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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39화 (39/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39화

    이 세계에 떨어진 후, 내가 처음으로 참여했던 황궁 파티는 황녀의 데뷔탕트였다. 풀어서 말하자면 당시 예카리나의 딸이 열세 살 생일을 맞이해 열린 생일 파티였다.

    예카리나의 딸은 예카리나와 마찬가지로 마녀였기 때문에, 열세 살이라고 하기에는 좀 조숙하긴 했다. 그런데도 그 주위에 쌓인 선물 더미에 푹 파묻혀 있던 모습은 퍽 귀엽고 웃겼다. 드물게 그 나이에 맞는 모습이기도 했고.

    예카리나는 잔뜩 들뜬 얼굴로 제 딸을 위한 축배를 들고, 황녀는 밤이 다 깊을 때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제 댄스 상대를 바꿔 가며 춤을 췄다.

    그 시절의 나는 내 목숨 하나 부지하는 것만으로 벅차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 파티장 안에서 어떤 뒷거래와 모략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었다. 덕분에 머리 아플 일도 없었으니까.

    그 시절에는 헤누스교가 주교였던 덕에 지금처럼 황궁 법도가 엄격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흥청망청 놀고, 격의 없이 깔깔거리며 웃어도 파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의를 지적 받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예카리나는 노예 신분이던 나를 자기 옆에 앉혀 두고, 종래에는 자기 딸과 춤까지 추게 했다.

    ‘유안, 난 정말 파티가 좋아.’

    ‘그래 보여요. 누가 보면 황녀님이 아니라 황비님 생신인 줄 알겠네.’

    ‘네 생일은 언제니? 내가 다윈을 졸라서 멋진 파티를 열어 줄게. 그때는 나랑 같이 춤추는 거야. 어때?’

    장밋빛으로 상기된 뺨을 하고 조잘거리던 예카리나는 아름다웠다. 원래 마지막 생명력을 태워 만개한 꽃들이 가장 탐스러운 법이니까.

    그 당시 내 생일은 이미 지난 지 오래였지만, 나는 예카리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다가오는 겨울이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딸의 데뷔탕트에도 얼굴만 살짝 비추고, 급한 용무가 있다며 금세 자리를 떠나 버린 황제 때문에 예카리나가 일부러 더 들뜬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내 거짓말이 무색하게 예카리나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내게 자기 딸들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죽어 버렸다.

    “이르, 그건 야회복이 아니라 상복 같아.”

    세월은 야속하게 흘러, 나는 그 이후로도 수많은 파티에 참여했다.

    로베인 제국에서 열리는 파티뿐 아니라, 대륙 여기저기에서 열리는 행사란 행사는 다 가 봤다. 이종족이 주최하는 파티에도 참여해 봤고, 시장 바닥에서 열리는 자그마한 규모의 축제도 둘러본 적 있었다. 그럴 만한 시간과 여유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 참여했던 그 황녀의 데뷔탕트 때만큼의 기대나 설렘을 다시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전쟁 다음으로 제일 먼저 질린 게 파티였으니까.

    말이 파티지, 황궁에서 열리는 행사는 죄다 칼 없는 전쟁터였다. 사람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대신 정신적으로 후려쳐 대니까.

    “이렇게까지 많이 입어 봐야 해?”

    “당연하지. 적어도 두세 벌은 골라 둬야 해. 네가 주인공이니까.”

    “……너무 불편해.”

    “황자님이니까 참아.”

    하지만 이르커스의 데뷔탕트 및 입궁 환영 파티는 간만에 내 심장을 뛰게 했다. 심장은 원래 뛰는 거지만, 아무튼 더 뛰었다.

    미소년 옷 입히기는 정말 재밌는 일이구나. 이런 재미를 모르고 그간 마법 수식이나 붙잡고 있었으니 인생이 지루했던 거겠지.

    나는 이르커스에게 영 어울리지 않는 녹색 원단을 들고 오는 재단사를 뒤로 물렸다. 녹색이 뭐야? 우리 애한테는 강렬한 레드가 제일이지.

    “그냥 검은색 입으면 안 돼?”

    “파티에 누가 상복 차림으로 가냐고. 내 말 들어.”

    “너무 눈에 띄는데……. 그러는 당신도 늘 입던 로브 뒤집어쓰고 올 거잖아.”

    “나는 비공식 참여니까 상관없어.”

    공식 참여한다고 해도 인간들이 내 머리 색이랑 눈 색에 너무 집착하는 탓에 로브를 벗을 일은 없었다.

    이르커스는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제 가슴팍에 장식돼 있던 금색 브로치를 떼서 내게 내밀었다.

    “그럼 이거라도 해.”

    “로브 다 뒤집어쓰고 무슨 브로치야.”

    “당신만 날 꾸밀 수 있는 게 억울해.”

    억울할 것도 많다. 나는 손을 뻗어 잘 세팅된 이르커스의 머리를 헝클었다. 머리 모양이 망가지는 것과 동시에, 힘내서 머리를 세팅한 시녀들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철이 들어야 하는데, 얘는 어쩌다 이렇게 어리광만 늘어난 걸까. 그건 아마 내가 지금처럼 이르커스를 제대로 밀어내지 못한 탓일 것이다.

    브로치 핀에 강화 마법을 걸었다. 내가 걸치고 다니는 로브는 일반 천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연약한 브로치 핀으로는 뚫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진짜 살다 살다 일개 브로치 핀에 강화 마법도 걸어 보고.”

    “연회장에 같이 안 있어 줄 거면 내가 찾으러 갈 수 있게끔 표시라도 해 놔야 하잖아.”

    “넌 이런 거 없어도 나 잘 찾잖니.”

    앙헬도 내 전용 GPS지만, 이르커스도 앙헬 못지않았다. 어디 간다고 말 안 하고 움직여도 아주 귀신같이 찾아오던데.

    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브로치를 로브에 달아 놓자, 이르커스가 모르는 척 고개를 재단사들 쪽으로 돌렸다.

    “그냥 당신이 내 사람이라고 표시해 두고 싶어서.”

    재단사 하나가 놀라서 바늘로 자기 손을 찌르는 게 보였다. 추문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아까도 내가 준 반지 형태의 마도구를 안 빼겠다고 고집부리는 게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이렇게 확정타까지 날려 준다.

    “넌 정말 날 파렴치한 놈으로 만들어, 이르.”

    “내가 언제.”

    “너랑 내 나이 차이를 생각해 봐라.”

    “당신한테는 좋은 거 아냐?”

    “미치겠네.”

    나이가 들수록 철이 없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구애가 노골적으로 변하는 것도 심각했다. 이 자식 이거, 아주 내가 밀어내지만 않으면 몸으로 부딪쳐 올 위인이었다.

    과연 그 시절 판타지 소설 주인공답게 하렘을 차릴 만한 대사를 픽픽 던지는데, 팔 잘라 달라는 애원이 아니라 자기 좀 봐 달라는 구애에는 익숙하지 않은 탓에 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됐어. 상복을 입든 말든 너 알아서 해. 나는 가야겠다.”

    “가지 마.”

    “재단사들 방해 그만해야지. 옷 몇 벌 짓는 데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은 거야?”

    내가 이르커스 옷 짓는 데 남아 있어 봐야 불쌍한 재단사들의 손만 다칠 뿐이다.

    이르커스의 시선이 재단사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어휴, 저거 일하는 사람들 힘들게 눈치 주는 건 어디서 배운 거지? 역시 나한테 배웠나…….

    내심 기분이 나쁘지 않으면서도 깊은 걱정이 밀려왔다.

    우리 애가 남색가라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날 좋아하는 건 맞고, 내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니 사실이긴 한데, 이게 공공연한 소문으로 떠돌면 너도나도 곤란해졌다.

    나는 한숨을 쉬며 멜킨 소백작과 이르커스의 만남 주선을 최대한 서둘러 보기로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 하니까.

    ????????????

    드디어 파티 당일이다.

    그간 팔자 좋게 남쪽 숲에서 나무 정령들이랑 뒹구느라 잊고 있었는데, 파티는 준비할 게 참 많았다. 옷 짓는다고 끝 아니고, 춤 배운다고 다가 아니고.

    이르커스의 입궁을 본격적으로 알려야 할 필요가 없었다면 당장 파티를 열라고 황제 멱살 잡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제때 열어 줬으면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준비 안 해도 되잖아. 역시 다음에는 황제 머리털을 다 뽑아 버리든가 해야지.

    파티 준비하겠답시고 이르커스랑 며칠 좀 붙어 있었더니 궁내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추잡한 소문이 퍼졌다.

    사실 이건 이르커스랑 내가 붙어 있어서 퍼진 소문이 아니라, 입만 열면 자기 좀 봐 달라고 절절하게 매달리던 이르커스 때문에 생긴 소문이었다.

    내가…… 나이 400살이나 먹고 미소년을 좋아한다는 추문에 휩싸여야 한다니.

    정말 억울했다. 예쁜 거 좋지. 그런데 나와 이르커스 중에 상대를 더 좋아하는 쪽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이르커스지 내가 아니었다. 걔는 애정이고, 나는 과보호…… 아니지, 피보호자에 대한 책임감? 이니까.

    인간들은 이 차이도 구분 못 하면서 이상한 소리나 지껄였다. 나는 툴툴거리면서 이르커스의 옷매무새를 바로잡아 주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내가 왜 미소년을 좋아해?”

    “……안 좋아해?”

    “좋아하긴 하지! 하긴 하는데!”

    예카리나 보고 얼빠라고 욕하지 말 걸 그랬다.

    하지만 인간은 시각적인 부분에 상당히 약한 동물이니, 나 또한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건 별수 없는 일이다. 이르커스를 껄끄럽게 여기는 인간들도 종종 생각에 잠긴 이르커스의 얼굴은 넋 놓고 몰래 훔쳐보더라.

    “당분간 입조심 좀 해. 나 좋아하는 티 그만 내라고.”

    “그게 뭐 숨긴다고 숨겨지나.”

    “……어휴, 내가 진짜 빨리 뒈져야지.”

    결국, 본인 고집대로 검은 제복에 안쪽 천만 붉은 망토를 두른 이르커스는 참 누가 키웠는지 미남이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작품을 전시회에 제출하는 예술가처럼 이르커스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그 잘생긴 얼굴을 감상했다.

    “내가 키웠지만 정말 미모만큼은 대단하다.”

    “당신은 내 얼굴만 좋아하네.”

    “오늘 파티 한번 경험해 보고 나면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네 얼굴을 좋아하게 될 거야.”

    그중에는 이르커스랑 연배가 맞는 또래 아가씨들도 있을 것이다. 약혼이나 결혼이야 이르커스의 지위가 있으니 동맹과 위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연애는 자유 아니겠는가.

    참하고 어여쁜 귀족 영애 한 명 있으면 만나 보라고 등이라도 떠밀어야지.

    또래 친구 만들어 주겠다고 데리고 왔던 에델라이드랑은 친구라기보단 원수 비슷한 사이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이번에야말로 이르커스에게 친구 및 연인을 만들어 줄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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