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37화
“나한테 팔다리 잘라 달라는 소리 안 해서 깜빡 속을 뻔했네. 그래, 마탑 소속이었다고? 왜 쫓겨났어?”
“……쫓겨난 거 아닌데요.”
“안 쫓겨나고 제 발로 나왔다고?”
“도망쳤습니다.”
트리스탄이 한네만을 추궁하는 내 어깨를 붙잡고 자기 단원을 의심하지 말라고 으르렁거렸다.
웃기는 소리였다. 어떻게 의심을 안 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걸 저놈은 인생을 아직 덜 살아 봐서 모른다.
하지만 마탑에서 도망쳤다는 말은 좀 흥미롭긴 했다.
마탑은 한번 들어온 마법사들을 쉽게 놔주지 않는다. 마탑의 규율을 어기거나 범죄를 저질러서 추방하는 경우라도 쫓겨나는 마법사의 스승을 불러, 그 앞에서 마법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 곳이 마탑이었다.
한마디로 자기 발로 멀쩡히 걸어 나올 수 없는 곳이란 소리다. 판타지 세계의 마법사 모임은 원래 다들 제정신이 아니니까.
한네만처럼 보유 마나 양이 많지도 않은 평범한 마법사가 그런 마탑에서 사지 멀쩡하게 튀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심지어 수배령에 걸리지도 않고, 몇 년 동안 용병 생활을 했다는 건 더 말이 안 되고.
“저는 마탑에서 중요한 마법사가 아니었으니 추적을 피하는 건 쉬웠습니다. 그렇게 강하지도 않고, 대단한 연구 실적을 남긴 적도 없으니까요.”
“마탑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니?”
“전혀요. 그놈들은 다 미친 광신도들이에요.”
한네만이 마탑 이야기를 하면서 이를 갈았다.
“연구 실적 훔치는 놈들 천지에, 치외 법권이라고 사람 잡아다 실험하는 인간들도 있고…… 다시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저렇게 치를 떠는 걸 보니 마탑 쪽에 붙어 우리 정보를 팔아넘길 것 같지는 않았다.
마탑 놈들이 한네만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회색 쥐처럼 생겨서 제법 유약해 보이는 한네만을 고작 ‘마탑’이라는 두 글자만으로 빡치게 할 만큼 놈들이 거지 같은 행보를 걸어왔다는 건 틀림없어 보였다.
“그럼 원래대로 시키려던 거 그냥 시켜도 되겠네. 얘, 너 그럼 마탑주랑 그 외 떨거지들 감시 좀 해라.”
“제가요?”
“어. 특히, 마탑주 앙헬. 아마 1황자랑 마탑 놈들은 따로따로 움직일 거야.”
“전 마법사라 분명 들킬 텐데…….”
한네만이 두 손을 쭈뼛거렸다.
망설이는 것도 이해는 됐다. 마탑에서 도망친 놈한테 마탑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도 안다. 잘못 걸리면 마탑으로 다시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럼 내가 미안해서라도 어떻게든 마탑 박살 내서 꺼내 줘야지.
“아냐. 너, 안 들켜.”
“네?”
“네 말대로 마나 보유량이 허접해서 대놓고 마법 안 쓰면 안 들킨다고. 통신 마도구 달아 줄 테니까, 감시 카메라 역할 좀 해라.”
“감시 카메라가 뭡니까?”
“몰라도 돼.”
하지만 그 정도로 목숨이 걸려 있어야 사람이 치밀해지지 않겠는가?
나는 웃는 얼굴로 한네만에게 기척을 지우는 마도구 하나를 찾아 건넸다. 절대 내가 직접 하려다 내 수준에 맞는 마도구 개발에 실패해서 남을 시키는 게 아니었다.
“잘해. 지금 잘해야, 미래의 황궁 마법사 되지.”
“뭐요? 한네만은 용병단에 계속 있을 거라고.”
“황궁 마법사보다 급여도 적게 줄 거면 닥치고 있어라, 트리스탄. 원래 사람은 돈 더 주는 곳으로 이동하는 법이야.”
이제 나는 나대로 좀 할 일이 있었다.
슬슬 몸이 달은 반군들로부터 입질이 오기 시작했으니, 줄을 당길 필요가 생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만히 죽치고 기다리다 보니 여기저기서 접견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우스운 건 이르커스를 직접 만나고자 하는 용기 있는 놈은 아직 없고, 나를 몰래 만나고자 하는 놈들만 널렸다는 점이었다.
황제는 아직도 이르커스의 복귀를 정식으로 고지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너 진짜 죽어 볼래?’ 하고 쳐들어가야 미적미적 아들의 무사 귀환을 환영한다며 연회를 열어 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엎드려 절 받는 건 아직은 내 쪽에서도 사양이었다.
????????????
나는 내 앞에 앉아 연신 눈치를 보며 땀을 뻘뻘 흘리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가 가져온 손수건은 땀에 젖어 원래의 원단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에킨도르 멜킨?”
자신을 멜킨 경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작위를 가진 귀족이 아니었다. 멜킨 백작가의 장남인데 작위는 제 누이가 물려받을 것이니 호칭도 멜킨 소백작 대신 멜킨 ‘경’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애초에 나로선 멜킨이라는 성씨를 13대 황제 시절에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신흥 귀족일 테고. 귀족파 인물이라면 라단타 쪽에 서서 이르커스를 몰아내고자 하는 게 목적일 테다.
그런데 그 남자가 은밀하게 나를 찾아와선 이렇게 별말도 못 하고 땀만 흘리고 있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이놈은 지금 딱 봐도 박쥐 짓을 하려고 밑밥을 까는 것이다.
소백작으로서 교육을 받느라 바쁜 누이와 병환이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궁에 들어와 멜킨 백작가의 전반적인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는 번지르르한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에킨도르 멜킨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놈팡이였다. 장가나 잘 드는 게 저놈의 마지막 희망일 테지.
그러니 라단타 아래에 붙어서 어떻게든 권력을 키워 보려고 했을 것이다. 작위도 없는 놈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도 납죽 엎드려서 라단타가 시키는 일이라면 개처럼 뛰어다녔을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인간은 400년 동안 변하는 게 없는 동물이니까. 예측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그가 라단타를 떠받들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른 이유는 1황자가 다음 대 황제가 될 것이라는 게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일 테다.
다른 형제자매 둘은 죽었고, 이르커스는 공식적으로는 실종 상태. 남아 있는 막내 황녀는 1황자와 동복형제로 계승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조금만 고생하며 기다리면 자신이 황제의 심복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으리라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튀어나온 것이다.
사라졌던 3황자가 그냥 돌아온 것도 아니고, 대현자를 등에 업은 채 돌아왔다. 황제는 3황자를 못마땅해하지만, 그의 등장만으로 계승 싸움의 판도가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걸 짐작하지 못하는 머저리는 드물었다.
“나와 거래를 하고 싶다고.”
“예, 그렇습니다.”
“내가 당신의 뭘 믿고 거래를 받아 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입궁 후에 내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내게도 눈과 귀가 있으니 그쪽이 1황자의 개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멜킨의 두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람은 시각적인 것에 휘둘리는 동물이라, 머리로는 내가 400살 넘은 노인네라는 걸 알아도 겉으로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터였다.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자신을 ‘1황자의 개’로 지칭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겠지.
“황궁에서 새로운 세력을 키우는 건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알아. 얼마나 장악을 잘해 놨는지…… 나도 이렇게 고여서 썩은 물은 또 처음이거든.”
하지만 멜킨은 곧바로 열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퍽 현명하게 느껴질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조건을 읊기 시작했다.
“대다수 귀족은 모두 1황자님의 편입니다. 황비의 외척인 베첼 공작가가 뒤를 봐주고 있고, 1황자님은 성인이 되신 이후로 내내 황태자 자리를 지키고 계시니까요.”
“그걸 알면서 우리 쪽에도 줄을 놓겠다?”
“뭐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간악해 보인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건 대현자님과 3황자님께도 좋은 거래가 될 겁니다.”
땀을 저렇게 흘리면서도 침착하게 말을 맺는 걸 보니 잔머리 하나는 좋아 보였다. 뭘 시킨들 눈 밖에 나기 싫어서 어떻게든 울며 겨자 먹기로 해 올 것 같은 머슴 기질도 있어 보였고.
나는 가늠하듯이 에킨도르 멜킨의 토마토 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에 토마토를 사면서 이르커스 보고 황제가 되면 꼭 정치를 잘해야 한다고 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절 이중 첩자로 삼아 주십시오.”
비싼 토마토 하나가 제 발로 굴러들어 왔다. 나는 머릿속으로 이 토마토를 어디에 어떻게 써먹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굳이 ‘이중 첩자’ 소리를 한 걸 보면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는 놈이었다.
“제 누이가 아직 미혼입니다.”
“소백작 말하는 거니?”
“예. 만일 3황자께서 확실한 세력 구축이 필요하시다면, 멜킨 백작가는 기꺼이 손을 내밀 것입니다.”
에킨도르 멜킨의 누이라면 이르커스와 나이 차이가 꽤 날 터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미혼인 이유는 형제들에게 혼인을 이유로 덜미가 잡혀 작위를 뺏기지 않기 위함이겠지.
애초에 황실이나 귀족이나 사랑을 기반으로 결혼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현대 한국에서도 돈 많은 재벌들은 정략결혼이 일상이지 않던가.
“소백작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
“올해로 스물다섯입니다.”
“여덟 살 차이라…….”
이르커스와 내 나이 차이에 비하면 여덟 살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모친의 외척 세력을 동원할 수 없는 이르커스의 경우, 약혼 관계라도 잘 맺어 최대한 동맹을 만드는 게 이로웠다. 왜, 태조 왕건도 결혼을 수단으로 삼아 세력을 구축하지 않았던가.
그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이르커스가 누군가와 약혼하고, 이어 결혼한다고 생각하자 속이 쓰렸다. 자녀를 시집, 장가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머리와 다르게 마음은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이르커스는 내가 정치 관계를 위해 누군가와 약혼하라고 말하면, 처음에는 거절하더라도 결국 내 말을 들어줄 터였다. 자기에게 이로워서가 아니라, 내가 시켰기 때문에 받아들일 테지.
굳이 이런 수를 쓰지 않더라도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이르커스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죽은 이후가 문제다. 예카리나만 믿고 있다가 그 사후에 혁명으로 죽은 다윈의 얼굴이 바로 떠올랐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귀족과의 커넥션은 꼭 필요하다. 간신들만 옆에 두고 공포 정치를 펼칠 게 아니라면, 밑밥은 일찍 깔아 두는 게 이로웠다.
“그래.”
나는 불편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킨도르 멜킨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 제안, 한번 고려해 보지.”
이건 다 이르커스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다.
나는 그 미래에 없어야 하니까.