는 이르커스의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고 나서야 고개를 떨어트릴 수 있었다. 상처가 남을 만큼 세게 물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내가 입술에 상처를 냈는지 입안에 얼핏 피 맛이 돌았다.

    “할 수 있으면 계속 모른 척해 봐.”

    “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냥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이 순간을 피하고자 그간 최선을 다해 이르커스의 감정을 모르는 척해 왔는데, 결국 더 피할 수가 없었다.

    이르커스는 금세 자라 청년이 되었고, 나는 이르커스가 보여 주는 맹목적인 애정에 정신을 못 차리고 흔들렸다.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내 꼴이 한심했다.

    나는 이르커스의 손을 쳐 내고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계속 모르는 척해 보라는 도발에 마음이 동한다는 게 문제였다. 자식처럼 키운 어린애한테…… 나이 차이가 세기 단위로 나는 새파랗게 젊은 주인공한테 끌린다니.

    역시, 빨리 죽어야 했다.

    ????????????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입술을 빼앗겼다.

    왜 바로 못 밀어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간다. 술도 안 마셨고, 미약 성분에 취한 것도 아니다. 허접한 속박 마법에 걸릴 일은 내가 대현자니까 당연히 없고, 어떤 목적이 있어서 이르커스와 입술을 맞대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보기 위해서 최대한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성적인 수재인 내가…… 수능 전날 판타지 소설 펼쳐 본 것 말고는 비이성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던 내가…… 이 나이 처먹고 어린애의 입술 박치기 하나 피하지 못했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새 동체 시력이나 순발력이 바닥으로 처박히기라도 했단 말인가.

    내 입술을 손으로 더듬더듬 만져 봤다. 불행하게도 그냥 내 입술이었다. 차라리 상처라도 났으면 이 절망적인 감상이 좀 덜했을지도 모른다.

    이르커스랑 그런 접촉을 했다고 입술이 사라지거나 하늘로부터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같은 호통과 함께 엄청난 저주가 내려지는 일은 없었다.

    왜 없는 거야? 차라리 그냥 내 입술을 없애 줘. 아니면, 하늘에서 번개라도 쳐서 개 호로 잡놈인 나를 죽여 주든가.

    내가 이르커스에게 과하게 정을 준 건 사실이다. 속으로 끊임없이 정 주지 말아야 한다고 중얼거리고 있다는 건, 이미 정을 줬다는 의미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었다.

    지금이야 괜찮겠지. 한 10년은 서로 시간대가 맞으니 사랑 타령하며 글러 먹은 사제 관계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이르커스는 나와 달리 나이를 먹는다. 마녀의 핏줄이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죽음과 노화는 피할 수 없다.

    이르커스가 늙어 노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젊은 모습인 나를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까? 꺼림칙하다고 생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있을지언정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사랑꾼 예카리나도 만약 영원불멸의 삶을 살았다면 다윈 하나만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순애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미친 예카리나가 그 정도인데, 내가 교육을 잘못한 탓에 습관적으로 냉담함을 내비치는 이르커스는 더할 터였다.

    “아니 얘는 첫 키스를 뭐 이런 식으로…… 잠깐. 첫 키스?”

    진짜 좆 됐다.

    첫 스승도 나고, 첫 키스도 나고, 아주 이르커스의 처음이란 처음은 그냥 내가 다 해 처먹는 중이다. 소설 주인공의 삶에 관여하기로 마음먹은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깊숙이 관여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쨌든, 입술 박치기를 없던 일로 넘겨도 될지 말지를 고민해 봐야 했다. 이르커스 딴에는 나름 용기 내서 한 스킨십일 텐데, 그냥 없던 일로 쳐도 되나 싶은 한편으로 없던 일로 안 치면 어쩔 건데……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냥 연하도 아니고 3세기 정도 차이 나는 연하를 먹고 버리는 연상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구나.

    억울하다.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당한 건데…… 왜 내가 더 쓰레기 같지? 나는 최선을 다해 내 이마를 퍽퍽 때렸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심란한 일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을 미룰 수는 없다. 그것이 ‘어른’이니까.

    물론 400년을 살면서 키스 한번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흥청망청 음탕 방탕하게 산 적은 맹세코 단 하루도 없었지만, 사람 인생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입술 정도는 한두 번 뺏겨 봤다. 수도사로 살고 싶어도 세상이 나의 이 적당히 귀여운 외모를 가만두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입술 좀 맞대고 타액 좀 섞는다고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는다. 대수로운 일로 여길 필요가 없단 뜻이다.

    내 안의 유교 보이가 ‘당연히 대수 아냐?’라고 대꾸했지만, 씩씩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 무시하면 재활용 가능 쓰레기지만, 이걸 의식하기 시작하면 재활용 불가 대형 폐기물이 되고 만다.

    나는 침착하게 황궁 연회장 실외 테라스 쪽에 자리를 잡았다. 나만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닌지 여기저기서 요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적어도 마탑주 앙헬은 연회장 안쪽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르커스한테 트리스탄이랑 로버트를 붙여 주는 게 아니라, 한네만을 달아 줄 걸 그랬다. 바깥에서 구경할 줄 알았더니 아예 귀빈인 척 안에 들어가 있네.

    황제가 뭐라 뭐라 의미 없는 공치사를 늘어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커튼이 쳐진 안쪽을 바라봤다.

    생눈으로는 확인할 수 있는 게 얼마 없길래, 남쪽 숲 창고에서 건져 낸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손잡이 없는 돋보기 형태의 마도구는 저런 커튼 정도는 가볍게 투시하는 기능이 달려 있었다. 내가 언제 만들었던 건지 기억도 안 나긴 하지만, 아무튼 과거의 나는 꽤 괜찮은 마도구 개발자였던 모양이다.

    마도구 너머로 이르커스가 보였다. 마녀의 후손답게 이놈도 성장이 빨라서, 또래로 보이는 다른 귀족 영식들에 비해 키가 한 뼘은 더 컸다. 열일곱 살이 아니라 스무 살은 족히 넘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다들 이르커스에게 말 한번 걸어 보려고 기웃대는 꼴이 우스웠다.

    황궁에 입성한 지 몇 주가 지났는데, 시종들은 여전히 이르커스를 어려워했다. 이르커스를 가르치는 황궁 교사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두 번이나 바뀌었고, 이르커스 쪽에 붙어 보려고 각을 재고 있는 귀족들도 이르커스가 아니라 항상 나를 먼저 만나러 왔다.

    나한테는 마음 약하고 여린 녀석이지만, 남들이 보는 이르커스는 상당히 위압감 넘치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딱히 패악을 부리지도 않고, 뭐가 불만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데 사람들은 조용히 서 있는 이르커스를 두려워했다. 말 한번 걸어 보고 싶어 알짱거리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이르커스가 연회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호위로 딸려 보낸 트리스탄은 신이 나서 와인이나 처마시고 있었다. 역시, 붉은 매 용병단인가 뭔가 그냥 다 해체시켜 버릴까 보다. 그나마 로버트가 눈치를 슬슬 보면서 이르커스의 뒤를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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