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38화
내 방 침대보다 이르커스의 방 침대가 더 푹신푹신한 건 내 기분 탓일까?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들 하니까.
나는 지금 멀쩡한 내 방을 내버려 두고 옆방에 있는 이르커스의 거처에 무단 침입해서 그 침대에 퍼질러 누워 있었다. 물에 데친 시금치도 지금의 나보다는 파릇파릇할 게 분명했다.
불로불사의 몸이면서 체력이 닳는 건 역시 너무 불공평하다. 물론 과로로 코피 흘리면서 쓰러져도 다음 날이면 멀쩡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겠지만, 그렇다고 쓰러진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어느 경지에 이르렀으면 신체가 좀 강철 같아지고, 잔병치레 따윈 하지 않는 몸이 돼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이고…… 삭신이야. 늙는다, 늙어.”
늙기야 이미 늙었지만.
이르커스가 온갖 수업에 불려 다니며 더 쌓을 것도 없는 기초 교양에 시달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냥 파업 선언을 해 버렸을 것이다.
“역시 에델이 있어야 했는데.”
한네만을 마탑주 감시로 보내 두고 혼자서 하루에 네다섯 명이 넘는 정치계 인사들을 상대하자니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판이었다.
이제 와 이르커스에게 줄을 대려는 놈들은 나를 통해 신붓감을 소개해 주고자 안달이 나 있었다.
자기 딸이나 누이, 심지어는 사촌 동생까지 끌어들여 관계를 구축해 보려는 게 웃겼다. 안전한 베팅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인간들에겐 이르커스의 약혼자 자리가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애가 열일곱 살밖에 안 됐는데, 누굴 짝으로 맺어 줘야 할지 고민하느라 휴식 시간을 홀라당 태워 먹는 게 요즘 내 생활 패턴이었다.
이르커스에게 직접 누가 좋냐고 물어봐도 되겠지만, 아직 거기까진 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애를 약혼시킬 수가 있어? 시킬 거긴 하지만, 어떻게 그러냐고.
덕분에 한가하게 황궁에서 주는 다과나 받아먹으며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트리스탄과 로버트를 볼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쟤네 둘이랑 에델라이드랑 교환해 오고 싶다. 진짜 저 밥벌레들을 어디 써먹는단 말인가.
내가 로버트와 트리스탄의 쓸모를 고민하는 동안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몸을 일부러 일으키지 않아도 이르커스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굴려, 침대 위에 찰팍 엎드렸다.
“뭐가 잘 안 돼?”
침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르커스가 내 뒷머리로 손을 뻗었다. 예전에는 나보다 작던 손이 어느새 한 뼘 정도 더 커져서, 내 뒤통수가 이르커스의 손바닥 안에 알맞게 들어갔다.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투박한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게으른 고양이처럼 그 손길을 받으며 한숨이나 푹푹 쉬었다.
“인간이 너무 싫어.”
“누가 걸리적거리게 했어?”
“걸리적거리는 놈들이야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 자기 주제 모르는 놈들은 그것보다 더 많고.”
“정 힘들면 그냥 전부 죽이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나한테 나쁜 것만 배워서……. 네 정신머리를 고치기 위해서라도 그런 짓은 안 할 거야.”
나는 엎드려 누운 채로 고개만 슬쩍 돌려 이르커스를 바라보았다.
아침 일찍부터 예정된 교육 때문에 하루에 수면 시간이 네 시간도 채 안 된다고 들었는데, 이르커스의 얼굴은 피곤함 따윈 모른다는 듯 반질반질 윤이 흐르고 있었다.
몰래 보약이라도 지어 먹었나. 체력이 좋은 건 다행이지만, 나만 이렇게 피폐해진 것 같아서 좀 억울해졌다.
“넌 내가 널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아야 해.”
“내가 왜 모르겠어. 당신이 날 얼마나 아끼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나일 텐데.”
어렸을 때와 달리, 이제 능청맞게 대꾸도 할 줄 안다. 이르커스가 내 고개 아래로 베개를 받쳐 주었다.
“이중 첩자 하겠다고 온 놈만 벌써 세 명이야. 그중에서 제일 쓸 만한 건 에킨도르 멜킨이라는 놈이고. 백작가 장남인데, 소백작은 여동생이야.”
“나머지 둘은?”
“별로야. 바로 쳐 내진 않을 거지만, 굽힐 줄을 모르더라고.”
대현자를 앞에 두고도 멜킨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공손하게 빌빌거리는 대신,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자기가 선심 써서 이르커스에게 줄을 대 주겠다고 나온 놈들이었다.
솔직히 그 자리에서 나한테 벼락 안 맞고 돌아간 것만 해도 그 두 놈들은 자기들 인생의 행운을 다 끌어다 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궁에 들어온 뒤로 나는 강제 인내심 수양 중이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사람답게 사는 법을 다시 익히게 될 줄이야.
“너도 이미 짐작했을지 모르지만, 네 나이와 신분이 있으니 다들 약혼 동맹을 원해.”
약혼 얘기를 그 당사자인 이르커스에게 비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괜히 욱신거리는 가슴 한구석을 애써 무시했다. 자식새끼 출가시키는 건 원래 이렇게 힘든 일이구나.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계승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약혼하는 게 나쁘진 않을 거야. 정치적인 약혼은 흔하니까.”
“당신은 내가 누구와 약혼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하라고 하면, 넌 누가 상대여도 상관없니?”
“누구여도 상관없어.”
이르커스는 나와 달리, 약혼 얘기를 듣고도 예상했다는 듯 평온해 보였다.
날 좋아하는 감정을 숨길 생각조차 없으면서 내가 지정해 준 상대와 약혼하는 것엔 어떠한 거부감도 보이지 않는 이르커스가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처럼 하기 싫다고 칭얼거리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르커스는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면면이 꼭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과 약혼해도 괜찮아?’라고 묻는 것만 같아서, 오래 쳐다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정치적인 약혼은 애정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아마 멜킨 소백작과 이르커스를 약혼시키더라도, 두 사람이 실제로 서로를 사랑하게 될 확률은 내가 곱게 죽을 확률보다 낮을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언젠가 이르커스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지금 같은 맹목을 보인다면,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내지 않기 위해 나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약혼 이야기는 상대를 직접 만나 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소백작과 한번 만나 본 뒤에 약혼 여부를 정하는 게 좋겠어. 패로 쓰고 버릴지, 동료로 삼을지를 판단해야 하니까.”
“……그래.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그리고, 황제가 드디어 공식적인 소개 자리를 만들어 주겠단다.”
“직접 가서 또 한 소리 했구나.”
“당연하지.”
자기 아들이 집에 돌아왔으면 재깍 환영 연회를 베풀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판타지 세계 속 아버지들이란 정상인이 별로 없었다. 이러니까 다들 대디 이슈 달고 사는 거 아냐.
나는 알현을 두 번이나 거절한 황제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짤짤 흔들었다.
기사들이 나한테 검을 겨눴지만, 당연히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방검 마법을 걸어 둔 상태였다. 기사들의 하찮은 검술 실력으론 내 몸에는 상처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남의 알현실 가서 지랄이란 지랄은 다 하고 온 탓에 내가 지금 이렇게 피곤한 거였다.
“후줄근하게 입혀 놨을 때도 우리 이르는 참 미소년인데…… 때 빼고 광내면 얼마나 미남일지 기대된다.”
“당신도 참여하는 거지?”
“난 공식적으로는 참여 안 해.”
주인공은 온전하게 이르커스여야 한다. 대현자라는 뒷배경이 있음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르커스를 위한 환영 연회이니만큼 사람들이 나한테만 관심을 보이는 건 원하지 않았다. 마법사나 신관 놈들이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라며 들러붙는 것도 딱 질색이었고.
“대신, 비공식적으로는 참여할게. 학부모 된 도리로 참관 수업 정도는 가야지.”
“첫 춤은 당신이랑 추고 싶어.”
“난 싫어.”
새침하게 말하고 몸을 팩 돌려 눕자, 이르커스가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르커스의 눈썹 아래로 정돈되지 않은 금발이 물결처럼 몇 가닥씩 떨어져 내렸다.
“이렇게 부탁해도?”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이겠지.
나는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이르커스의 이마를 툭 밀어냈다.
“어디서 수작이야.”
내가 자기 얼굴에 약하고, 가끔 흔들린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이르커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밀어낼 거면 확실히 밀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르커스에게 냉담하게 굴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아가씨들이랑 무사히 어울리고 나면 상으로 한 번은 춰 줄게.”
“조건이 너무 가혹한데.”
“싫으면 말던가.”
“내가 졌어.”
순순히 항복 표시를 한 이르커스가 내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어릴 때와 달리, 단단해진 팔에 핏줄이 설 만큼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꼭 내가 도망이라도 갈 거라고 생각하는 태도였다.
자세가 불편해 몸을 뒤척여 보려고 했지만, 이르커스가 나를 너무 꽉 안은 탓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닿아 있는 체온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이르커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졌다’는 이르커스의 말과 달리, 항상 이 관계에서 패배하는 건 나였다. 본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니까.
나는 이르커스의 결 좋은 금발을 손으로 살살 쓸어 주었다. 남에게 이 꼴을 들킨다면 분명 흉흉한 소문이 황궁을 휩쓸게 틀림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 황궁에서 이런 식으로 이르커스의 어리광을 받아 주면 안 된다는 걸 이성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밀어낼 수가 없었다.
“딱 한 번만이야.”
그래도 사교계 첫 데뷔 행사니까…….
그 정도 부탁은 못 들어줄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